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보추콘 수녀님 (15)
* * *
제국의 황제를 알현할 때가 왔다. 요즘은 아예 잠옷 대신으로도 쓰는 발키리 아머를 벗은 앨리스, 그리고 나는 깔끔하고 멋드러진 예복을 입고 입성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만날 필요가 있다나. 그리고 의외로 아비 누나는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에 동행하는 걸 거절당했다. 이유는 모르겠단다.
황성, 그것도 중심부로 들어가는 검사는 꼼꼼하고 귀찮을 정도로 다양한 수단으로 이어졌다. 공간확장 주머니의 소유부터 내 품에서 날붙이가 될 만한 물건이 있는 건지, 혹은 초인에게 무기가 될 법한 것들이 있는 건지 검사하는 거다. 공적에 대한 포상을 내리는 것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검사를 진행하는 황성. 하기야 우리를 '일단'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야인이 제국의 태양이라는 황제를 만나 무슨 짓을 벌일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이상한 건 아니다.
그저 우리가 표정에서 드러날 정도로 귀찮을 뿐.
그래도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황제의 양옆에는 각각 황실 기사단장과 궁정마법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앨리스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려나.
내 실력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이 홀을 가득 채운 황실기사단의 수와 질은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우리 공작가의 기사단도 크게 꿇리는 건 아니지만 황실기사단과 비교하기에는 모자랐으니 말이다. 우리 일행은 한쪽 무릎을 꿇고 심장이 있을 흉부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대표로서 황제에게 예의를 표했다.
"빛이 사그라들지 않을 제국의 태양을 알현합니다."
인사를 마쳤으나 고개를 들지 않는다. 평민 신분은 황제가 허가를 해야 고개를 들 수 있으니까.
"오크 샤먼킹 토벌의 공로자들은 고개를 들라."
늦지 않게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고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위엄히 넘치면서도 책임감이 강해 보였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한 그는 앨리스에게 잠깐 꽂혀 묘한 이채가 감돌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뜨고는 이번에 나를 응시하였다.
분명 날 처음 보는 분일 터인 데도 시선에는 살의가 아니지만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니, 왜 저렇게 날 딸도둑 보듯이 노려보는, ……나, 딸도둑 맞지 참.
한숨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황제의 앞에서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간 모욕죄로 잡혀갈 수도 있었기에 꾹 참았지만.
"폐하. 이들이 세운 공을 나열하자면"
"아아. 됐네."
문관, 현대에 비유하자면 고위 공무원 쯤 되는 이로 추정되는 신하의 발언을 손을 들어 휘적거리는 걸로 끊어버린 황제는 대뜸 자신의 이름을 꺼냈다.
"짐의 이름은 카젠 나이트킹덤. 이 제국의 황제다. 이 자리의 주인으로서 일단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해야겠지. 정말로 고맙다."
"폐, 폐하?! 일개 야인에게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여전히 옥좌에 앉아 있었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하는 그의 언행에 신하들이 당황한다. 한 귀족이 황제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이쪽을 노려본다. 아니, 황제가 저러는 걸 우리더러 어쩌라고.
고개를 금방 든 황제는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귀찮다는 듯이 째려보자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무는 그들.
"짐이 고마움에 감사를 표하겠다는 데 왜 그대들이 지랄인가."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기 머꼬.'
내가 들은 게 황제의 발언이 맞는 걸까. 한 나라, 그것도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의 어조라고는 믿기 힘든 구수한 욕지거리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몇몇 신하와 기사단장, 그리고 궁정마법사까지 쓴웃음을 지으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는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의미다.
"엔티알 영지에 지원군을 보내자는데 정치질을 하느라 자처하는 이는 없고, 지원금을 보내자니까 다들 쉬쉬하면서 비상금을 숨기기 바쁜 티를 내며 온갖 추잡스러운 변명을 내는 걸 봐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대들 중에 엔티알 백작에게 보급이나 지원금을 지원한 이가 있는가?"
몇몇 귀족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손을 내려라. 그대들의 엔티알 백작에게 성의금조차 안 될 지원금을 보태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황제가 우리를 가리키며 크게 당황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여기 목숨을 도외시하고 오크 샤먼킹을 사냥한 이들의 공로에 제국의 주인인 내가 감사하겠다는 데 가만히 쭈그리고 있다가 이제 와서 입을 터는 이가 있다면 그 조둥아리를 짐이 친히 비틀겠다. 짐이 한때 취미로 고문기술을 배웠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
"……."
"……."
"……."
귀족들이 입에 지퍼를 달고 침묵한다. 나도 당황해서 입에 지퍼를 다물고 침묵한다. 앨리스는 그런 황제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고?
◇◇◇
장소를 바꾸었다. 떠들던 귀족들을 명분과 카리스마로 일침시켜 강하게 경고한 황제는 기사단장과 궁정마법사만 대동한 채 좀 더 작고 아담한 장소, 귀부인들이 수다를 가질 법한 황성 내부 정원에서 대화를 갖게 되었다. 나는 대충 황제가 오크 샤먼킹 토벌전에서 활약하여 공을 세운 우리들에게 포상을 준다는 명목으로 반대를 위해 모인 귀족들을 단숨에 걸러 낸 거라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면 유능해 보이는 황제가 굳이 우리를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일까. 솔직히 우리가 없었어도 진작에 조지려면 조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일단 사과를 해야겠군. 명백히 공을 세운 그대들을 이용해 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 점에 사과하지."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 됐네."
황제가 내 말을 끊으며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상한 말투는 적어도 이런 소소한 장소에서는 안 써도 된다. 그런 말로 굳이 머리 피곤해질 것 없이 그냥 좀 높은 어른이라 생각하고 대하게. 그런 말투를 쓰는 귀족놈들을 보다 보면 의도를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피가 마를 것 같으니까."
"아, 네."
나는 직감했다. 이 양반 앨리스 말대로 소싯적에 제법 놀아본 것 같다고.
카젠 나이트킹덤. 이른 나이에 황제가 되어 제국을 다스렸고 태평성대까지는 아니어도 백성들이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좋은 정책을 내놓으며 현군(??)으로 평가받는 사내.
하지만 실상은 앨리스 말대로 툭하면 황성을 빠져 나와 황도를 돌아다니며 이 사건, 저 사건 휘말려 본 연륜이 가득한 장난꾸러기 같은 기질의 부류였다. 나랑 잘 맞을지도.
"그럼 폐하.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훨씬 낫군. 물어 봐라."
"폐하께서 확신하시고 귀족들을 힐난하신 걸 보면 증거까지 이미 확보하신 듯한데 왜 그들을 휘어잡지 않고 저와 호위를 이용해 그들을 타박한 건지 궁금합니다. 따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황제는 어떤 이유를 갖다댈까. 아니면 딸인 앨리스와 그 남자친구인 날 챙겨주기 위해 가볍게 이용하고 포상을 더욱 늘려주려는 수단일 지도.
그러나 내 예상은 대차게 빗나갔다.
"그거야 내가 편하니까."
"예?"
"못 들었나? 그거야 내가 편하니까, 다.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다."
나는 어벙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앨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병신을 보듯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내가 가진 증거와 권력만으로 그놈들을 짓밟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면 권력에 의해 자신들이 쭈그려야 하는 거다.우리들도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황제의 권력남용에 대응할 수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놈들은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놈들뿐이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다 쳐내고 싶은데…… 이놈의 제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커서 불가능해."
황제는 한탄스럽다는 듯이, 정말로 귀찮기 짝이 없다는 듯이 술 먹은 주점 아저씨처럼 나불나불 떠들었다.
"현재의 제국은 땅이 너무 커. 유능한 놈들이 있다고 해도 이 넓은 땅을 시야도 안 닿는 곳까지 혼자서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야. 그렇게 심성이 썩어 빠지지 않은 녀석은 많지만 깨끗한 놈들도 없어서 나는 그놈들까지 버리지 않고 포용해 사용하려고 너희들을 이용한 거다."
……뭐지. 갑자기 황제가 굉장히 존경스러워 보이려고 해.
나는 가문의 신하마저 다스리며 호위호식을 할 자신이 없어서 소가주는 진작에 포기하고 가문을 나왔다. 모계가 야만족의 핏줄이라는 이유 덕분에 신뢰를 얻기 힘들기도 했고.
그런데 떡하니 그런 비리를 저지르는 귀족들까지 아예 썩어 빠진 게 아닌 이상 품에 안고 가겠다는 황제의 포부를 직접 보니 장인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새로새록 자라나는 기분이다.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걸 못할 것 같아서 가주 같은 건 진작에 때려치우고는 집을 나온 몸이라 그런 지 폐하가 더욱 존경스러워지려고 합니다."
"아부는 됐다. 이 빌어처먹을 딸도둑 놈아."
"네?"
드르륵.
의자를 끌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깨와 목을 이리저리 꺾어서 풀어주며 뚜득 소리를 내는 황제. 그 모습은 흡사…… 양아치 같았다.
"남의 소중한 딸을 함부로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 지 모든 딸아이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친히 교육시켜주마."
"자, 잠깐만요, 폐하! 저는 앨리스랑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자네는 좋아하는 여자가 많은가 보군."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옆동네 요정왕국 여왕의 여동생에 아가사 교단의 상급 수녀랑도 심상치 않은 관계라지?"
……아니, 여기서 가불기를 쓰시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