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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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나는 아르잔느의 손을 잡고 서둘러 극장에서 나갔다. 거기 더 있다간 내 손발이 마른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것 같았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쿡쿡 웃음을 흘린 아르잔느가 빈 손으로 얼른 입가를 가렸다. 조숙한 게 정말로 천생 여성스러운 행동거지가 담겨 있었다.
얘는 태어날 때 신이 실수한 거 같아.
"급히 만든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연극이었네요."
"그 손발이 오그러들 것만 같은 대사를 치는 게 나쁘지 않았다고?"
"네."
즉답이었다.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어 주며 설명해 준다.
"보통은 덜 오글거리긴 해도 저 정도면 양호하다는 거죠. 보통 연극이란 절반이 왈패들이 용돈을 벌려고 대충 휘갈겨 만든 대본으로 무대에 서거든요. 그래도 이곳 배우들은 정식 연극단이라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어요."
"평소에는 어떤데?"
"저런 징그러운 대사를 배우가 직접 외치지는 않고 나레이션이 [성흔 보유자의 손에 거악이 쓰러진다.]라는 식으로 나올 거에요. 직접 말하지 않은 사람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덜 부끄러우니까요. 이번에 나레이션이 없던 건 급격하게 짜느라 인원부족이었던 게 아닐까요?"
과연. 평소에는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나레이션으로 때워서 분위기를 좀 더 점잖게 한다는 건가. 설명이랑 대사는 엄연히 다른 법이니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만 역시 오늘 본 연극이 싸구려라는 생각은 여전히 떨쳐지지 않는다.
아니, 금태쇼인 내가 언제부터 훤칠한 키의 씹미남이 돼서 성검을 휘둘렀단 말인가. 일반적인 검에 오러를 씌우고 때리는 게 효율적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스릴과 합금된 본 드래곤을 상대로는 무형검이 더 효율적이어서 철검을 쓰지도 않았거늘. 이거 나중에 연극에 대한 국법을 조금 찾아볼까 싶었다.
오늘 녀석들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지만 좀 심각하게 오른손에 흑염룡을 품고 다니는 놈들이 할 법한 연극은 어떻게든 사전에 막고 말겠다. 지금 내 [직감]이 주장하는데 계속 냅뒀다간 나중에 성흔이 있는 오른손을 움켜 쥐고는 '크읏! 오른손에 깃든 백염룡이!'라고 외치는 연극이 나올 것 같다며 격렬하게 경고하고 있으니까.
"후후. 포기하시는 편이 좋아요. 예전에 아비도 잠깐 성녀체질 때문에 유명해진 적이 있는데 그때 나온 연극에서 아비 역할의 여성 배우가 글쎄 가슴에 진짜로 수박을 넣고 왔다니까요."
"……아비 누나 가슴이 좀 크긴 하지."
"제 가슴도 한 크기 하거든요?"
멍하니 아비 누나의 가슴을 떠올리고 있자니 질투를 한 건지 볼을 부풀린 아르잔느가 자신의 내 손을 꾹 잡아 당기더니 그대로 자신의 가슴골 사이로 파묻는다.
이것이 말젖! 내 찌찌성애 때문에 가슴을 신경 쓰며 몸을 관리하는 앨리스에게 전혀 뒤쳐지지 않는 탄력감이었다.
길거리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자 몇몇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자리를 피한다.……아니, 몇몇은 내 손이 파묻힌 아르잔느의 젖통의 골짜기와 훤히 드러나는 등짝을 힐끔거리더니 다리가 급격하게 불편해진 듯 어정쩡하게 걷는다. 그러고 보면 완전히 여성체가 된 아르잔느는 매력 포인트가 많기는 하지.
나는 묘한 질투심과 함께 이 여자가 내 것이라는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은연중에 느끼며 말젖 사이에서 손을 빼냈다.
"아."
이 안타까운 탄성은 아르잔느가 아니라 내가 뱉었다. 떨어지고 나니까 저 탄력감이 너무나 그립다. 앨리스나 티타니아, 아비 누나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주물렀지만 지금 길거리고 아르잔느를 더 보여 주기가 싫어서 이성이 이겼지만 나중에 침대에서 실컷 만지자며 본능을 위로한다.
그런 내 탄성에 아르잔느가 싱그러이 웃는다.
"후후. 직접 빼셨으면서 그렇게 아쉬운 얼굴은 안 하셔도 돼요. 공자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실컷 만지게 해드릴 건데요, 뭘."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말을 돌리시는 게 귀여우시네요."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래도 식사할 곳 정도는 사전에 알아뒀기에 이번에는 내가 리드할 수 있었다. 내 오감이라면 황도를 조금 걷는 것만으로도 일상적인 대화를 엿들어 인기 식당이 어디인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아르잔느를 데리고 간 곳은 [숲 속의 쉼터]라는 친환경적인 분위기의 가게였다.
처음에는 노예 요정과 인간 주인의 관계로 시작했다가 결혼에 골인해 지금은 부부가 된 이들이 차린 식당이라고 한다.
정령들과 함께 화려한 솜씨로 요리하는 주방장 요정과 C급에서 은퇴한 용병이 카운터를 담당하는 작은 식당. 요정답게 늙지 않아 예쁜 아내 덕분에 손님이 끊이질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음식맛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게 된다고 한다더라. 요리 또한 요정의 전통 음식을 인간의 입맛에 맞춰 어레인지한 거라 가성비가 좋다고 하니 갈 생각이다.
아르잔느가 몇 번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먹더라. 과하게 살이 찔 정도로 먹는 것만 아니면 복스럽게 먹는 걸 오히려 좋아한다니까 열심히 먹더라.
식당의 이름을 본 아르잔느가 가늘어진 눈으로 날 내려다 보았다.…서러워서 키 크는 약을 구해다 먹든지 해야지 원.
"요정 유부녀가 보고 싶어서 여기 오신 건 아니죠?"
"아르잔느랑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여기가 맛있다고 해서요."
"흐으응. 공자님을 믿어볼게요."
어디 한 번 보자는 아르잔느의 담담한 발언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굴욕을 당하게 됐다.
"꼬맹아. 여기 아이는 못 들어온다."
"……."
"풉!"
시발.
◇◇◇
내가 성인이라는 아르잔느의 보증,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제국민을 알려 주는 국민증을 꺼내 나이를 보여 주자 카운터 담당의 은퇴한 용병 아재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서비스를 줄 테니 용서해 달라며 사과했다. 자기 가게에서 가장 비싼 술을 선물로 준다고 하기에 나는 냉큼 받아들였다.
이곳에 환생하면서 강한 스펙의 잠재력을 지닌 것 외에 좋은 걸 뽑자면 술의 맛이다. 이 세계가 근본이 게임이라 그런지 술의 도수는 강했지만 동시에 아주 맛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현실에서 맛봤던 수박 맛 소주는 쓰레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가게에서 가장 아끼던 술을 준다고 하니 어찌 싫어할까. 사과를 받은 나는 아르잔느와 함께 착석하고 메뉴를 골라 주문한 뒤에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 이곳의 스테이크는 사실 고기가 아니라 콩이래."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응. 요정이 채식만 하는 건 아니지만 육식을 즐기는 정도는 아니잖아. 그래서 아예 콩으로 스테이크 맛이 나는 음식을 창안해 버린 거야."
"…그게 뭐예요."
마치 개구리는 사실 두 발로 걷는 생물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르잔느.
응. 그런데 그게 현실에서 일어났습니다!
콩으로 스테이크를 만드는 법이 현대에서 있다곤 들었는데 설마 여기서도 재현한 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채식을 선호하는 요정이라지만 가끔 요리를 하다보면 고기맛도 보고 싶어서 콩으로 스테이크가 만들어지는 건 어찌 보면 필연 아닐까.
열기로 아지랑이가 넘실거리는 콩 스테이크에서 퍼지는 향기는 마치 숲 속을 거닐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자연의 향기가 듬뿍 담겨 있었다. 아니, 쉬벌 콩에서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날 수 있는 거지?
'좋은 토양 냄새라면 또 모를까.'
근데 냄새를 잘 맡아 보니 자연의 향기라기 보다는 정령의 냄새게 짙게 배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설마 정령술로 요리를 하는 걸까.
나는 기감을 은밀하면서도 넓게 퍼뜨렸다. 티타니아의 계약 정령인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나 내 계약 정령이자 연인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에게는 들킬 수밖에 없어서 안 하지만 성노예를 자처하던 요정의 정령술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으리라. 하이엘프에 왕족이면서 노예상단에 들어가는 티타니아 같은 경우가 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주방을 훑으니 도마뱀처럼 생긴 불의 정령과 작은 페어리처럼 생긴 바람의 정령이 같이 콩 스테이크를 굽는다. 그것도 세 개를 거의 동시에 말이다.
요리하는 걸 훔쳐 보니 요정 유부녀는 조미료와 국물을 위한 재료 비율을 맞출 뿐이지 직접 굽거나 하는 식으로 요리하지 않는다. 어머나 세상에. 요리하는 정령이라니. 그러면 정령사는 요리할 필요가 없잖아. 순간 이프리트에게도 시켜 볼까 싶었지만 금방 그만두기로 했다.
'잘못해서 마력을 많이 가져가면 주방이 날아가겠지.'
오크 웨이브 때처럼 실수로 태양원기옥을 만들까 봐 무섭다. 본 드래곤과의 결전에서는 힘을 아낄 필요가 없다고 팍팍 쓴 것 같지만 그건 적이 강해서 버틴 거고 오우거였다면 수백 마리는 진작에 죽었을 화력이었다. 나도 신성력과 마력을 펑펑 쓸 정도였으니까.
"어서 먹자."
"네, 공자님."
우리는 콩 스테이크를 맛 보면서 의외로 대화가 잘 흘러갔다. 검을 다루는 검사에 가깝기도 하고 나는 방패를 쓰지 않아 아르잔느에게 듣는 방패술이 흥미롭기도 했다. 앨리스는 양손대검을 쓰니까.
게다가 내가 성흔을 갖고 있으니 신성력을 운용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었다. 나는 오러라면 전문가나 다름없지만 신성력은 미묘하게 기운의 구성이 달라 오러의 운용 방식으로는 제어에 효율이 떨어진다 느끼고 있었으니까. 전직 성기사였던 그녀는 내게 신성력을 제어하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친근한 사이가 더욱 깊어진 우리는 어느새 카운터 아재가 준 술을 잔에 따르고 건배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좋으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포도주는 정말로 맛이 좋았다. 계속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쁘지 않았고 어디 고위 귀족이 개최한 연회에 나오는 술과 비교해도 크게 꿇릴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한 병을 둘이서 나눠 마시고 더 주문해서 둘이서 네 병을 마셨을 쯤에는 콩 스테이크 또한 접시에 반사되는 후광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깔끔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서는 데 카운터 아재가 내게 엄지를 척 치켜 세운다.
실 없는 응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충 고맙다고 손을 들어 인사하고 알딸딸한 술 기운에 얼굴이 상기된 아르잔느를 데리고 황도를 걸었다. 말 수인이라고 모두 말술인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여관에 도착했지만 아르잔느를 그녀의 방에 데려다 주지 않고 내 방으로 데려갔다. 갑자기 내 방으로 오자 당황한 아르잔느가 술 기운이 깨려는 듯 했지만 나 또한 곧 있으면 섹스할 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술 기운이 깨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깨기 전에 이 몽롱한 기운에 도움을 받아 나는 아르잔느를 껴안았다.
"레, 레온 공자님?!"
"좋아해, 아르잔느."
"……."
"여태까지 헷갈리고 갈등도 많이 됐는데…… 이제 와서 네가 다른 남자랑 이어진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열불이 날 거 같아. 너를 광산에서 흑마법사 녀석들에게 잃을 가능성을 1%라도 생각한 순간 두려움이 날 마비시키는 것만 같더라. 그제야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겠더라고. 그래서 고백하기로 했어."
술 기운의 힘은 대단했다. 이런 오글거리는 속마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부 토해내게 했으니까.
나는 아르잔느의 고무공 같은 탄력의 가슴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으로 아르잔느를 쳐다 보았다.
"그러니까 내 여자가 되어 줘. 내 고백을 받아 줘."
"……네."
"작게 말해서 안 들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줘.
아르잔느는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굳은 살이 가득하지만 얇아서 예뻐 보이는 손등으로 진주 같은 옥방울을 훔치며 날 껴안고 귓가에 직접 말해 주었다.
"네. 저도 공자님의 여인이, 되고 싶어요. 저도…… 다른 분들처럼공자님을 사랑하니까요."
눈이 마주친 우리는 술을 마셔서 달아오른 열기에 기분 좋게 미소를 짓다가 서로를 부등켜 안은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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