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노출증 여기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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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앨리스의 고백.
야시시한 기분이 드는 핑크색 머리카락에 기사답게 잘 단련시켰으며 여인으로써의 선천적인 매력을 자랑하는 굴곡진 몸매는 산 속에서 수련을 하는 수도승이라 해도 당장 고간을 발딱 세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백을 하니 나로서는 기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럽다.
왜 당혹스럽냐면 노출증을 커밍아웃하고 곧장 이어서 자지를 붙잡힌 상황에 고백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달까.
뭐지. '대딸로 시작하는 연인'이라는 건가.
내가 존나 당황하며 뭐라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앨리스가 시무룩해졌다.
"역시… 이런 변태는 도련님도 싫으신 거겠죠…….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서."
"후우. 그거 아니거든."
"도련님?"
변태적인 이상성욕이 있다고 언제나처럼 보이던 여기사가, 내 검술 스승이 절망하면서 자신감이 바닥을 파려는 걸 보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아니, 변태여도 이렇게나 꼴리는 몸매랑 매력을 지녔으면서 왜 자존감이 바닥으로 기려고 하냐는 말이다.
티타니아도 자신을 만질 수 있는 내 손길이라면 닿기만 해도 뷰릇뷰릇 보지에서 발정난 증거를 줄줄 흘리는 색정광 같은 기색을 보인다.
그런데 살면서 몇 년이나 함께 보냈던 내게까지 노출증이 있다는 걸 숨긴 그녀가 자기제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조금 변태적인 취향이 있다고 남자들이 그녀를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
실제로 앨리스는 본가의 기사들에게 몇 번이나 고백을 받았을 정도로 인기가 많고.
멍하니 이쪽을 올려다 보는 바보 같은 검술 스승에게 한 마디 해 주기로 했다.
"앨리스."
흠칫.
평소에는 스승이라고 불렀지만 고백까지 받은 마당에 계속 그리 부를 수는 없었기에 이름을 부르자 앨리스가 움찔했다.
"너는 내 검술 스승이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동시에 내 호위기사야. 맞지?"
"당연합니다."
"주종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돼? 있어야 돼?"
"없어야… 합니다……."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앨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앨리스를 내 검술 스승이자 호위기사로 삼을 때부터 모든 걸 수용하기로 결심했다고. 앨리스가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주군인 나도 책임을 져야 하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내가 손을 뻗자 앨리스가 눈을 꾹 감는다. 설마 뺨을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설마 날 그렇게까지 쓰레기로 보고 있지는 않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존나 약한 내 글래스 하트가 깨질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은 나는 뻗으려는 검지를 엄지로 만류하는 자세, 즉 딱밤을 취하고는 앨리스의 이마를 툭 쳤다.
"그런 말 못할 취향이 있었다면 꾹 참지 말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이 바보 스승."
모시는 주군이 난데 좋아하는 사람도 나라고 하니 숨기고 있던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노출증이란 게 워낙에 변태적인 성향이긴 했지만 내가 틈만 나면 티타니아랑 관계를 맺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텐데 색을 밝힌다는 걸 간파하고 스스로 자백하면 좀 좋아.
그럼 굳이 이런 무드도 없는 목욕탕에서 이중적인 고백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테고.
애시당초 목욕탕의 열기로 사고능력이 저하되고 나랑 알몸으로 마주해 노출을 하게 됐다는 점이 흥분되어 횃김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근데… 앨리스가 노출증 있으면 나는 오히려 개꿀 아닌가?'
저번에 구매했던 발키리 아머.
굳이 따지자면 비키니 아머로 분류되는 갑옷을 어떻게 입힐지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노출증이 있다면 아무런 조치도 없이 제안만 해도 알아서 입어줄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한 나는 지금 당장 주는 것보다는 조금씩 노출을 늘려가는 게 앨리스에게도 부담이 덜 될 거라 생각하는데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기감을 펼치니 앨리스가 날 희망을 갖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 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이럴까 싶다가 순간 그녀의 고백에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란 애새끼는 전생에서부터 IQ가 연애뇌세포만 죽어버린 돌대가린가.
여자가 수치심을 억누르고 고백까지 했는데 대답도 안 하고 이 와중에 어떻게 비키니 아머를 입혀볼 수 없을까 고민이나 하는 아랫도리에 뇌가 달린 새기 같으니.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진다.
"앨리스."
"네."
"좋아해. 원래 티타니아랑 맺어지기 전부터 꼬실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쫄보라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성욕을 풀 생각부터 하다가 그녀랑 먼저 이어졌지만 내게 검술을 가르친 멋진 여스승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전해."
시바. 여러 게임의 아바타가 가진 스킬을 가지면 뭐 하나.
사용하는 주인이 존나 쫄보 새낀데.
이런 멋진 여성이 전부터 날 사모하고 있었다는 데 멍청하게도 눈치를 국밥에 말아먹어서는 마음고생이나 시키며 이런 어이가 없는 욕탕에서 고백하게나 만들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만류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스승을 좋아했다고. 앨리스라는 여기사가 내게 반하기 전부터 나는 검을 가르쳐주고 지켜주고 같이 본가까지 나와서 별장까지 와준 앨리스라는 여자를 제가 사랑합니다."
즉, 이건 앨리스(여자)가 한 게 아니라 내(남자)가 고백해서 사귀는 거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앨리스 경."
"네…. 저도 도련님을, 아니…… 레온 하르트 당신을 사랑합니다."
근데 한 가지 잊지 않았니?
"……앨리스. 이제 슬슬 자지 좀 놓아주지 않을래?"
"죄, 죄송합니다! …………근데 더 만지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더 주물럭거리면 내가 덮칠 거 같거든.
◇◇◇
일단 오크 웨이브도 있으니 사귀면서 즐기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고 얘기를 나눈 뒤 목욕을 끝냈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고위요정만이 가질 수 있는 풍요로움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떠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당장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가주실로 쳐들어갔다.
쾅!
"가주님! 할 말이 있습니다!"
"……."
마치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라고 말할 것만 같은 기백을 내뿜으며 내가 다짜고짜 난입하자 아버지는 또 무슨 일이냐며 머리를 붙잡고 주무르신다.
보아하니 머리가 지끈거리시는 모양인데 오크 웨이브 때문에 스트레스를 은근 많이 받으시는 것 같으니 나중에 영약이라도 하나 구해다 드려야겠다. 효도는 해야지.
"그래. 또 무슨 일이더냐?"
"어제 기사들이 앨리스 경을 기사로 대우해 주지 않고 가문의 객으로 취급해 손님방을 줬다고 합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아버지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마 아버지도 이게 잘못된 행위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는 거겠지.
이때다 싶어 따다다다 쏘아붙였다.
"앨리스 경은 제 호위기사에요. 천재인 제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고요. 그런 뛰어난 기사를 왕따시키는 걸로 모자라 손님용 방을 주다니요! 이건 아버지가 용납해도 제가 결코 용서를 못하겠습니다. 오크 웨이브 때문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때이니 '지금은' 딱히 신체적 처벌을 가하지 않겠습니다만 일이 다 끝난 후에는 그들을 처벌할 권리를 제게 주십쇼. 만약 그러실 수 없다고 하시면 아무리 아버지라도─!"
"그러거라."
"때려 눕히는 불효를 저지르더라도─! ……네?"
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족에게 다정한 면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최우선순위인 가문을 위해서라면 포기할 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우리 아버지다.
가신 귀족들이 대부분 대공자인 장자를 지지하기에 어쩔 수 없이 날 포기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은 아버지는 기사들을 아낀다는 검술명가답게 기사들을 지킬 줄 알았는데 시원하게 앨리스를 따돌린 벌을 내리라고 허락하신 거다.
저 깐깐한 양반이 웬일로 저렇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인정한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단 말이지.
"너무 쉽게 인정하시네요?"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고작 기사 몇 때문에 네가 떼를 쓰며 일으킬 사건이 더 곤란하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예 오크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 해 다오. 거기서 슥삭해 버리면 아무도 모를 테니 말이다."
"……오우야. 공작가의 가주답지 않게 그 무슨 험한 말씀이세요."
슥삭이라니. 모가지를 뎅겅 잘라 오라는 말이 아닌가.
나는 그냥 분골착근의 묘리로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고문을 가할 생각이었는데 아버지는 그냥 단숨에 황천길로 보내주자는 주장을 하셨다. 아버지도 한 성깔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죠?"
"무슨 소리더냐."
"평소라면 가문의 자금으로 절 살살 달래며 가볍게 끝내실 거였는데 이번에는 그냥 화끈하게 지르라고 하시니 제가 의심하지 않을 수 있나요."
"……."
내가 꼬장을 부린다고 해도 막을 수도 없지만 달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내 여자를 따돌린 만큼 큰 금액이 들어 가주로서 스트레스를 좀 받을 수는 있어도 평화적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결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냥 기사들 목을 슥삭하라고 하셨으니 내 꼬장만이 이유는 아니리라.
긍정도 부정도 없는 침묵을 고수했지만 그건 이미 어느 정도 내 추리를 인정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 일단, 내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 일부를 알려주마."
"일부요?"
"내 개인적인 문제나 가문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앨리스 경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네가 경의 제자라도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될 정도로 큰 비밀이기에 굳이 나중에 물어본다든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이 양반 내 속마음 어찌 알았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수긍만 할 수밖에 없는 날 보고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는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가셨다.
"앨리스 경은 사실 어느 고위 귀족의 사생아다. 친부는 권력다툼에 그녀가 휘말릴까 봐 모친과 함께 그녀를 내 기사단에 입단시켜달라고 부탁하셨고. 앨리스 경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마침 모친이 여기사였기에 기사단에 입단시켜 보호해 주는 것은 쉬웠지."
"아버지가 가문의 기사들을 족치는 이유는 안 되지 않나요?"
"앨리스 경의 친부는 나도 싸우기 싫다. 일이 귀찮아지고 가문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될 결과만 나오니까."
"……."
제국의 검술명가로 이름을 날리는 하르트 공작가면 어지간한 가문은 그냥 씹어먹을 텐데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귀찮아 하며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니 앨리스의 친부가 최소 공작위의 귀족은 되겠구나 싶었다.
아니 시바. 근데 제국에서 공작은 우리 아부지랑 거력으로 유명한 대장군인 소(?) 수인뿐인데 우리 아부지가 당연히 앨리스 경의 친부는 아닐 테고 그럼 대장군의 딸래미라는 건데 그건 또 말이 안 되는 게 이종족과 인간의 혼혈이면 이종족의 외형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앨리스는 검술에 재능이 있을 뿐이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지 않은가. 즉, 소 수인 대장군은 앨리스의 친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럼 후작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추측이 끝도 없이 늘어나기에 잠시 사고를 멈췄다. 보아하니 아버지도 내가 앨리스랑 사귄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 같은데 지금은 그 기사 같지도 않은 기사 새끼들을 오크 웨이브에서 조지는 것만 생각하자.
"어쨌든, 너는 상급 수녀와 그 호위들이 올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거라. 그 기사놈들은 오크들과의 전투에서 은근슬쩍 들키지 않게 슥삭하고."
봐라. 아버지도 그러라고 하시잖은가.
"그런데 레온. 날 때려눕히겠다고?"
"……."
그날부로 용돈이 깎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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