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보추콘 수녀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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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에 취직하는 게 어떻냐는 권유는 맞는데 강제나 다를 바가 없는 권유를 건네는 장인어른의 제안에 내가 등짝을 식은땀으로 적시고 있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을 보내준 건 역시 나랑 알콩달콩한 앨리스였다. 그녀가 연무장에 들어와서는 어깨에 올려진 장인어른의 손아귀를 탁 쳐내고는 날 끌어당겨 품 안에 꼬옥 안고는 뚱한 시선으로 노려본다.
"폐하. 레온은 저랑 연애하기도 바쁩니다. 이미 돈도 충분한데 굳이 황실 기사로 일하며 데이트 시간을 줄이는 건 더 이상 사양입니다."
"쯧! 보아하니 이미 떡을 친 모양이군."
생각보다 달달한 우리 사이에 장인어른이 인상을 찌푸리시고는 날 죽일 듯이 노려본다. 딸의 처녀막을 앗아간 녀석이니 저렇게 노려보는 게 당연하겠지. 궁정마법사와 기사단장이 대화에 끼어들며 장인어른을 말린다.
"하아아. 폐하. 제발 언사에 기품을 채우시옵소서. 그러다 잘못된 기록이 남을까 봐 두렵습니다."
"궁정마법사. 그대가 웬 일로 짐을 걱정하는 거요?"
"폐하의 옆에서 보좌도 못한 얼간이 마법사로 기록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
속물적인 궁정마법사의 진심에 장인어른께서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셨다. 설마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겠지.
"하아. 어째 그대는 제 스승에 비해 더욱 능글맞군."
궁정마법사가 새하얀 턱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싱긋 웃었다. 저렇게 보니까 진짜 현자 같아서 멋있긴 하다.
"스승님에 비하면 저는 새 발의 피입죠. 음마(서큐버스)의 수명은 인간보다 많으니까요."
"전대 궁정마법사가 음마였었나요?"
"그래. 평균 수명 팔백 년인 걸 고려하면 삼백 살 밖에 안 되신 젋은 분이시지만 인간에 비하면 훨씬 오래 사는 거니까. 내 나이가 벌써 80이 넘었는데 그분의 반도 안 돼. 그러면서 장난끼는 많으셔서 폐하께서도 곤란해 하셨지."
"솔직히 곤란한 일은 많았지. 마법은 뛰어났지만 종족이 종족이니 말이야."
장인어른께서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신다. 지난 세월의 고생이 가득 담긴 연륜의 눈빛이었다.
음마(서큐버스)
보통 서큐버스하면 대중문화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건 꿈을 다룬다는 것과 남자의 정기를 갈취해 살아간다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서큐버스는, 아니 음마(??)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서큐버스랑 뱀파이어랑 설정이 섞였지.'
음마는 섹스로 정기를 갈취할 수 있지만 흡혈로도 정기를 갈취하여 살아갈 수가 있다. 흡혈은 아무나 상대로 하는 거고 흡정은 배우자와만 하는 것으로 태생이 음란하지만 그건 오로지 부부의 연을 맺은 이에게만 그렇다는 거다. 배우자가 있으면 결코 흡정을 하지 않는 순정연애 종족. 그게 이 세계의 음마다.
그런 주제에 종족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서 그런지 종족의 피가 진할수록 여러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초재생, 피의 제어, 그림자 제어, 환영술, 꿈 제어까지 아주 고루고루 다재다능하다. 흡정 때문에 번식이 쉽게 안 돼서 그렇지 만약 숫자가 요정과 동등하기라도 했다면 대륙에서 제일 가는 국가를 설립하지 않았을까 싶다.
"죽은 남편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고 흡혈만 해서 황실 기사단이 한때 혈액부족으로 몸져 누워 기사단 업무가 마비됐던 때가 떠오르는군. 그때 내게 몰려온 업무 때문에 이틀을 야근하느라 죽는 줄 알았지."
"…그때는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동병상련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인어른과 기사단장이었다.
그나저나 음마가 얼마나 마법 실력이 뛰어나기에 대체 제국에서 궁정마법사를 했던 걸까. 서큐버스 하면 남자의 로망 중 분명 지분이 존재했기에 호기심이 돋았지만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만 해도 정령왕 이프리트에 내 여기사 앨리스, 요정왕국 하이엘프 티타니아, 그리고 상급 수녀 아비 누나까지. 이미 셋이나 되는 정인이 생겼는데 여기서 욕심을 더 갖는다면 그건 개새끼겠지.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에 난 개새끼가 될 거 같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괴전파야.
"사위. 괜찮은가?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그런데 폐하. 혹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없을까요?"
장인어른의 눈빛이 바뀌었다. 초대면에서 신하들을 압박하는 듯한 그 위압감, 아마 황제로서의 품격이 자연스럽게 주변인물을 움츠러들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 딸아이의 아버지에서 황제로 돌아온 그는 날 유심 있게 응시하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내 딸이라는 걸 대놓고 밝혔을 때부터 짐작했을 지도 모르지만 내 정원과 이 연무장은 황성 내에서 가장 듣는 귀가 적은 곳이다. 그러니 레온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걱정 말고 여기서 말하도록 하라."
"홀홀. 그래서 마냥 서서 얘기를 나누기에는 좀 그렇군요."
궁정마법사가 지팡이를 딱 두드리자 아공간에서 의자 여러 개와 작은 티테이블이 하나 나온다.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내는 궁정마법사를 보며 나와 앨리스는 하인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타는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홀홀. 그렇게 신기해할 필요는 없네. 그저…… 내 스승님이 커피를 좋아하는데 입맛이 까다로운 바람에 그걸 내가 타느라 이렇게 됐을 뿐이지."
"……."
"……."
여기서 더 물으면 안 되겠다고 우리들은 직감했다. 분명 궁정마법사의 수제자일 터인 그가 스승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커피를 타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폐하와 기사단장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궁정마법사가 손수 탄 커피를 훌쩍이며 맛을 음미한다.
덕분에 나와 앨리스도 동참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졌다.
아니,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는 건데? 커피 특유의 맛과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져 굉장히 맛있었다. 그냥 궁정마법사 때려치우고 황도에서 카페를 차려도 대박이 날 듯한 이 솜씨를 만든 전대 궁정마법사는 대체….
딱.
커피잔을 접시에 내려놓은 폐하께서는 날 응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슬슬 꺼내 보게. 하고 싶다던 비밀스러운 얘기가 뭐지?"
"폐하. 사실 저희가 황도에 온 건 공적에 대한 포상을 받기 위함도 있지만 동시에 제 요정 연인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요정 연인? 혹시 이그드라실과의 국경지에서 행방불명자 때문에 시비가 갈리고 있는 문제 때문인 건가?"
"그것과 연관이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폐하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더 말해보게."
"제국은 노예법이 존재하죠. 황도에서 암지에서 노예시장이 있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렇지. 애시당초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노예제도를 인정한 거니까."
"그 점을 노리고 이용하는 비등록 흑마법사들이 있습니다."
나는 폐하에게 머리속의 정보를 하나하나 꺼내 나열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프리트와 계약하기 위해 정령계에 갔다간 키메라가 정령계로 역소환되어 싸웠던 일. 그 일로 정령에게 부탁을 받아 흑마법사를 추적했더니 황도와 요정왕국 국경지, 두 장소에서 흔적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흑마법사 녀석들이 마이트 남작가의 상단을 장악한 걸로도 모자라 필리아 남작이 황실에서 받는 지원금을 빼돌려 키메라 실험에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까지.
그 모든 걸 들은 폐하는 짜증으로 물든 표정을 지었고 기사단장은 격노를, 궁정마법사는 흑마법사가 저질렀다는 말에 살의까지 살살 풍겼다.
다시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원샷하신 폐하께서는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으셨다.
"후우우. 시발. 마이트 상단이 요즘 이상해서 추적은 하고 있었네만, 설마 충신으로 칭송받는 필리아 남작까지 그랬을 줄은 몰랐군. 이보게 사위, 혹시 필리아 남작도 세뇌나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나?"
"그 남작은 더 문제입니다.……사실 어떻게 보자면 이게 폐하께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놀랄 게 더 남았나? 이미 황도의 그늘에서 바퀴벌레가 들끓고 있다는 걸 들은 뒤니 망설이지 않고 말해도 되네. 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그러시다면야.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하나도 줄이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흑마법사들 금력 지원의 대가로 초대 황제이시자 건국제인 엘레오노라 나이트킹덤 님의 시체를 키메라 연금술과 사령술을 합쳐 특수제작 구울로 만들었고 필리아 남작이 그 구울을 섹스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푸우우우우우우──────!! 쿨럭, 쿨, 쿨럭!"
"앗! 레, 레온!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불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듣던 궁정마법사가 내 얼굴에 입에 있던 커피를 쏟으셨다. 기사단장은 입을 쩍 벌리더니 그 안에 있는 커피가 폭포수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도 연인인 앨리스가 호들갑을 떨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역시 여자친구밖에 없다니까.
폐하의 반응이 궁금해서 얼굴을 보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하나도 안 바뀌어 이었거든.
자신의 청력을 의심하시는 건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 귀지를 빼 탁탁 연무장 바닥에 터시고는 내게 다시 물으셨다.
"그래. 다시 말해보게. 내가 잘못 들었던 것 같으니."
"흑마법사들 금력 지원의 대가로 초대 황제이시자 건국제인 엘레오노라 나이트킹덤 님의 시체를 키메라 연금술과 사령술을 합쳐 특수제작 구울로 만들었고 필리아 남작이 그 구울을 섹스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폐하는 말이 없었다. 잠시 사고를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에 폐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여셨다.
"이보게 기사단장. 궁정마법사.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렇사옵니다."
"홀홀. 제가 늙었다지만 귀가 나가진 않았습니다."
신뢰하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폐하께서 이번에는 내게 물으셨다.
"사위. 방금 그 발언에 책임을 질 자신이 있나? 만약 거짓이라면 나는 아무리 사위가 우리 엘리자베스의 남자친구라 해도 시조를 모욕한 그대를 가만둘 수 없는 노릇이니."
"제가 직접 봤습니다. 건국제의 시체로 만들어진 구울을 상대로 허리를 놀리던 필리아 그 자식을 말이죠. 원하신다면 마나의 맹세까지 해드리겠습니다, 폐하."
마나의 맹세.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에 하는 맹세, 혹은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기아스처럼 어기는 순간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는 이 세계판 맹세다.
어기는 순간 보유한 마력을 전부 잃고 족히 몇십 년은 체내에 마력이 쌓이질 않게 된다. 그를 언급하자 황제는 눈을 감고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꾸욱 누르며 지압했다.
"후우. 이 사실을 아는 게 누구누구지?"
"일단 오늘 같이 폐하를 알현하기로 했던 아비게일 상급 수녀와 저, 앨리스, 그리고 아르잔…느라는 새로운 호위 기사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은 무거우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군. 기사단장."
"네, 폐하."
의자에서 일어나 바로 무릎을 꿇고 기사도를 보이는 기사단장에게 폐하는 황제로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은밀하게 기사단을 소집하라. 그리고 궁정마법사."
"예, 폐하."
"그대는 휘하 마법사들을 데리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작동시킬 준비를 해라. 규모는 대규모로 하여 마이트 남작 소유의 광산에 최대한 가까운 장소로."
"어명에 따르겠나이다."
바로 스르륵 사라지는 궁정마법사와 연무장을 나가는 기사단장.
와. 저거 공간 계열 마법 같은데 궁정마법사 정도 되는 실력이면 쓸 줄 아는 건가. 지린다.
"그리고 사위."
"네, 폐하. 뭐든지 하명해주십시오."
"미래의 장인에게 점수를 딸 기회를 주도록 하지. 지금 당장자네가 필리아 남작을 포획할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네. 필리아 남작을 생포하여 황성으로 끌고 와라. 그 후에는 곧장 기사단장과 합류하여 마이트 광산에 가 흑마법사들을 조질 기회를 주겠느라. 할 수 있겠느냐?"
황제인 장인어른에게 합법적으로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 이건 못 참지.
"제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네크로 그 자를 꼭 생포해 오겠습니다!"
감히 내 눈에 시체박이로 안구 테러를 감행해? 죽었다고 복창해라, 이 시체박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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