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9)
* * *
황도에 도착했다. 당연히 황실 기사단은 황성으로 복귀했고, 성룡기사단 또한 교단으로 돌아갔다. 이미 전보가 각 집단의 수장에게 갔겠지만 직접 본, 현장에 있던 이의 보고를 듣고 나에 대해 판단하겠지. 이로서 내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오크 웨이브 때도 적당적당 했는데 이건 완전히 빼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비 누나가 죽게 냅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내 자유의 제한이 걸린 것으로 연인을 구했다면 싼 값이다.
일단 장인어른께서 어떻게 할지 모른다며 황성에서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다시 불러주겠다고 황실 제1 기사단장인 렉스 경이 말해 줬으니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게 전부다.
하사나까지 의뢰금을 받고 바로 당신의 그림자로 돌아가 버렸으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비 누나 또한 교황청으로 가서 추기경님(예비 장인어른)과 함께 교황님을 뵙는다고 같이 가 버렸고 다이너 경마저 오랜 저주에서 벗어난 아버지를 모시라고 냅두고 왔다. 앨리스는 지금 황성에서 장인어른께 잡혀 있는 건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고.
'즉, 남은 건 아르잔느뿐이라는 건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아직 고백을 하지 못했다. 분위기를 잡지도 못했거니와 주변에 그리 많은 사람들과 동행하는데 따로 고백할 시간을 낼 수 있었겠는가. 흑마법사 간부를 생포하고 돌아가느라 기습에 대비해서 신경을 바짝 세웠으니까.
거리를 벌려 둘만 있는 상황을 조성한 다음 고백하려고 해도 그들의 실력이라면 집중한 상태에서 둘이 따로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들렸을 테니까.
분위기가 너무나 흉흉해서 내가 쫄은 바람에 기회를 못 잡는 것도 있었고.
'아니, 근데 고백은 어떻게 해야 하냐.'
생각해 보니 티타니아는 주종 관계로 시작한 거고 이프리트는 정령사와 정령의 공생관계로, 앨리스는 급박한 상황에서 기회를 놓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됐으며 아비 누나는 그냥 날 덮쳤지만 좋아서 받아들이고 사귀게 된 거다. 아니, 쉬불. 여자만 넷인 내가 사실은 커뮤니케이션도 떨어지는 찐따였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무드 있게 고백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지만 그런 핑크핑크한 분위기를 조성할 자신이 없었기에 고민은 금방 때려치웠다.
'그냥 부딪히고 보자.'
이 야겜 세계에서 이런 스펙을 가지고 변태적인 성벽의 여인들을 만나고 제대로 된 연애 수순을 밟는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멍청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그저 몸매 좋은 동네 누나처럼 보이던 아비 누나마저 사실은 이해하기 힘든 보추콘으로 날 여장시키는 변태가 아니었던가. 아르잔느 또한 동성애자였던 만큼 일단 부딪히고 나서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지 지켜보는 게 좋으리라.
결정을 내린 나는 곧장 아르잔느가 머무는 여관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아르잔느. 있어?"
아, 네. 들어오셔도 돼요.
"그럼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경갑을 벗고 일상복을 입고 있는 아르잔느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날개 때문에 정상적인 복장이 아니었다.
엉덩이 골이 아슬아슬하게 안 보일 정도로 등이 훤히 파인 가정용 스웨터. 두툼한 털실 때문에 살짝 통통해졌다는 인상이 있음에도 등골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라인이 유독 부각되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앨리스가 여기사로서 전신이 운동하는 눈나 같은 느낌이라면 아르잔느는 운동을 겸하는 모델 눈나 같은 느낌이랄까.
비슷하면서도 매력 포인트가 달라서 유독 눈에 띄는 것 같기도.
게다가 통풍성이 좋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허벅지를 반이나 드러내는 그녀의 맨다리는 요정의 가녀린 다리와 비견될 건강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 위험하네.'
아르잔느를 성전환한 아르잔이 아니라 순전히 날 좋아하는 아르잔느란 여자로 보기 시작하니까 너무 눈에 잘 들어온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 아무런 예정도 없는데…… 같이 황도를 돌아다니지 않을래?"
"공자님. 그 말씀은 설마?"
"응."
나는 최대한 담담한 척 뒷짐을 지고 말했다.
"데이트, 하자고. 나랑 너랑 단 둘이서."
◇◇◇
황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장인어른께서 한때 노셨다고 하더니 정갈한 벽돌 바닥부터 제대로 고려해서 배치된 수로도, 그리고 건물의 위치가 체계적인 게 얼마나 백성을 배려하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있었다. 공작가도 이렇게까지 계획적으로 편의를 지원해 주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아르잔느와 야만족 혼혈인 내가 같이 돌아다니니 평범한 길임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상당히 끈다.
하긴, 등짝을 훤히 드러낸 말 수인 여자하고 금발태닝쇼타가 있으니 호기심 삼아 한 번 쳐다볼 수는 있지.
'그런데 어디를 가는 게 좋으려나.'
일단 나왔으니 내가 리드해야겠지. 그리 생각한 순간 아르잔느가 내 손을 잡아채고 이끌어다.
"공자님. 오늘 연극을 한다는 데 거기 가 봐요! 아, 혹시 연극 싫어하시나요?"
싫어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말하는 놈은 사람의 마음을 모르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진 미친놈이겠지.
나는 혹여나 거절할까 봐 불안에 눈을 떠는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제법 잘 만든 연극이라면 나도 좋아해. 가서 보자."
"네!"
아마 이벤트가 있으면 가장 잘 아는 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일 터. 황도 사람들에게 물어 연극이 어디서 열리는 지 알아내고 아르잔느와 손을 잡고서 함께 가 표를 구매하고 입장했다.
연극은 곧 시작한다고 한다. 연극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대 바깥에서 열심히 짐을 나르고 연극에 필요한 준비물을 설치하고 동분서주한다.
…연극이란 게 시작하기 전에 다 세팅을 끝내는 게 아니었던 건가? 이곳이 싸우려 연극장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야겜의 중세시대는 원래 이런 연극인지 갈피가 잘 안 잡혔다. 내가 현대 지구에서나 오페라를 봤지 여기서 봤어야 알지. 그래도 궁금했기에 아르잔느에게 물어보니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표값이 싸잖아요, 공자님."
"아."
표값이 유독 싸다고 느꼈는데 연극이 싸구려라서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아르잔느는 내용 알고 있어?"
"네. 저희가 흑마법사를 토벌했던 게 벌써 소문이 나서 연극으로 만들어졌데요. 그게 이번 연극인데 빨리 준비하느라 부족한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볼 만하다고 해서 공자님이랑 보려고 왔어요."
"아, 응."
우리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자니. 아르잔느는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그나저나 본 드래곤과 싸우는 수준의 전투가 역시 퍼지지 않을 수는 없었던 건가. 소문이 발보다 빠르다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닐까 싶었다.
"쉿. 연극 시작하나 봐요."
검지를 입가에 대며 말하는 아르잔느의 말에 나는 얌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연극을 구경했다. 성기사답게 여기사인 앨리스처럼 굳은 살이 많은 딱딱한 손이었지만 그래서 더 놓아 주지 않았다. 아르잔느는 그런 내 태도가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을 뿐이다.
연극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흑마법사로 변장한 건지 검은 로브를 입은 엑스트라가 우르르 나오고 몇몇 잘생긴 이가 간부로 변장한 건지 무언가를 조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황실 기사단과 교단이 기습을 감행했지만 전투는 나름 치열했고 점차 흑마법사들이 궁지에 몰렸다. 역시 소문으로 퍼진 이야기를 주제로 만든 연극이 제대로 구현할 리가 없지. 그래도 어떻게 엔딩을 맞이하는 지 궁금하여 계속 관람했다.
궁지에 몰린 흑마법사들이 기어코 커다란 종이를 막 꾸긴 채 뒤집어 쓴 인물을 비장의 수단이라는 듯 꺼냈다. 설마 저거 본 드래곤을 그냥 존나 큰 언데드로 표현한 건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다. 마력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굉장히 연약한 존재니 말이다. 괜히 귀족이 마력에 선천적으로 뛰어나다고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존나 큰 짝퉁 언데드에 황실과 교단의 병력이 밀리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개체에 그렇게 밀리며 위기가 찾아오려고 하자,
이 몸! 등장!
금발에 멋들어진 장식용 장검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주신께 성흔을 하사받은 몸으로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저건 또 뭔 쌍팔년도 대사일까.
"아니, 쉬벌. 저건 또 누군데."
"공자님. 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
금발태닝쇼타는 어느새 금발꽃미남이 되어서는 오글거리는 대사와 함께 검을 휘두르며 언데드를 상대했다. 힘이 들어가는 자세가 아닐 정도로 검을 못 다루는 연극 배우였지만 장식용 검이 워낙에 겉멋이 나는 데다가 마스크가 괜찮으니 안목이 없는 일반인들은 호옹하며 재미있게 본다. 내 입장에서는 정작 쓴 적이 없는 흑역사 노트를 개방하는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연극답게 별로 아프지도 않게 은밀하게 검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몇 대 맞은 언데드 배우가 쿠어어 같은 효과음을 입으로 내면서 쓰러진다.
금발미남 성자가 검을 머리 위로 높히 치켜들고는 포즈를 취하며 상큼한 미소로 외쳤다.
언데드를 물리쳤다! 악은 퇴치했다!
시발. 웬지 내가 악이 된 느낌이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퇴치당할 거 같아! 정신 나갈 거 같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