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애정결핍 요정 (4)
* * *
앨리스와의 대련으로 티타니아의 실력이 뛰어난 건 잘 알 수 있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성노(??)의 의미로 구매된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귀족가의 자제가 성노예를 구입해 사용하는 건 크게 흠이 아니다.
애시당초 제국에서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흠 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국법을 만든 황가에 대한 도전이고 정말 그랬다간 가문 자체가 반역죄를 덮어 쓸 수도 있기에 건드릴 간 큰 이는 없었다.
"큿. 노예법을 폐지했어야 하는데."
"스승.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 일 난다. 황가에서 반역죄 덮어 씌울라."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은 가끔 자기 신분을 잊는 거 같아."
황가의 이들더러 머저리니 뭐니 언급할 때면 내 심장이 다 쫄깃해진다.
이래 뵈도 자신의 검술 스승인 앨리스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소중히 대하고 있다. 그런데 반역죄를 덮어 씌워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을 할 때면 그녀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제자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앨리스의 태도는 여태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만 초조해 하는 건가. 짜증나네.
자신의 심정을 배려해주지 않는 스승의 작태에 제자는 불만이 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늘 같은 스승을 제자인 자신이 배려해 줘야지.
"어쨌든, 티타니아는 오늘 밤부터 내 침실로 찾아와. 알겠지?"
"네."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티타니아의 대답에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
자신이라도 아무도 만지지 못하던 자신을 잡을 수 있는 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굉장히 환호하다 못해 감격에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고작 들뜬 정도 만을 내비치는 노예 요정에게 주인은 속으로 감탄을 터뜨린다.
'어쩌면 싼 값에 굉장한 전력을 얻은 걸 지도 모르겠네.'
밤일이야 요정과 하다가 복상사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앨리스가 이미 보장해줬으니 믿을 수 있을 테고, 나머지는 티타니아가 노예이자 기사로서 활동하는 거다.
아무리 가문을 반즈음 나온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의 신분은 공작가의 직계.
실력 또한 황실 근위 기사단과 비교해도 압도적을 이길 수준이지만 저택에 거주하는 실질적인 전력이 병사를 제외하면 기사가 앨리스밖에 없다는 건 큰 문제였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계약한 정령이라는 걸 대련을 구경하며 알아봤으니 어떻게 해야 노예 요정에서 뽕을 뽑을 수 있을 지 고민하며 연무장에서 나갔다.
충성심이 넘치는 기사는 얼른 그 뒤를 따라 연무장에서 같이 퇴장했다.
연무장을 나오니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다가와 편지를 내밀었다.
한낱 시녀보다 키가 작은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지만 사용인에게 그런 티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 귀족이었기에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보낸 거야?"
"본가(?家)에서 가주님이 보내신 겁니다."
"그래? 웬일이래."
반즈음 가문을 나온 자식인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의아해하면서도 시녀에게 편지를 받아 봉투를 뜯고는 꺼내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대략 내용을 이해한 난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혀를 찼다.
쯧. 이럴 줄 알았다.
그런 제자의 반응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짐작한 앨리스가 옆에서 물었다.
"도련님. 가주께서 뭐라 보내신 거죠?"
"요즘 오크 무리의 이동 경로가 심상치 않다네. 어쩌면 오크 웨이브가 일어날 지도 모르니 언제든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래."
"싼 값에 고급 전력을 부려먹겠다는 거군요."
앨리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꼭 위험할 때만 검술 실력이 뛰어난 주군을 이용해 먹는 게 그녀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가 충성을 바치는 건 공작가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제자 레온인 나 개인이었으니까.
다만, 나는 딱히 불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용돈 꼬박꼬박 주지. 자유 보장해주지. 귀찮게 귀족 사회에 들어가 다른 귀족 연회에 참여할 필요도 없어. 얼마나 자유로워.'
한량의 꿈을 반즈음 이루게 해줬으니 이 정도 요구는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심을 다하면 어지간해선 오크들로 상대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하니 말이다. 실제로 순수 검술만 앨리스에게 한끗 딸린다 싶을 뿐이지 오러까지 발현하면 압도적은 아니어도 십중구할은 내쪽이 승리를 점치게 된다.
거기다 다른 스킬들까지 전부 활용하면 압도적으로 빠르게 쓰러뜨릴 수도 있다.
그러니 오크들의 움직임이 수상하거나, 오크 웨이브가 일어난다 해서 걱정될 일은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한량처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스승이나 티타니아 같은 미녀들 사이에 껴서 유유자적 살면 얼마나 걱정거리 없고 마음 편한 인생이야."
"도련님은 야망이 너무 없으십니다."
"야망? 내가 제일 크기 무슨 소리야. 티타니아 같은 미녀들로 하렘을 꾸리겠다는 각오가 얼마나 어려워. 폐하께서도 하기 힘든 일인걸."
황제의 자리는 신하들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 게다가 아무 여자한테 자신의 씨를 뿌리면 후계 문제가 복잡해 훗날 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형제들끼리 골육상쟁을 한다든가.
그런 귀찮은 일에는 죽어도 일으킬 생각 없다. 남작가라면 모를까, 공작가의 후계 문제를 거론하는 건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스승. 어서 용병 길드로 가자."
"용병 길드 말씀이십니까?"
"응."
뒤를 따라오느라 스승에게는 안 보였겠지만 나는 서슬퍼런 눈빛을 했다.
"날 엿 먹이려 한 용병한테 대가는 받아야지. 티타니아를 얻은 건 결과적으로 좋았지만 감히 설녀의 특징으로 날 암살하려고 한 죄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려고."
감히 나한테 엿을 먹이다니. 내가 [극양지체]가 아니었다면 티타니아의 손길에 그대로 '얼어붙은 레온' 동상이 되었을 거다. 뒤지는 거지.
요정을 이곳으로 들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가진 범인을 족치자니까 앨리스의 눈빛이 열정으로 가득 찬다.
"병사들을 동행할까요?"
"냅둬. 병사들 우르르 몰려갔다간 이곳 영주가 기겁할라."
"이곳 자작가의 영주가 문제긴 하군요."
귀족 중에서도 최하위인 남작이 아니라 그 위인 자작이지만 가난한 양반이다.
덕분에 기사단을 운영할 돈도 없어 기사 한 명 만을 데리고 지휘체계를 꾸리고 있으며 대부분이 병사다. 선대가 오크 웨이크를 막기 위해 지원을 나갔다가 그대로 휩쓸려서 비명횡사를 한 덕분이란다.
내가 이곳 별장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서 그닥 힘을 기르거나 할 수 없을 정도로 노후된 영지라 공작가에서도 승낙한 거였다.
'치안도 안 좋고 말이지.'
그래도 꼴에 공작가가 관리하는 별장이라고 이 저택에 관련된 이를 건드리거나 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뒤지고 싶은 거라면 건들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가난한 자작 가문은 치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고 용병들이 도리어 대세인 곳이 이 영지였다. 나도 귀족가 자제지만 거친 일을 직접 하며 나름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좆도 없는 새끼가 질투심에 죽여버리기 위해 그 설녀인 요정을 떠넘기려고 중매를 선 거리라.
뒤질라고.
"메이드! 집사! 나 잠시 밖에 나갔다올게!"
우리집 사용인들은 내 실력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다.
그야 내가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본인이 숨기려 하지 않았는데 그걸 모른다는 건 신경을 아예 안 쓴다는 건데 공작가 사용인들이 주인에 대해 무신경하다는 건 귀족의 눈 밖에 띠고 싶어서 안달이 난 놈뿐이다.
그리고 우리집에 그런 멍청한 사용인은 당연히 없었고 말이다.
고작 사용인에 불과한 신분이지만 공작가에서 버려지다 싶히 한 별장이라도 관리하는 사용인들은 뛰어난 경험과 지식을 요구하며 극소수는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귀족이기도 했다.
스승과 함께 저택을 나와 용병 길드로 찾아갔다.
용병 길드로 들어가자마자 날 알아보는 이들이 반가워하며 손을 들었다.
"오. 레온이잖냐. 어디 용돈이라도 더 벌려고 왔냐?"
"잭슨이냐. 미안한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나와 앨리스의 분위기가 살벌해서 그럴까. 가끔 술친구를 하던 잭슨은 눈치가 빠른 녀석답게 입을 꾹 다물었다.
"잭슨. 라울 이 새끼 어디 있는 지 알아?"
"그 녀석? 오늘 좋은 일 있다고 2층 식당에서 가서 술 마시고 있는 걸로 알아."
"땡큐."
"때, 땡큐?"
말을 못 알아들어 고개를 기울이는 잭슨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맙다는 소리야. 나중에 내가 술 한 잔 살게."
"어. 으, 응. 그럼 나야 고맙지. 술값 아끼고."
선천적으로 아부를 잘 떠는 재능밖에 없지만 그래도 선을 넘지 않으며 적당히 위선적인 놈이었기에 술 한 잔 사주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딱히 나한테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으니까. 라울의 위치를 얻은 난 앨리스와 함께 용병 길드의 2층으로 올라갔다.
용병 길드 건물은 1층이 의뢰 및 오크의 마석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고, 2층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형태였다.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니 종종 파티를 짜는 용병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벌써 파티를 벌이고 있는 라울이 있었다.
"도련님. 설녀인 요정을 추천한 게 저 망종입니까?"
"그래. 가게 안 망가지게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앨리스의 실력이라면 다른 용병들을 제압하면서 가게도 지킬 실력이 충분하기에 부탁했다. 곧장 술을 마시며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떠드는 소리가 자연스레 내 귓가에까지 들린다.
"하하. 오늘은 먹고 죽는 거다!"
"이봐. 라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좋은 일? 당연히 있지!"
꿀꺽. 꿀꺽. 술 한 병을 거의 다 마신 그가 술잔을 소리가 울릴 정도로 거칠게 테이블에 내렸다.
"크하아아아! 여태까지 신경 쓰이던 벌레를 처리할 예정이거든. 계속 눈엣가시였는데 오늘 치우기로 해서 말이야. 깨끗해지니까 좀 좋아."
"그 벌레라는 건 날 말하는 거냐?"
"그래. 레온, 너…… 어?"
꽈악.
손을 뻗어 주제도 모르는 용병 새끼의 목을 쥐었다.
아씨. 냅다 들어올리려고 했는데 내가 키가 작아서 그냥 강제로 일으켜 세운 것밖에 안 되는 게 멋이 안 산다.
그래도 원래 목적인 녀석의 모가지를 비트는 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내 신체능력은 녀석 같이 잔꾀만 많은 용병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켁!"
"그래. 좋은 시간은 보냈냐? 이 시발 놈아."
손아귀를 약간 느슨하게 해주자 고개를 돌린 라울은 내 얼굴을 보고 안색을 창백하게 지렸다.
"커흑. 헉! 어, 어떻게…?"
"어떻게 설녀인 요정을 만지고도 살아 있냐고?"
라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이미 만졌다는 거나 진배없으니까.
벌벌 떨며 하염없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녀석에게 현실을 알려줬다.
"내 마력이 원래 열기라는 속성 그 자체에 가깝거든. 냉기랑 닿으니 서로 상쇄되는 거지."
"그, 그런……."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너는 내가 가출한 급 낮은 귀족 가문의 애송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사실 공작가의 자제야. 집을 나온 것도 아니고 허가를 받고 용병 생활을 하면서 세상 경험을 쌓던 거고."
공작가 자제.
왕족 바로 아래 계급의 귀족이며 그 권력은 왕족을 만날 일이 없는 평민에게 가장 높은 직위였다.
사실을 알게 된 라울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여기서 내가 자기를 죽여버려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실하게 이해한 모양이다.
"알았으면,"
주먹을 들었다.
"이제 좀 맞자."
퍽.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몇 개의 옥수수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라울이 허망한 눈으로 자신의 빠진 이를 쳐다보지만 나는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걱정 마. 너 이빨 아직 많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