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3)
* * *
"아르잔. 너도 느끼고 있지?"
"네, 공자. 아주…… 아주, 끔찍하고 질척거리는 기운이네요."
비밀통로를 지키고 있던 나와 아르잔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기운에 광산 전체를 울릴 정도로 강력한 포효. 아무래도 흑마법사 새끼들이 드레이크, 최악의 경우에는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의 유해로 장난질을 쳤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드래곤일 가능성은 낮았다.
주신인 아가사는 동시에 용신이기도 해서 드래곤은 신의 사도라 불리기도 하는 종족이다. 그런 드래곤의 유해를 본 드래곤으로 만들었을 리가 없다. 설사 진짜 본 드래곤이 나온다 해도 격세유전을 펼쳐 천적이나 다름없는 신성력을 아홉 배로 늘려 성배를 휘두르는 아비 누나의 뚝배기 브레이크는 버틸 수 없을 거다. 뚝배기를 깨는 모습만 빼면 그야말로 성녀라는 체질에 걸맞게 부족함이 없는 신실함을 보여주는 게 아비 누나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교단의 전력이 달려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더라도 잡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하게 강한 적을 흑마법사들이 만들었을까. 그런 불안감이 뒷목을 찌르며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기사단장인 렉스 경에게 이곳을 맡아달라고 부탁까지 받았는데 함부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용병으로 참여한 만큼 상하명령체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짜로 흑마법사 조직의 상위 간부가 이 통로로 도망칠 가능성도 높았고.
힐끔.
아르잔을 훑어봤다. 분명 페가수스 격세유전을 일으킨 상태이며 상급 사제 못지 않은 신성력을 휘광처럼 일으키며 검을 휘두르는 아르잔은 강하다. 하지만 간부라면 비장의 수단이 하나 쯤은 있을 텐데 그런 아르잔을 이곳에 두고 나 혼자 이 기운의 근원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아르잔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레온 공자. 저는 괜찮아요."
"뭐가?"
"저를 믿고 아비한테 가 보세요."
"……."
내 속내가 훤히 보일 정도로 초조해 하고 있었다는 걸까. 아르잔은 내 고민을 해결해 주는 답안을 자신 쪽에서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같이 있는 동료를 혼자 냅두고 가도 되는 걸까.
아르잔이 내 동료가 아니었다면 곧장 맡긴다고 말하고 갔을 테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기사를 그만두고 호위 기사를 자처하면서까지 내 곁에 남으려는 아르잔을 나는 매몰차게 대할 자신이 없었으며 대우 또한 이렇게 하기에는 마음이 여렸다. 20살이나 먹고 이게 무슨 주책인 건지. 전생의 나이까지 더하면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성격이다.
아르잔은 그런 나를 향해 포근하게 웃어주었다. 그 미소는 평소에 상냥할 때의 아비 누나와 닮은 인상의 미소였다. 그래도 한 때는 부부였다는 걸까.
"이래 보여도 저 또한 성기사 중에서 상급의 자리를 차지하던 몸이에요. 비록 여자가 되었다지만 그 무력이 어디 가진 않답니다. 강한 흑마법사라 해도 저는 이곳을 지켜낼 자신이 있어요. 아니면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아니. 신뢰는 네가 남자였을 때부터 이미 하고 있었어."
"……그런 말은 치사하시네요."
얼굴에 홍조를 띄운 아르잔은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다는 듯 눈웃음을 그렸다. 다시금 생각하는 거지만 얘는 태어날 때 성별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지금 저 미소를 보면 그 누구도 아르잔이 전에 남자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가셔야 해요. 저는 아직 공자의 연인이 아니지만 아비는 공자의 연인이잖아요. 사귀는 여자를 위기에 빠지도록 냅두는 사람은 좋은 남자친구가 아니라고요?"
"……알겠어."
여기서 더 변명을 해봤자 내가 아비 누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할 뿐이다.그렇다면 역시 아르잔을 믿고 이 비밀통로를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오만함을 버리기로 했다. 환생하면서 여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이제 얼마든지 혼자서 많은 걸 해낼 수 있다고 자만했기에 이런 양자택일에 놓일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던 나를 자책한다. 어리석었던 나를 깨우쳐준 아르잔…… 아니, 아르잔느에게 나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 기사 아르잔느."
"?!……네!"
이름을 전부 부르는 내 발언에 아르잔느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한다.
"나의 기사로서 이 길을 지키라 명한다. 이 비밀통로에 올 적이 누군든지 반드시 쓰러뜨려라."
"네, 공자님. 당신의 기사로서 그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나는 아르잔느만믿을게!"
나는 그 자리를 당장에 박쳤다. 이미 광산의 경로는 머리속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가속사고]까지 사용하며 토벌대가 향한다던 경로와 이 추잡스러우면서도 방대한 기운의 존재가 느껴지는 방향을 고려해 아비 누나가 있을 곳을 예측한다.
당장 [화안금정]을 키고 그 추정되는 장소로 갈 수 있는 최단의 루트를 분석한다.
궁신탄영까지 연속으로 사용하며 나는 미끄러지듯이 신속하게 이동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흑마법사는 단칼에 동강 내며 이동한다. 아비 누나를 위험에 처하게 한 녀석들을 상대로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는 없었다.
벨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튀고 내장 조각이 퍼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미 생명체의 눈에서 빛을 거두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다 문득 화안금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싸우려는 녀석들 대다수가 똑같은 내부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걸 간파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키메라 연금술사가 만든 호문쿨루스라는 걸까. 키메라 연금술사라면 이 강대한 기운의 사역마에게 뭔가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자.'
아마 황실 기사단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언데드. 그 중에서도 교단의 본부인 교황청에 대비하기 위해 신성력에 대응할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최근에 하사나에게서 얻은 정보와 조합해 보자.
키메라 연금술사가 구매한 수많은 노예 요정들.
광산을 강탈해 실험장으로 만들 걸로 모자라 판매량이 점차 줄어든 미스릴.
몇몇 사라진 교단의 사제들.
결론은 하나로 이어진다. 아마 '신성력에 내성을 가진' 키메라 언데드.
물론, 언데드인 이상 신성력이 치명적이긴 하겠지만 일반적인 언데드보다 훨씬 더 강한 내구성을 지녔을 것이다. 아니면 언데드 자체의 내구성을 압도적으로 늘렸던지.
그럼 내 성화무형검도 녀석에게 그저 그런 무형검(?) 수준으로 취급 받을 지도 모른다. 나는 [가속사고]를 유지하며 최단 루트로 계속 쉴 새 없이 달렸다.
◇◇◇
아비게일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성녀라는 이름의 체질로 인해 가득한 신성력은 즉각 부상을 입은 육신을 치료했다. 마치 아직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에는 아비게일 본인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이미 십수 명의 황실 기사들과 성기사를 비롯한 수십의 사제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중에는 죽은 이들 또한 있었다. 이 격한 싸움에도 저 맛탱이가 간 본 드래곤과 싸울 수 있는 건 무식한 회복력과 스펙으로 버티는 아비게일과 애당초 강력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황실 기사단장과 추기경, 이렇게 셋뿐이었다.
추기경이 검을 역수로 쥐어 지팡이 삼아 버티며 숨을 헐뜩인다.
그 자리에 오른 만큼 실력이 뛰어난 이인 건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나이가 많은 그는 장기간 전투를 위해 체력회복에 사용할 신성력을 본 드래곤에게 때려 박느라 벌써 지치고 만 것이다.
"허억. 허억. 렉스 경, 저는 이제 오 분 정도밖에, 더 못 싸울 것, 같군요.…후우우."
"……그렇습니까. 아비게일 수녀님은 어떻습니까?"
"후우. 저는 아직 더 싸울 수 있겠어요. 신성력이 반 정도 남았거든요."
"대단하십니다."
렉스는 진심으로 놀라며 감탄했다.
그는 싸우는 도중에도 아비게일이 자신의 신성력을 소모해 성배로 만든 성수를 뿌려 중상자를 당장 거동은 가능할 정도로 회복시키며 빨빨 돌아다니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성력을 써놓고도 반이나 남았다? 수십이나 되는 중상자를 치료하고서? 렉스는 성유물인 성배의 대단함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아비게일의 막대한 신성력에 놀라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성녀 체질이라더니. 과연 추기경 후보답군.'
하지만 '그 정도'로 작금의 상황은 바뀌질 않는다.
"나는 짱짱 쎄다. 그래서 무적이다."
"……."
저 정신 나간 본 드래곤은 언데드로 제작되면서 뇌에 나사가 몇 개 빠진 건지 저런 무논리스러운 발언을 계속 내뱉으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할 뿐이다.
원래라면 교단의 신성력에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되었을 테지만 저 본 드래곤은 흑마법사들이 작정하고 만든 건지 신성력에 내성을 가졌다. 한때 연금술 공부를 했었던 적이 있다던 기사의 안목에 의하면 뼈대를 미스릴과 섞어 내구성을 미친 듯이 올렸고 조화의 효과가 있는 요정의 피와 신성력을 품은 사제의 피를 섞어 바른 도혈(?血)로 인해 신성력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능력까지 갖춘 것 같다고 조언했다.
덕분에 사제고 성기사고 저 본 드래곤의 앞에서는 고기방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못 됐다. 그나마 효과가 있는 건 자신의 칼질과 아비게일의 성배 둔기질(?)이랄까.
그마저도 막대한 내구력을 가진 질량과 크기로 인해 큰 효과는 없었지만.
여태까지 전투를 치뤘음에도 고작 갈비뼈 하나를 부러뜨렸을 뿐이다. 그때 돌연, 본 드래곤이 전신을 홱 돌리며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광범위 공격을 시도한다. 아니, 덩치가 워낙 크기에 일반적인 공격이 광범위적으로 될 뿐이다.
"모두 피해라!"
"추기경님! 프로텍트!"
기사단장의 외침에 모두가 꼬리의 범위에 벗어나도록 몸을 던지거나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여태까지 싸운 피로의 누적으로 반응이 둔해진 추기경은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런 추기경의 무방비한 모습을 수인으로서 빠르게 포착한 아비게일이 몸을 던져 그 앞을 가로막고는 신성술로 방어막을 친다.
본 드래곤의 꼬리가 아비게일을 강타한다.
콰앙! 창!
그러나 급조한 방어막은 본 드래곤의 꼬리를 막아내지 못하고 단숨에 깨져버렸다. 그렇게 꼬리가 눈앞에 온 아비게일은 두 눈을 부릅 떴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이 꼬리에 직격을 맞으면 무슨 꼴이 날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간다. 아마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뉘어져 비참하게 죽지 않을까.
그때 아비게일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친 얼굴은 소꿉친구의 것도, 부모님의 것도 아니었다.
'아, 짜증 나. 나도 이제 연애 좀 하면서 팔자 피나 했는데.'
여장이 지극히 어울리는 자신의 작은 연인을 떠올리며 아비게일이 주마등을 회상할까 싶던 순간,
콰아아아앙───────!!!
더 큰 굉음과 함께 부서진 광산의 벽에서 말 그대로 쏜살같이 날아온 레온이 그대로 몸을 날려 본 드래곤의 몸통과 충돌했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가 부딪힌 건지 그 충격에 꼬리뼈가 방향이 휘어져 아비게일의 머리 위를 스쳐 허공을 강타하고 본 드래곤은 그대로 넘어졌다.
찰나에 벌어진 현상에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몸을 일으킨 레온이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도 않고 외쳤다.
"어딜 뼈밖에 안 남은 강아지 간식 따위가 내 여자한테 꼬리를 휘둘러! 확 마! 사골국으로 만들어버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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