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보추콘 수녀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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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날 포함한 우리를 데리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철과 수두룩한 마법이 느껴지는 게 방비를 단단히 한 연무장 같았다. 아니, 그런데 왜 정원 근처에 이런 연무장이 있는 건데. 그런 내 표정을 본 황제가 대뜸 설명했다.
"이 연무장은 내 취미로 만들어 놓은 거다. 짜증 나는 녀석에게 잘 대해주는 척 정원으로 유도하고 곧장 호전적인 성격인 척을 하며 실력 좀 보자며 이곳으로 데려오면 합법적으로 팰 수 있거든."
"……."
"네놈의 표정이 하도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다."
스릉.
대놓고 합법적으로 패겠다고 선언하며 가검을 뽑는 장인어른을 보며 난 어떤 대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꿀꺽. 침이 넘어간다.
황제라는 신분도 그렇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친부를 팰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제의 기세는 무릇 황실 기사단장보다 한끗발 떨어지는 수준이기에 지루한 대련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랬다간 장인어른이 날 마음에 들어하지 않겠지.
"렉스 경. 저 딸도둑 놈에게 가검을 줘라."
"후우우.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저기……."
나는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다.
"이 대련, 안 하면 안 될까요?"
"안 해도 된다. 강제는 아니니까."
"그럼!"
"대신 내 딸도 포기해야겠지."
쉬벌. 낙장불입이었나.
앨리스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으니 이 대련에서 도망칠 방도가 사라졌다. 장인어른이 권력이 없고 자식을 챙겨주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이라면 그냥 막무가내로 앨리스랑 계속 사귀면 되겠지만 황제의 신분인 데다가 앨리스를 진심으로 아끼는 건 저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대련용 가검을 든 나는 방어적인 면모가 강한 자세를 취하면서 황제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폐하. 대련에 앞서 두 가지만 물으면 안 될까요?"
"뭐냐. 빨리 합법적으로 패고 싶으니까 직구로 물어봐라."
"앨리스가…엘리자베스가 딸이란 걸 제게 이렇게 밝혀도 되는 건가요? 제가 몰랐던 사실이면 어쩌시려고……."
"사귀는 사이인데 그럼 알아야지."
장인어른의 가검에 오러가 씌워진다. 황제라는 신분에 걸맞게 좋은 걸 많이 드신 건지 마력의 양만 따지자면 나랑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순도 또한 높아 오러가 상당히 짍고 단단했다.
마력을 제어하는 활용능력은 나보다 떨어지지만 저 상태 그대로 비교하자면 오러의 위력이 나랑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미친. 앨리스의 모친께서 여기사라 하시더니 장인어른까지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난 분이신 모양이다.
"만약 신분을 듣고 겁을 먹는 모습을 보였다면 내가 이 대련에서 베어버렸을 거다."
"……."
저게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섬뜩하다.
"두 번째 질문을 하라. 나는 어서 그대롤 쥐어패고 싶으니까."
"제가, 아비게일 상급 수녀랑 묘한 관계라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훗. 황실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라. 적어도 황도에서라면 어지간한 정보 길드 이상으로 뛰어난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황도에 있는 갈색 피부의 금발을 가진 사람은 네놈 하나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금발태닝의 소녀가 매일 같이 자네가 머무는 여관과 교단을 들락날락거리며 상급 수녀의 고해성사를 받고 있다더군. 남녀가 고해성사실 같은 좁은 장소에 매일 만난다? 이건 빼박이지."
젠장. 그래서 아비 누나가 황제 알현에 동행하는 걸 거절한 건가. 앨리스 말고 다른 여자가 있는데 그 연인을 패기에는 좀 멋없어 보이니까. 황제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 얼척이 없는 상황에 뚱한 표정을 지은 내게 다가와 가검을 건네주며 황실 기사단장이 속삭인다.
"미안하지만 페하에게 좀 맞춰줬으면 좋겠네. 저래 보여도 엘리자베스를 상당히 아끼셨거든.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낳은 자식이라서 말이야."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미인을 얻으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한다더니."
앨리스만한 미녀라면 황제와 싸움을 불사하더라도 얻을 가치가 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내 여인을 버리고 황제와의 대련에서 도망치는 건 상남자로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행위니 이건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나 또한 가검을 쥐고 선명한 오러를 띄우자 황제와 기사단장의 눈빛에 이채가 깃든다.
요즘 개나 소나 오러를 사용해서 그렇지 그 완성도가 얼마인지에 따라 수준이 달라지는 건지 아는 진짜 실력자들이라는 거다.
"호오. 오크 샤먼킹 토벌전에 사용했다던 그 방대한 오러가 맞는 듯하군. 그런데 자네, 정령사로서의 자질과 화염 속성 오러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사용하지 않는 건가?"
"제 정령은 경험이 미천해서 힘조절을 잘 못합니다. 보고서에서 읽으셔서 알겠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황성에 그때의 소태양이 만들어져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령은 빼고 하지."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하는 장인어른. 아무리 호승심과 괘씸함이 동시에 들더라도 황성에 소태양을 떨구는 미친 짓은 벌이기 싫으시겠지. 그게 고의든, 실수든 말이다.
나는 황제의 명령대로 오러에 화염 속성을 추가한다. 성화무형검이 내 절기이긴 하지만 가검인 데다가 굳이 신성력을 썼다 들키면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순수한 화 속성의 오러를 발현한 채 황제에게 대응하기로 했다.
"오오. 듣던 대로 대단한 오러군. 그럼 약자로서 선공을 가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내가 자기를 팰 수 없다는 걸 아는 건지 황제는 영약하게도 장인어른이라는 입장을 내세워 선공을 가한다. 뒷골목 잡배들하고도 싸워봤다더니 이 양반, 위엄을 풍기는 것과 달리 상당히 약아빠졌어!
황제는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강한 탄력으로 미끄러지듯이 도약해 내게 돌진했다. 그대로 앨리스처럼 양손대검을 사용하는 황제는 검술보다는 일격필살에 가까운 검술을 내게 펼친다.
앨리스가 기교파라면 황제는 스펙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 그렇다 해서 저 내려치는 일격이 마냥 힘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터득한 검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는 건 보면 알 수 있었다. 막으려는 순간 내 오러가 파이려고 하며 검을 부러뜨릴 기세인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명백하네. 황제의 오러는 S등급에 도달했어.'
자신의 뜻을 담을 수 있는 S등급의 오러.
나의 경우는 무형검을 형성해 화기, 그리고 신성력을 합쳐 조화를 이룬 성화무형검을 만드는 거다. 무형검 자체가 나의 깨달음…이라기 보다는 어떤 플레이어든지 깨달음은 무형검으로 나온다고 하더라. 어쨌든, 그렇게 황제의 깨달음이 담긴 내려치기는 마냥 받아내기 힘들었다. 오러가 파이는 걸 보면 그냥 통상의 가드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마력을 직접 정밀하게 제어하기 시작했다.
보통 오러 스킬이 '자동'이라면 내가 지금 하려는 건 '수동'으로 직접 세세하게 제어하는 것. 대련 중에 이런 짓을 벌이는 건 명백히 미친 짓이지만 EX등급의 오러 스킬을 가진 나는 이런 정밀한 제어로 오러를 다루어 실시간으로 변형시켜 황제의 일격필살을 오러가 반쯤 부서졌을 때가 되어서야 막을 수 있었다.
"허?"
"…………대단하군."
"껄껄.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황제가 정말로 놀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기사단장이 간신히 침착을 유지하는 목소리로 묵묵히 감상했으며, 궁정마법사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대련을 지켜본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건 이 장면을 직접 행한 나, 그리고 나랑 대련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한 앨리스 정도랄까.
치이이이.
불꽃 속성 오러가 이글거리며 되려 뭐든지 부술 것만 같던 황제의 오러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 현상에 눈을 찌푸린 황제가 검을 회수하고는 막돼먹은 근력을 이용해 다시금 검을 휘두른다. 신체가 작다는 단점을 노려 하나같이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황제의 공격을 나는 전부 받아 친다. 황제의 깨달음은 내 불꽃 속성의 오러가 내뿜는 열기와 서로를 깎아먹어 공방을 소모전으로 이끈다. 황제가 생각하던 대련은 이게 아니었던 건지 눈쌀을 찌푸린 채 계속 검을 휘두르지만 나는 꿋꿋하게 모든 참격을 막았다.
이대로 갔다간 허무하게 끝날 거라 판단한 건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린 황제가 미간을 좁히며 날 노려본다. 50대 후반의 나이이건만, 오러를 S등급까지 깨달은 것과 체내의 풍부한 마력으로 인해 황제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일 정도로 젊었기에 미간을 좁혀도 전혀 추례한 모습이 아니었지만 남자의 째려보는 시선이 좋은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오게. 조금 정도는 다쳐도 상관없으니 네놈의 진심을 보여라. 그러지 않으면 앨리스… 엘리자베스와의 연애를 허락하지 않을 테니."
"폐하께서 다쳤다고 앨리스가 저한테 화내면요?"
"그건 네 사정이지."
"……."
이런 뭣 같은?
내 심정이 표정에 너무 드러났는지 황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의 소중한 딸에게 용병들이나 입는 천박한 비키니 아머를 입히고도 이런 상황에 처한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상관없다."
"……하겠습니다."
솔직히 노출증이 있는 앨리스였기에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산에서 조난 당했을 때는 내가 강요해서 입힌 거지만 엔티알 백작령부터 벗어도 되는 걸 앨리스가 자처해서 계속 입었던 거니까. 그러나 아무리 장인어른이라도 소중한 연인의 비밀스러운 성벽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내가 다 감당해야 했다.
"그럼 가도록 하겠네."
상단 자세를 잡은 황제의 검에서 오러가 부풀기 시작한다. 깨달음이 담겨 있는 오러는 그 뜻을 전혀 잃지 않은 채 확장되어 이내 양손검이 무색하게 거검(巨?)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커졌다. 나 또한 불꽃 속성의 오러를 강하게 일으킨다. 잠시간의 대치 이후, 황제는 내게 돌진했다. 마치 궁신탄영이라도 쓴 것처럼 바람을 가르고 눈 깜빡할 새에 코앞까지 쇄도한 황제는 오러의 거검을 내리친다.
[가속사고]를 일으켜 느려진 듯한 이 상황에서 [다중사고]로 대처할 방안을 여러 가지 모색한다. 신체강화는 이미 쓰고 있고, [염동력]으로 근력을 더욱 보조한다. [화안금정]과 [심안], 그리고 [분석]으로 오러의 거검에 파고들 틈을 분석하고 [사량발천근]으로 순간적인 폭발력을 최대한 이끌어 낸 다음, 황제의 공격에 대응해 검을 올려 그으면서 [이화접목]의 묘리로 적의 힘까지 이용해 맞받아친다. 그렇게 복합적인 대응방식으로 나는 검에 깨달음도 담지 않고서 황제가 내려친 오러의 거검을 싹둑 잘라버렸다.
서걱.
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반토막이 난 자신의 가검을 가슴 언저리까지 들고서는 믿기 힘들다는 눈길로 보더니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딸도둑 놈 좀 혼내주려고 잡은 자리이건만, 내가 쪽팔리는 자리가 되어버렸군."
"그 말씀은?"
"내 완벽한 패배구나. 엘리자베스랑 사귀는 걸 허락하마.……쯧."
시원스레 연인 관계를 허가하신 황제, 아니 장인어른이었다. 끝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차긴 했지만 어쨌든 허락은 허락이다. 그러나 나는 안도하기도 전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왜냐하면 황제가 키가 작은 날 내려다 보며 두 눈을 욕망에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이렇게 작은 체구면서 그만한 실력과 기량을 쌓았다니. 거기다 정령은 사용하지도 않은 게 이거라는 거군. 믿기 힘들구만. 믿기 힘들어.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걸 안 믿으면 감은 눈을 한 어리석은 황제가 되겠지. 굉장히 강한 게 우리 엘리자베스가 눈은 높았군. 그런데 말이네, 사위."
"……네."
호칭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나는 도저히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감]이 자꾸만 경종을 울렸거든.
장인어른께서는 눈을 빛내며 내게 제안을 건네셨다.
"내 딸을 채가는 청년답게 한 실력 하던데. 황실 기사로 취직하는 건 어떤가? 성씨를 버리지 않았을 뿐이지 마침 공작가에서 나온 백수라고 알고 있는데."
"……."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백수로 즐기는 나만의 주지육림 라이프가 위험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