〈 90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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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드래곤을 잡고 토벌한 공로 치하를 위한 황실에는 연회를 열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서둘러 참여했고 지방의 귀족들조차 재산을 탈탈 털어서 말을 쉬지 않고 몰아 찾아왔다. 지방 귀족에게 있어 중앙 귀족과 안면을 터는 건 굉장히 중요했지만 초대장이 없으면 그런 이들의 파티에는 참가가 불가능했는 데 이번 황실에서 주관하는 연회는 귀족이면 누구든 참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날려 먹을 정도로 어리석다 못해 재기불능인 귀족은 제국에 없었다. 야망이 없어서 참가를 안 한 거라면 또 모를까.
교단 본부인 교황청에서 추기경까지 직접 참석하는 연회는 인맥의 사회나 다름없었다.
내 여자인 아비 누나와 아르잔느, 그리고 앨리스는 셋 다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아비 누나는 큰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최대한 정숙한 복장을 입었지만 유방의 굴곡이 되려 시선을 끌었고, 아르잔느는 페가수스의 격세유전으로 넣을 수 없게 된 등짝의 날개 때문에 평소처럼 등이 훤히 파인 복장이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가슴골이 거의 배꼽까지 파인 이브닝 드레스 입었다.
셋 다 눈이 돌아갈 미녀라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행복을 누렸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냐! 레온의 머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니까?"
"아니에요, 아비. 그건 너무 중성적이잖아요. 괜히 남자까지 꼬이게 할 필요가 있어요? 여기서는 오히려 북부 설산 민족의 거친 헤어스타일을 하는 게 좋아요!"
"둘 다 아닙니다. 연회에서 그런 눈에 띄는 헤어를 해서 뭐합니까? 레온은 최대한 단정한 복장에 깔끔한 올백머리가 낫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연인들이 하나 같이 날 최고의 소년(?)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단장을 시키는 데 그게 어연 두 시간 째다.
그만! 내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아비 눈나는 보추콘이라는 이상성욕 때문인지 무심코 중성적인 분위기가 나는 게 단장시키는 건지 분장을 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아르잔느는 항문을 단련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동성애자여서 그런지 내게 남성적인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며 금태쇼인 나를 어디 뒷골목 아이들의 대장 같은 모습으로 꾸미려 든다.
앨리스는 그냥 장인어른에게 날 잘 보여야 한다는 듯 단정한 외형을 추구하는 데 금발 태닝이라 깔끔하긴 해도 좋은 말로 어울린다고는 하지 못하겠더라.
그렇게 한 시간이 더 걸려 여성진이 타협을 보고 나는 그나마 야수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단정한 미소년이 되어 연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녀들이 날 보고 힐끔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세 여자들의 타협선이 제법 적절하게 들어간 모양이다. 하지만 시달리느라 기운이 빠진 나는 아비 누나와 아르잔느에게 양손을 잡힌 채 질질 연회장으로 끌려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본 드래곤과 싸운 것과 동급의 난이도였어.
정신력이 실시간을 깎이는 걸 알면서도 꼼짝 못하는 처지였다. 그만큼 힘든 시간은 내게 더 이상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휴. 어서 가자고. 이미 연회가 시작한지 두 시간은 지났을 거야."
창가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이미 귀족들은 와인을 마시며 자기들끼리 희희낙락 떠들고 있었다. 연회의 본방은 늦은 시간대에 주최자인 황제가 갑툭튀를 시전하고 주인공에게 포상을 내리고 헤어지는 것이고 그때까지 시간은 널널했으니까. 어지간히도 큰 사고를 치는 게 아닌 이상 귀족들 편히 대화를 나누며 물밑 정치질을 하는 시간인 것이다.
사실 어른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혀 밑에 비도를 숨기는 꼴이지만 젊은 자제들은 그런 것보다 무조건 인맥 만들기와 순수하게 연회를 즐긴다.
나랑 앨리스, 그리고 아비 눈나와 아르잔느 또한 아직은 젊은 편이었기에 그런 더러운 어른들의 정치놀음에 낄 필요는 없었다. 우리들도 젊은 귀족 자제들처럼 연회나 즐기다가 장인어른에게 포상을 받고 돌아가 므흣해지는 밤의 놀이나 할 생각이다.
"하르트 공작가의 둘째 공자 레온 하르트! 그리고 상급 수녀 아비게일 윌리엄스 님과 호위기사 둘 참석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우리는 흑마법사 조직인 육봉성의 간부 셋을 조졌으며 그중에는 그들의 실험체인 키메라 본 드래곤까지 있었다. 그렇기에 전설 속에 나오던 존재를 쓰러뜨린 우리는 용살자(드래곤 슬레이어)로 불리며 연극까지 만들어질 정도라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
문관에 가까운 타입인 이들은 어떻게든 우리와 인맥을 만들려고 했고 무관 타입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세를 내게 은연중에 쏘며 실력을 가늠하려 들었다.
"시바, 다 안 꺼져?"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내가 거친 손짓과 함께 무형지기를 일으켜 그 기운들을 모조리 쳐내자 무관 타입의 귀족들이 다들 썩은 얼굴이 됐다. 조금 확인하려고 간을 보려다가 내 기운에 무력하게 튕겨졌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 함께 진짜로 속이 상해서 내상을 입은 거리라.
그때 인숙한 얼굴의 귀족이 내게 다가왔다.
"하하하! 이거 우리 엔티알 백작령의 영웅들이 아니던가! 오랜만에 보는군, 레온 공자!"
"오. 안녕하세요, 엔티알 백작님."
시조가 여자를 빼앗겼다 알려진 엔티알 영지의 영주인 엔티알 백작과의 재회였다. 그는 여전히 출렁거리는 뱃살을 간직한 게으름의 표본 같은 체형을 갖고 있었다.
아니, 저 양반은 어째 오크 웨이브까지 두들겨 맞았으면서 살을 빼려고 하질 않는다냐.
그 나태함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돼지 귀족인 엔티알 백작이 내민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악수를 나눈다. 아비 누나가 내 옆에 팔짱을 끼더니 입가에 면장갑을 낀 손을 올려 호호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오오. 윌리엄스 상급 수녀님께서도 계셨군. 아, 둘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있지. 그게 사실이었나?"
"네에. 부끄럽지만 그 사고로 홀몸이 된 절 레온 공자가 위로해 주셨거든요."
홍조를 띄우며 은연하게 돌려 말하는 아비 누나의 화법에 엔티알 백작은 납득했다.
"그렇군. 확실히 레온 공자라면 그럴 수 있겠어."
"……."
아니, 그런데 왜 제 고간을 보세요?
설마 엔티알 백작도 혐오스러운 동성애자인가 싶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프리트랑 야외 섹스하다 걸려서 내 좆이 대물이라는 소문이 영주성에 났던 게 떠올랐다. 이런 쉬펄. 내 대물로 수인의 막대한 욕구불만을 해결해 준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그가 어디 가서 소문낼 정도로 입이 싼 인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시체 하나 치울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다.
"내 레온 공자의 성격을 잘 알지."
"아니, 제 성격을 백작님이 어떻게 아시죠?"
"귀찮은 건 싫어하는 성격이 아닌가? 복수에 망설임이 없고."
"……."
아니, 어떻게 알았지?
내 표정에서 드러난 심정을 읽은 건지 엔티알 백작이 피식 웃었다.
"이복형제가 고자가 됐다는 데 그렇게 대놓고 즐거워할 인물은 별로 없지. 일단 겉으로라도 슬퍼해야 주변에서 알아서 좋은 시선 보내 주고 떡고물이 떨어지는 편이거든. 게다가 대놓고 오크 샤먼킹을 잡으려고 소수정예를 짰지 않은가. 복잡하고 귀찮은 건 하기 싫은 타입인 거지. 그보다는 그만한 실력이 되니까 그런 거지만."
"와우. 족집게시네요."
"이래 보여도 정치계에 구르고 구른 인물이라네."
확실히 엔티알 백작은 뱃살만 보고 무시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저 뱃살과 호감형의 토실토실한 인상을 보고 낚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저래 보여도 정치계에 발을 들이고 백작으로서 나름 유명한 데다가 검술명가로 공작가까지 오른 하르트 가문 휘하의 귀족이다. 쓸모 없었다면 아버지가 굳이 날 보내면서까지 구하려 들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내 영지의 빚도 있고 하니 귀찮은 정치계의 귀족들은 커버해 주겠네. 아직 초반이라 온 사람들이 백작 이하의 사람들이라 충분히 내 선에서 차단이 가능하거든."
"오호. 정말로 고맙습니다. 입장하자 마자 구멍 낼 기세로 쳐다봐서 어떻게 할까 싶었거든요."
"하하하. 뭐, 자네라면 결투라도 해서 입을 다물게 하지 않았겠는가?"
"아니, 이건 또 어떻게 아셨데."
"…진짠가?"
"네."
"……."
엔티알 백작의 돼지 뒷다리살 같은 포동포동한 뒷목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보인다. 설마 하겠지만 내가 정말로 귀족을 결투로 박살을 낼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뚝배기 수녀 아비게일 윌리엄스 누나의 남자친구로서 뚝배기를 깰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정말로 깨져도 아비 누나가 치료해주겠지, 뭐.
그런 내 진심을 느낀 것인지 엔티알 백작이 살짝 평정심이 흐트러진 얼굴로 물러났다.
"그럼 난, 이만 귀족들을 막으러 가 보겠네. 자네가 주인공이니 연회를 편히 즐기게나."
최대한 귀족들을 막아내겠다는 결사 어린 표정의 엔티알 백작. 내 여인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본다.
이번 연회 동안 백작이 흘릴 땀이 폭포수 못지 않게 흐를 게 훤히 보이나 보다.
"백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연회나 즐기자고. 장… 폐하께서 등장하시는 건 적어도 이틀 후인 마지막 날이라고 하셨으니까."
연회에 황제가 등장하는 건 잠깐뿐이며 그건 후반부가 보통이다. 그래야 최대한 많은 귀족이 황도로 모여 연회에 참가할 테니까. 안 그러면 지방 귀족 서러워서 살겠나.
그래서 연인들과 함께 황성의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식사를 즐겼다. 궁중요리사가 만든 음식들답게 하나 같이 맛이 탁월했다. 저번에 귀족들만 입장이 가능한 고급 식당에 앨리스와 가서 먹었던 음식보다 별 하나 더 줄 정도로 절묘한 미미였다.
오리훈제를 어떻게 이리 기가 막히게 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스테이크에 뿌려진 소스는 육즙과 맞물려 환상적인 식감과 맛을 자아 내는 데 아비 누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 추천했다. 그러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음식이 있기에 관심을 가졌더니 그럴 만 하더라. 정말로 이해가 안 가지만 귀족들의 연회장에 당근 케이크가 있더라.
딸기를 얹어도 모자를 판에 당근이라니.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누가 입김을 넣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토끼 수인이라든지 내 항문착정 전문가 애인인 아르잔느처럼 말 수인에게는 천상의 음식 같을 테니까.아마 내 연인을 고려해서 넣어 준 게 아닐까 싶다.
기막을 치고 연인들과 함께 수다나 떨며 식사를 즐겼다. 이렇게 섹스 생각도 없이 다 같이 모여서 맘 편히 얘기하는 게 얼마만인지. 최대한 이 시간을 만끽.
"네놈이 그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야만족 따위가 용살자라니! 믿을 수가 없군. 나랑 결투다!"
"……."
밥 먹고 있는 데 얼굴에 손장갑을 던지며 귀족 간의 결투를 신청하는 희대의 얼간이가 있었다.
툭.
아, 양념이 얼굴에 묻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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