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노출증 여기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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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붑! 어부부부붑!"
이프리트가 일으킨 열폭풍의 여파에 그대로 얻어 맞은 나와 앨리스는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열폭풍이 들이치기 전에 오러로 나와 앨리스를 보호하듯 감싼 게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폭풍에 휩쓸린 우리 둘은 그대로 날아가 재수없게도 절벽에 떨어졌고 그 아래에 있는 강에 빠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앨리스는 열폭풍의 충격에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나는 두 명분의 무게를 감당한 채로 헤엄을 쳐야 한다는 거다. 나 하나였다면 금방 헤엄쳐 나왔겠지만 전신갑주인 앨리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난이도가 급상승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앨리스를 버릴 수도 없고.
"끄르륵!"
강물과 공기를 섞어 마시며 버티던 나는 앨리스의 갑주를 벗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물살이 거센 데다가 그녀의 갑주 구조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기에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더 있다간 나뿐만 아니라 앨리스까지 강물을 마시게 될 것 같았기에 속으로 사과를 하고는 당장 손가락에 오러를 씌워 이음새가 있는 부분을 아예 잘라버렸다.
이음새를 자르니 갑주가 하나둘 씩 벗겨지며 강물 아래로 하강했고 나는 흐르는 강물 속에서 몸을 띄워 호흡하기 훨씬 편해졌다.
"어푸. 어부붑. 앨리스? 앨리스?!"
이름을 불러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에 갑주를 마저 다 떼어버리고 당장 발바닥에 오러를 만들어 잠깐 굳히는 걸 발로 차면서 이동해 강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전설에 나오는 수상비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성 한 명을 어깨에 맨 채로 수영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인 이동이었으니까.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거세게 몰아치는 물살에 혀를 찬 나는 오러를 굳혀서 밟는 게 아니라 아예 발바닥에 오러를 집중시킨 다음 터뜨리는 걸로 추진력을 얻어 물가로 향했다.
오러를 거칠게 다루며 폭발시킨 반동을 받느라 발바닥 살이 찢어졌으나 지금은 그딴 것보다 앨리스를 인명구조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힘겹게 강가를 빠져나온 나는 앨리스를 얌전히 옆에 눕히고서 곧장 발라당 드러누웠다.
"후하아아아아……. 푸우우우우……. 쿨럭."
입에서 물이 한움큼 쏘아져 나온다.
내 입이 분수대 마냥 물줄기를 주르륵 쏘는 모습을 타인이 본다면 상당히 꼴불견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고래도 아니고.
"후우우. 몸을 녹여야지."
이프리트가 마지막에 태양원기옥을 날릴 때 마력을 한무더기 챙겨가긴 했지만 공작가 평기사 수준의 마력은 충분히 남았다. 어디 몸을 녹이며 쉴 장소가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절벽 쪽에 사람 다섯은 누울 수 있을 법한 커다란 굴이 있었다.
아직 기절해 있는 앨리스를 조심스레 들어 그 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고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딱히 태울 만한 게 없었기에 혀를 찬 뒤에 공간확장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아공간 주머니라면 좋았겠지만 그런 비싼 건 내 용돈으로도 커버가 불가능했고 결국 이 공간확장 주머니인데 크기는 작은 주머니지만 실제 크기는 여행용 가방 정도 된다고 보면 됐다. 이 안에는 여분의 옷들과 소량의 생필품, 그리고 나흘치의 맛.없.는. 보존식량이 존재하고 있었다.
앨리스까지 먹는다고 생각하면 이틀밖에 못 먹겠지만 그건 삼시세끼 다 먹을 경우다.
마력이 떨어졌어도 맨몸으로 초인에 가까운 나와 앨리스라면 하루에 한 끼만 보존식량을 먹으며 버틸 수 있다. 한 달 내내 그렇게 하라고 해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괴랄한 신체능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육체가 정상적인 상태였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열폭풍의 충격으로 기절하고 강에 빠져 푹 젖은 앨리스가 가만히 있으면 신체능력이 저하되어 어떤 악조건이 떠오를 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보이는 마른 풀 몇 가닥들을 열심히 모아 공간확장 주머니에서 꺼낸 옷가지로 둘둘 말아 포대기처럼 싸고는 화 속성 오러를 일으켜 불을 붙였다. 즉석에서 만든 화톳불이지만 앨리스의 몸을 말리는 걸로는 충분할 거다.
"후우. 이제 벗어야지."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있으면 몸의 온도를 옷에게 빼앗겨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건 상식.
나는 상식인답게 차례로 벗어 완전히 나체가 됐는데 벗은 옷은 화톳불 옆에 놓았고 앨리스의 옷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이건 절대 내 사심이 들어간 게 아니라 엄연히 앨리스의 몸을 걱정하는 남자친구로서의 당연한 조치였다.
나는 나쁘지 않아.
어딘가의 무승부 전문가가 떠오른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까지 드립을 치면 쓰나.
갑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이 들려고 하기에 고개를 털듯이 좌우로 흔드는 걸로 떨떠름한 기분을 털어냈다.
'그나저나 앨리스도 참 상처가 없구나.'
보통 기사가 될 때까지 많은 고비를 겪는다.
검을 휘두르고 예의를 차리며 깔끔 떠는 게 좀 예의바른 용병들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칼밥 먹고 사는 처지인데 뭐가 다를까. 그렇다고 해도 중소기업 부장과 대기업 과장 정도의 미묘한 대우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기사가 되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법이며 그에 동반되는 물리적인 상처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단련을 하든, 훈련을 하든, 대련을 하든 기사란 족속이 검을 휘두르는 게 일이며 다칠 수밖에 없다. 그럼 당연히 치료를 해도 어느 정도 흉터가 남기 마련인데 상의가 벗겨진 앨리스의 팔부터 복부까지 매끈한 살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마 이렇게 말끔하려면 다칠 때마다 포션을 사용해야 했을 텐데 기사의 봉급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아버지가 말했던 앨리스의 친부가 고위 신분의 사람이랬지. 그럼 포션을 얼마든지 살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준 거려나.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나중에 한 번 알아보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네.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앨리스를 정략결혼시킨다면서 데려가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적어도 이런 흉터 하나 없는 기사 한 명을 온전하게 육성하려면 최소 백작가에서 포션을 지원해줘야 할 거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기사가 아님에도 앨리스 한 명에게 이만큼 투자한 걸 보면 그녀를 지원하는 친부는 최소 재력이 후작가 이상이라는 거겠지.
포션은 그만큼 비싼 물건이니까.
나중에 당신의 그림자에 새롭게 의뢰를 넣어야겠다. 그들의 정보력으로도 앨리스의 본가를 찾아내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속옷만 남긴 채 세미누드가 되어버린 앨리스를 맨바닥에 눕히고 있는 건 남자로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나마 남아 있던 여분의 옷을 공간확장 주머니에서 마저 꺼내 바닥에 매트 대신 펼치고 그 위에 그녀를 눕혀줬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잠시깐 빤히 내려다봤다.
마치 검사를 하듯 말이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후우. 다행이네."
여러 마안 계열 스킬로 확인한 결과 앨리스는 딱히 부상이 없었다.
그저 피로가 너무나 누적되어 있을 뿐.
옷 벗길 때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왔는데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앨리스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윤기가 흐르던 아름다운 분홍빛 머리칼이 고된 전투를 겪었다는 걸 증명하듯 먼지가 가득하며 푸석했고 얼굴은 불길을 완전히 막지 못했던 건지 열폭풍 속에서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앨리스의 뺨을 본 나는 벗어놨던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 젖은 옷이니 걸레로 쓰기로 하며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앨리스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준다.
"에휴. 우리 스승은 제자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 알아주려나 몰라."
다 닦은 후에는 나도 화톳불 옆에 발라당 누웠다.
피로가 많이 쌓여 기절하고는 깨질 못하고 있는 앨리스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지쳤다. 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뇌근육답게 전신이 근육으로 가득한 근육돼지 녀석들의 살을 가르고 무기를 쳐내느라 내 작은 육체는 피로가 빠르게 쌓였으니까.
'이걸로 계정이 연동되면서 환생한 내 미친 재능을 품은 육체도 약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네.'
체력이 부족하다.
정확히는 굳이 스태미나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쇼타라는, 육체를 구성하는 성분의 소유 한계에 의해 내 신체는 같은 경지의 미친 강자끼리 비교하자면 빨리 지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똑같이 단련한 성인의 체력과 아이의 체력이 엄연히 비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천재라고 칭송받는 재능을 가진 아이가 몇 년 검을 휘둘렀다고 일평생 검을 휘두른 성인 남성과 싸워 이길 지언정 계속 싸우면 먼저 지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 문제는…… 키가 자라지 않는 내게는 치명적인 거네. 나중에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건지 한 번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그래도 이곳이면 오크에게 쫓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자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걸까. 생명이 위급하여 생존본능이 치솟을 때도 아닌데 여유가 생기니 내 용자지는 껄떡대며 옆의 미녀를 덮치는 건 어떻겠냐며 고개를 치켜 세우려고 한다.
"쉬바 내 아들은 이럴 때도 자기주장 존나 강하게 하네."
무리에서 대표 뽑을 때 자기가 하겠다며 관심을 끄는 관종을 보는 기분이다.
내 용자지는 무슨 관좆이라도 되는 걸까.
별 쓰잘데기없는 상념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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