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노출증 여기사 (7)
* * *
백작령으로 가는 길은 무난했다. 딱 봐도 휘황찬란한 교단의 전력과 공작가의 제3 기사단이 행군을 하고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시비를 걸 수 있을까.
산적도 약자에게 적당히 야금야금 까먹어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몬스터 또한 생존본능이 있는 녀석들답게 상대방이 강자라고 느낀다면 본능적으로 숨 죽이며 기어다니는 게 보통이다.
교단과 공작가.
보자마자 숨 죽이고 가만히 있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걸으면서도 쉴 때는 느긋히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충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땅거미가 내려앉고 하늘에 밤이라는 이름의 이불이 펼쳐질 즈음이 되자 행군을 멈추고 야영을 시작했다. 병사들이 숙련된 군인답게 텐트를 치고 불침번을 세우는 모습은 전생에서 내가 의무군인이었을 때를 떠올리게 해서 잠깐 PTSD가 올 뻔했지만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폭유 수녀 아비게일의 존재감으로 인해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다.
고추밭인 군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경국지색의 유부녀 수녀가 아닌가.
그리고 가슴은 진리지.
'다시 태어나길 잘했어.'
보통 야영의 불침번은 병사들과 당직인 기사 한 명으로만 이루어지지만 나는 상급 수녀의 호위로서 온 것이기에 나, 앨리스, 티타니아, 그리고 원래 호위 성기사들이 번갈아 호위를 하기로 했다.
"이번 불침번은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르잔 경."
절도 있게 인사를 하는 성기사를 보며 나는 아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나도 땀내 나는 사내와 불침번을 서는 것보다는 티타니아나 앨리스와 불침번을 서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다른 한 명이 이름도 모를 성기사 사내와 불침번을 서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찌질하긴 하지만 독점욕이 강한 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자처해서 성기사 한 명을 지목해 같이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지목한 성기사는 아르잔 윌리엄스라고 성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상급 수녀 아비게일 윌리엄스의 남편이었다. 듣기로는 말(馬) 수인이라고 하던데 아비게일하고도 친해졌으니 이왕 남편인 아르잔하고도 인맥을 트고자 그랑 불침번을 서고 싶다고 부탁한 거였다.
호화스러운 상급 수녀 전용의 텐트를 옆에 두고 가만히 서 있는 건 뭐했기에 뭐라 말을 꺼낼까 싶었는데 아르잔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공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 실력이 궁금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보증하신 데다가 신께 귀의한 저도 나름 검을 들고 싸우는 기사로서 공자의 실력이 세간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다른 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성기사 중에서는 제법 기세가 날카로웠다. 과연 상급 수녀의 남편이랄까.
그런데 내 금태양 합법쇼타의 외형 때문에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뭐가 궁금한 거지?
"공자가 마차에서 아비게일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아."
"혹시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어조를 보면 분명 강제성이 아닌 부탁이었다.
나도 그의 말을 듣고 부랄을 탁 칠 뻔했다. 아니, 자기 아내가 외간남자랑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으면 그야 당연히 불안해 할 만한 것이거늘 왜 눈치채지 못했을꼬.
나라도 나 같은 금태양 분위기의 소년이 내 여자랑 단 둘이 좁은 공간에 있겠다고 하면 불안할 테니까.
"아비게일 님이 어떤 전투 방식을 취하는지랑 본래 성격은 털털하시다는 걸 보여주셨죠. ……성배를 꺼내서는 둔기로 쓴다고 했을 때는 저도 놀랐지만요."
"그렇군요. 혹시 저에 대해서 말씀하신 건 없었습니까?"
"?"
뭐지. 무슨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겠네.
결국 고민해봤자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답했다.
"딱히 없었는데요."
"그렇군요. …충고 하나 하자면 저랑 가까이 지내는 건 주변에서 안 좋게 볼 겁니다. 아, 공자의 위치가 문제라거나 제가 싫다는 게 아니라 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그렇게 된다는 거니 오해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하군요."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르잔이었다.
무슨 큰 실수라도 예전에 저질렀던 걸까. 그렇다 해도 성녀 체질을 가진 상급 수녀의 남편이라면 교단에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동료들도 인맥을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가까이 할 텐데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상급 수녀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무색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아예 호위로서 채택되지 못했을 테니 그건 아닐 거고.
"그러니 저와 거리를 두셨으면 합니다."
무례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훤칠한 미남이 정말로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까지 숙이는 데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그건 그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일이며 동시에 모욕하는 일이었기에 괜히 그랑 틀어져서 아비게일과의 관계까지 악화시키지 말자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수긍했다.
"쩝.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여자들과 떨어진 김에 그냥 인맥이나 좀 쌓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곧장 실패했다.
그렇게 말없이 어색한 시간을 보내며 불침번을 서다가 다음 불침번 조와 교대하여 연인들 사이에 껴 잠을 청했다. ……여인들의 가슴은 훌륭한 쿠션이었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이들도 별로 없겠지.
◇◇◇
"후아아암."
"어머. 잠 못 잤니?"
"아뇨. 잠은 잘 잤는데 이상한 게 있어서요."
또 다시 상급 수녀와 함께 하는 마차에 탔다. 슬슬 성기사들이 눈치를 주고 있긴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들 모두가 눈앞의 아비게일과의 인맥보다 못하다.
……라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폭유의 여우 밀프랑 있는 게 훨씬 좋아서 그런 거지만.
갑자기 하품을 하자 수면부족을 걱정하며 묘하게 모성애(?)를 발휘하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어제 일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비게일하고도 친해졌으니 이왕이면 남편 분인 아르잔 경하고 친하게 지내볼까 했는데 어제 같이 불침번을 섰더니 자기랑 가까이 있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혹시 왜 그런지 아세요?"
아는 기색이기에 물었더니 아비게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긴 해. 하지만 부부라고 해도 타인의 비밀을 함부로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운해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쩝. 아쉽긴 하지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비게일을 싫어할 일은 없어요."
"착하네, 착해~."
외형이 쇼타라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아비게일.
나는 친근한 그녀를 남편에게서 강탈할 마음이 없었다.
연인이 될 수 없는 그녀였기에 오히려 이 손길을 순수한 마음을 즐길 수 있었다. 앨리스나 티타니아가 쓰다듬었다면 눈앞에 흔들리는 가슴을 붙잡고 주물렀을 테니까.
똑똑똑.
"윌리엄스 수녀님. 휴식 시간입니다. 마차에서 나와서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아뇨. 저는 여기서 식사할게요. 꼬마는 어쩔래?"
"저는 나가서 식사할게요. 가만히 있으니 몸이 좀 쑤셔야죠."
어깨를 돌려 풀면서 그리 말하자 아비게일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젊은 애가 벌써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수녀님, 올해 연세가?
이리 말하면 아무리 자상한 그녀라도 날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나라면 좋다고 껌뻑 죽는 티타니아조차 나이를 언급하면 옆구리를 아프도록 힘 주어 꼬집을 때가 있으니까.
그녀를 마차에 두고 홀로 내렸다.
나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두 연인에게 다가갔다.
"내가 뭐 할 일은 없어?"
"없습니다."
"점심은 저희가 준비할 테니까 쉬는 김에 좀 씻고 오세요. 며칠 마차에만 지내셔서 그런지 기름이 반짝이는 거 같아요. 마침 엘라임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호수가 있다고 하네요."
분명 야영만 며칠 하느라 씻지 않기는 했다. 간략하게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이나 손을 닦기는 하지만 그건 티타니아랑 앨리스도 마찬가진데 얘네들은 어째서 얼굴이 반들반들거리는 걸까.
여자란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생각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아비게일도 깨끗하던 거 같았는데.
"쩝. 그럼 나는 좀 씻고 올게."
이럴 줄 알았으면 가볍게 [클린] 마법이라도 익힐 걸 그랬나.
이 행군의 지휘자인 공작가 제3 기사단장과 상급 수녀인 아비게일에게 목욕하러 호수로 가겠다고 보고를 한 뒤에 캠프장을 나섰다.
티타니아가 알려준 대로 이동하니 얼마 걸리지 않아 제법 넓직한 호수가 있었다. 바위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아예 수영을 하는 게 아니라면 문제될 건 없었다.
"오. 물이 깨끗하네. 간만에 땟국물 좀 벗겨보겠구만."
단번에 옷을 벗고 고이 접어 바위 위에 올려놓은 나는 당장 호수에 몸을 담궜다. 극양의 마력을 방출해 호수물을 따뜻하게 뎁힌 나는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때였다.
'……누가 있다.'
이 호수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 [직감]했다.
설마 그린스킨에서 보낸 고블린 어새신일까? 아니면 내게 원한을 진 이가 고용한 살수일까.
은밀하게 마력을 퍼뜨려 누군가의 존재를 확신한 나는 은밀하게 손에 오러를 씌우며 은밀하게 다가오는 이의 기습에 대비했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알고 있으니 카운터를 먹이면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실력에 따라서는 당장에 수도(手?)로 심장을 지키는 가슴팍을 꿰뚫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모른 척을 하고 있었는데…….
"레온 공자?"
"아르잔 경?"
정작 바위 뒤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건 어제 나랑 같이 불침번을 선 아비게일의 남편이자 성기사인 아르잔이었다.
"어째서 여기, 에……?"
"아….아니, 이건."
왜 여기 있냐고 물으려 했으나 도중에 나조차도 말문이 막히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아르잔의 고간에 있는 성기가 날 보고는 하늘을 돌파할 기세로 대가리를 치켜세웠기 때문이다.
말 수인이라더니 내 25cm 용자지보다는 못하지만 20cm는 족히 될 법한 말자지였다.
……시바. 저 새끼 지금 나 보고 발기한 거 맞지? 죽여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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