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보추콘 수녀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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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간은 남았으니 이제는 다른 쪽을 조사할 차례다. 팍스 라헬은 처음 시도해보는 거였지만 다행히도 세 차례에 걸친 기억삭제술(물리)에 사고가 정말로 일주일 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마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성전환을 하겠다고 상단의 자금을 빼돌리는 것까지 잊어버렸으니 상단주에게 되려 잘 된 게 아닐까 싶다.
다만, 그 모든 걸 목격한 하사나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양심은 있으신가요?"
"내 양심은 옆집 흰둥이한테 줘서 괜찮아. 난 떳떳해."
"우와……."
하사나가 질렸다는 표정을 짓더니 냉큼 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나랑 같은 공기도 쓰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에는 좀 심하긴 했지.
미소녀 암살자에게 혐오의 시선을 받는 것도 다 자업자득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여자들은 오늘 내가 흑마법사의 물주로 의심되는 이들을 조사한다는 것만 알고 있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는 모를 거라는 게 다행이다.
아무리 나랑 알콩달콩한 관계인 연인들도 내가 한 행위를 보면 악마냐며 진지하게 의심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데미지를 입었을 지도.
"그나저나 하사나. 왜 필리아 남작가는 귀족이면서 묘지기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보통 귀족이라면 무덤 관리는 천박한 일이라며 신경도 안 쓸 텐데 말이야."
"건국제의 무덤이 그곳에 있대요."
"……아하."
아주 납득하기 쉬운 이유였다. 날 쳐다본 하사나는 그것도 모르냐는 시선을 보내더니 이어서 더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트킹덤의 건국제는 여황제예요. 초대 필리아 남작은 여황제를 짝사랑했지만 낮은 신분 때문에 결실을 이루지 못 해서 죽은 여황제를 평생 모시고 살겠다며 스스로 묘지기를 자처하게 됐고 그 공로를 황실에서 인정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죠."
"어우 씨. 짝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건국제께서 저승에서 한숨 내쉬겠다."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면 모를까 건국제 입장에서는 사귄 적도 일절 없는 부하가 자기를 짝사랑했다며 무덤을 관리하는 꼴 아닌가. 아니, 시바 이름부터가 필리아 가문인 게 벌써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군더나 이번 대의 필리아 남작은 이름이 네크로라지 않는가. 존나 불안하다.
나는 필리아 남작이 산다는 묘지기 전용 저택에 은밀하게 들어갔다. 호신강기처럼 기막을 딱 내 체구에만 맞게 발휘하여 내 움직임이 내는 소리를 제거한다.
말도 안 되는 기예였지만 [오러(EX)]인 내게는 가능했다.
화안금정으로 창문의 잠금쇠 구조를 간파하고 따서 조용히 불법주거침입을 완성한다. 기척까지 최대한 줄이고서 고양이 발걸음으로 빠르게 저택을 뒤진 나는 별 이상한 걸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저택의 1층을 전부 뒤졌지만 이상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하사나도 이상함을 느꼈는 지 그림자에서 나와 주위를 매의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살피고는 감상을 내뱉었다.
"이상해요."
"뭐가?"
"필리아 백작가는 건국제의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를 자처했다는 이유로 매년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과 맞먹는 봉급을 포상금으로 받아요. 그런데 이곳에는 귀한 물건이 하나도 없잖아요?"
"2층에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하사나가 내 반문에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고서 서늘한 미소를 짓는다.
"그랬다면 '우리'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출처가 불분명하다니까요."
"흐음. 가장 베스트인 건 팍스처럼 그냥 저택 안에 저금했을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흑마법사에게 지원금을 보내고 있었을 경우인 건가."
"그렇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2층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밀하지만 마력으로 뭔가를 감춘 것 같으니까요."
"……."
당신의 그림자에서 특급 암살자가 이 정도면 도대체 수장인 그림자 여왕은 얼마나 유능한 걸까. 나도 미세하게 느끼고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하던 걸 똑같이 느끼고 감상을 할 줄이야.
그림자 여왕 즈음 되면 뭐 엄청 오감이 뛰어난 사람이려나.
"그림자 여왕은 유능한 모양이야. 너 같은 뛰어난 암살자를 수하로 두고 있다니."
"……크흠. 큼. 뭐, 그렇죠!"
상사가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건지 내색하지는 않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 가더니 입가를 히죽거린다.
그러다 내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하고는 냉큼 그림자 속으로 이동한다. 이 녀석도 평범하게 감정은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당신의 그림자는 이런 애를 어떻게 키워 낸 거지?
나중에 육성법을 알려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까. 역시 안 되겠지.
고개를 좌우로 털어 잡념을 떨쳐 내고는 하사나의 조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가까워질 수록 은밀하던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과 소리를 차단하는 사일런스인 건가.
매커니즘은 다르지만 기막과 원리는 비슷한 점이 있었기에 나는 오러를 세밀하게 쏘아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방의 문에 소리 없이 구멍을 냈다. 창호지를 바른 문처럼 뽁 뚫린 구멍을 통해 안 쪽을 엿보았다.
"………이런."
그리고 나는 한탄했다.
댄디해 보이는 사내. 금발에 머리카락 끝자락이 꼬물거리는 게 미역 같은 인상이 있는 게 하사나가 알려준 특징이랑 똑같았다. 다만 내가 한탄한 이유는 그가 침대 위에서 나체의 여성을 상대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헉헉헉! 오오. 엘레오노라! 엘레오노라! 기분 좋지 않습니까? 헉헉!"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필리아 남작이 열심히 허리를 흔드는 걸 보면 저 엘레오노라라는 여자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무표정이었다.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의 파장이 흐르지 않았으며 무척이나 냉철했다.
사내가 아무리 좆이 작아도 저렇게 거칠게 흔들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저 여자는 섹스돌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필리아 남작의 피스톤질에 맞춰서 허리를 흔들고 있는 걸 보지 않았다면 정말로 섹스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상한 느낌에 화안금정을 on하고 다시 보고는,
'워메 시방. 내가 지금 뭘 본 겨?'
여자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네크로맨서의 사령술로 육체와 전혀 상관없는 영혼을 불러와 안착시키고 키메라 연금술로 몬스터의 피부를 뼈 위에 덧씌워 잘 썩지 않는 튼튼한 구울이었던 거다.
네크로 필리아 남자.
그는 시체성애라는 이상성욕을 가진 초특급 변태였다.
"와. 시발. 존나 충격적이네요."
하사나마저 그림자에서 얼굴을 꺼내고는 잘 사용하지 않는 욕을 꺼내며 감탄했다. 설마 귀족이란 새끼가 흑마법사에게 지원해 구울 뷰지에 박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나도 저런 광경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좀 나가지 않을 래요? 저걸 보니까 오작육부가 뒤집힐 것 같기도 하고 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그러자."
나는 발걸음을 돌리며 한 가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저 '엘레오노라'라고 불린 구울의 외모에서 위화감이 드는 거지?
필리아 남작가를 나오자마자 하사나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 나오고는 얼굴을 와락 찡그리며 말했다.
"필리아 남작은 미친 게 틀림없어요."
"보면 누구나 알아. 세상에 네크로 필리아라는 이름값 하는 녀석이더라. 설마 구울을 상대로 섹스하면서 발정 난 새끼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름이 네크로 필리아인 양반이 시체박이다. 다이너 마이트의 가문도 상단이 시작이지만 주된 수입원이 광산에서 캔 금광석인 걸 떠올리면 이름값을 한다.
아니, 게임 제작자 양반들 너무 이름 대충 지은 거 아니냐.
"그게 아니에요."
네크로가 시체박이라는 사실 말고도 더 놀라야 할 사실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솔직히 좀 충격인데.
"방금 전에 네크로 그 새끼가 분명 엘레오노라라고 했죠?"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엘레오노라의 풀네임을 아시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고도 귀족가의 자제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현대사만 알면 됐지 제국역사학까지 배우기에는 귀찮았다.
전생에서도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를 외우는 것만 해도 머리가 쥐가 날 것만 같았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량으로 놀고 먹으며 살아도 되는 데 굳이 공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사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귀 열고 딱 들으세요. 그 구울의 풀네임은 엘레오노라 나이트킹덤."
"……."
아, 잠깐. 듣자마자 너무 좆될 삘이 아주 강하게 드는데.
"바로 나이트킹덤 제국의 건국제라고요!"
"오."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번질 것 같았다.
'시바. 좆 됐다.'
건국제(?國?)라는 건 그 나라에 있어 시조나 다름없다.
특히 우리 제국은 시조를 지극하게 모신다. 제국은 국가답게 백성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지정한 축제의 주가 있는 데 그게 바로 건국제에게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시조풍년제다.
시조풍년제에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모두 물가를 낮춰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축제의 허들을 낮추고 부족한 자금은 황실금고에서 나와 보충해 줄 정도로 시조를, 황가에게 충성을 모시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건국제를 위해 묘지기를 자처한 가문이 시체박이에 시조의 시체를 구울로 만들어 능욕한다? 네크로 그 시체박이 새끼도 미쳤지만 흑마법사 놈들도 제정신이 아니다. 이건 대놓고 제국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거 조용히 흑마법사 새끼들만 조지는 게 아니라 아예 황성에 입실해서 황제에게 보고해야겠는데.
만약 나중에 우리가 그들을 조사했다는 사실과 네크로 새끼가 시체박이라서 고인이 된 건국제를 범했다는 사실을 모른 척했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주옥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거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도 되나요?"
"인제 와서 뭘. 물어 봐."
"당신을 호위한다는 여기사 있잖아요."
지금 내 호위 기사인 여성(?)은 둘이다.
"수인(워비스트)? 인간(휴먼)?"
"인간 쪽이요. 그 여자 정체가 뭔가요?"
앨리스는 분명 어느 높으신 분의 사생아라고 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의뢰를 한 걸까. 경계하는 내 기색을 읽은 건지 하사나가 곧장 이유를 밝혔다.
"정보 조직으로써 묻는 게 아니에요. 그저 이 상황에 의해 우연히 겹쳐 궁금할 뿐인 거죠. 도대체 그 여기사는 정체가 뭔데 건국제랑 얼굴이 그렇게 닮았냐고요."
"어?"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왜 내가 방금 전에 엘레오노라 나이트킹덤의 구울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던 건지. 살짝 도도해 보이는 눈매나 골격, 그리고 가슴 크기마저 건국제랑 비슷한 면모가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버지가 앨리스는 어느 높은신 분의 사생아라고….
주륵.
식은땀이 흐른다.
"……."
이런 쉬바. 나 진짜로 좇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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