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옛 인연(8)
* * *
한가운데에 직사각형 테이블을 배치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마차 내부는 조금 전까지 둘러봤던 다른 마차들이 좁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사님이 조금 의아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상황 설명만 짧게 해 주고 돌아올 테니, 그동안 편히들 앉아 있으세요.”
마나는 그리 말하며 세라스가 있는 마부석으로 총총 걸어갔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리는 붉은 소파처럼 꾸며진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고급 침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안락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마나 일행이 저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록시아는 세라스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주인님, 저 사람…아침에 마주쳤던 그 엘프 맞죠?”
아침에 봤을 때와 달리 투구를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라 그런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구만
록시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침에 있던 그 일은 꺼내지 말도록 하자.”
“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림이 의문을 표했다
“저 엘프가 일행한테 이미 얘기했다면 우리 쪽에서 감춰봐야 별 소용없지 않나?”
“그렇긴 한데, 마나라는 여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엘프가 아침의 일을 자기네 일행들한테 말하지 않은 거 같거든 우리도 섣불리 얘기하지 말자고필요 없는 말을 굳이 꺼내서 경계심을 살 필요는 없잖아?”
둘러댄 내 말에 메림이 그럭저럭 납득해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때…마나가 다시 돌아왔다.
“기다리셨죠~”
그녀의 곁은 조금 전의 청년 대신 세라스가 지키고 있었다서로 마부와 호위 역할을 교대한 모양이다
“제 일방적인 부탁에 응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던전에 진입하기에 앞서 여러분 같은 경험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언제 어디서나 정보는 늘 중요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살갑게 웃은 마나는 우리들의 맞은편에 사뿐히 앉았고, 그녀의 호위인 세라스 또한 갑옷이 철거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로 옆자리에 착석했다
“…….”
투구 안에서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고 있지만 단지 그뿐, 그녀는 목석처럼 침묵을 유지하며 마나의 곁을 우직히 지킬뿐이다
조금 전에 정해둔 방침대로 세라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그녀가 가만히 있는다면 이쪽에서도 못 본 척할 생각이다
ㅡ히이이잉!
이윽고 말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짐과 동시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흠~ 흐음~♪”
콧노래를 흥얼거린 마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자그마한 철제 상자를 열었는데, 안에는 각양각색의 쿠키가 한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쿠키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은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맛을 음미했다
“역시 달달한 과자는 언제 먹어도 즐겁다니까요자, 다 같이 과자라도 즐기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죠“
그렇게 우리는 마나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차 관광을 하는 느낌으로 한동안 도시를 배회하게 됐다.
* * *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마차에 탑승한 채 도시를 둘러보는 동안 마나의 요구대로 던전에서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도 가벼운 질문을 주고받은 결과
마나의 신분이 이웃나라인 알트마 왕립 마물 학회의 수석 학자이며 그녀가 던전 생태 조사를 하기 위해 호위를 대동한 채 여기까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라스의 동행인이라 진작에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알트마 출신이구만
그건 그렇고…
“마릴이라는 동생도 같이 다니고 있었구나게다가 쌍둥이 동생이라니…! 메림이랑 얼마나 닮았어?”
“당연히 이 언니를 쏙 빼닮은 미인이지~ 같은 옷차림을 하거나 서로 바꿔 입으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해“
“어머, 그 정도야?”
“정 궁금하다면 이따가 우리 방에 놀러 오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마나와 메림은 쿵짝이 어지간히도 잘 맞았는지, 지금에 이르러선 마치 십년지기 친구처럼 허울 없는 분위기로 웃고 떠들고 있다
“마나 언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놀러 오세요.”
“빈말이라도 고마워그나저나 록시아가 나한테 언니라고 불러주는 울림은…들을 때마다 너무 환상적이네.”
“아흐흐, 오버하시긴.”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낯가림이 은근히 있는 편인 록시아하고도 언니 동생 하며 부를 정도로 친근해져 있다친화력이 상당히 높은 여자다
“아니면 여자들은 원래 금방 친해지는 건가…모르는 사람이 보면 헤어진 자매라도 되는 줄 알겠군.”
“후후, 이만큼이나 마음이 잘 맞고 재밌는 자매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창 떠들고 있으면서도 내가 중얼거린 말에 곧장 반응하여 대답한 마나는 품속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더니, 벌써 이런 시간이 됐군요….”
그녀가 보여준 회중시계의 바늘 끝은 점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붙잡아 버렸으려나? 폐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네요.”
“이쪽도 즐거웠으니 크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세라스 일행과 접촉한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그들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와 이곳에 방문한 이유도 알게 됐으니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긴 하다
“…….”
앉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석상처럼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세라스를 흘긋 바라봤다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일행들이 던전 조사를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면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도, 더 이상 볼일도 없겠지
슬슬 마차에서 나가기 위해 좋게 좋게 마무리 짓기로 한 나는 옅은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들려준 경험담은 도움이 좀 될 것 같습니까?”
“네! 여러분들이 네 번째 구역까지 탐사하셨을 줄은 예상 못했는데, 깜짝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기대 이상으로 가치 있는 정보였어요덕분에 저희도 수월하게 조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거 다행이군요아무튼, 이제 이야기는 충분히 나눈 거 같으니….”
뒷말을 흐리며 벗어두고 있던 겉옷을 챙겨 입자, 양 옆에 앉아있던 록시아와 메림도 내 행동을 따라 하듯이 각자의 겉옷을 걸쳐 입었다
슬슬 나가겠다는 간접적인 사인을 바로 알아챈 마나는 우리들에게 기다려달라는 듯이 양 손바닥을 쫙 펼쳤다
“잠시만요! 헤어지기 전에 무언가 사례라도 하고 싶은데, 함께 식사라도 어때요? 물론 제가 쏠게요이대로 그냥 보내기는 면목없고, 개인적으로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고마운 제안이지만 숙소에서 따로 기다리고 있는 일행이 있는지라.”
“아, 메림의 동생인 마릴이라고 했었죠…?”
조금 전에 나눈 회화 덕분에 마릴의 이름을 떠올린 마나는 그녀도 포함하여 다 같이 식사시간을 가지자며 제차 권유했으나,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마릴의 몸상태가 좀 안 좋았거든요섣불리 밖에 데리고 다닐 여건이 안됩니다.”
시간이 지난 사이 마릴의 감기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더 악화됐을 확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네요여기서 더 붙들려고 하면 아무래도 실례겠죠.”
거기까지 말하니 순순히 단념한 마나는 마차를 세우는 대신, 방향을 틀게 했다
“아쉬운 데로 여관까지 바래다 드릴게요그 정도는 괜찮죠?”
“저희야 고맙죠.”
“흐흥, 그러면, 그러면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떠들어 볼까요~☆”
이것마저 거절할 필요는 없었기에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안색이 확연히 밝아진 마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주제를 꺼내며 수다를 이어나갔다
…잠시 후
“마나 님, 도착했습니다.”
길고도 짧은 동행의 끝을 알려주는 다니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들과 함께 내린 마나는 개운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작별의 말을 건넸다
“아~ 오랜만에 원 없이 떠들었네어울려줘서 고마워.”
“이쪽이야말로…마나는 이제부터 관광이라고 했지? 재밌게 놀다 와.”
“응!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한껏 즐겨야지이따가 돌아오면 네 동생도 만나볼 겸, 방에 놀러 갈게.”
“이왕이면 과자도 같이 지참해주세요.”
“록시아는 나보다 과자가 더 좋았나 보네? 후후, 더 달콤한 녀석들로 엄선해 올 테니까 미리 기대하고 있어.”
두 여자와 차례대로 손뼉을 맞부딪힌 마나는 내게도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마차에 올라탔고, 마나 일행의 마차는 곧장 시내를 향해 나아갔다
“우리도 올라갈까?”
ㅡ새근새근
방에 돌아온 우리를 반겨준 것은 침대에서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마릴의 뒷모습이었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게 마땅한 도리겠지만,
“밥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깨워야겠지? 언니인 나에게 맡겨두라고프흐흐흐….”
“메림 언니굉장히 신나 보이네요.”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초승달 같은 미소를 머금은 메림은 발 뒤꿈치를 들어 올려 동생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무언가 저지르려는 눈빛이다말려야 할지 살짝 고민했지만 호기심이 이성을 가볍게 억눌렀다.
ㅡ짜악!
“일, 어, 낫!”
“흐끼얏?!”
그녀는 동생의 볼기짝을 젬베 마냥 찰지게 후렸고, 당연하게도 화들짝 놀라버린 마릴은 몸을 크게 펄떡거리며 일어났다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말이다
“크흐흐, 엉덩이가 토실토실해서 그런지 손바닥에 쩍쩍 달라붙네.”
“끄흐으읏…두, 두고 봐….”
언니에게 이를 갈면서도 얼얼해진 엉덩이를 살살 매만지는 마릴의 모습에 피식거린 나는 뒤늦게 웃음을 감추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메림한테 스팽킹 당하기 직전까진 잘 자고 있었죠.”
'보고 있었으면 좀 말려주지….' 라며 작게 투덜거린 마릴은 목을 좌우로 가볍게 까딱거리거나 팔을 빙빙 돌리는 등,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봤다
“뭐랄까…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조금 남아있긴 한데,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 같아요.”
확인차 마릴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재보니, 미미한 열이 남아있긴 하지만 오전과 비교하여 많이 호전됐다
“약이 효과가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이제 슬슬 점심인데 식욕은 좀 있어? 아니면 이대로 더 잘래?”
“헛,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놀란 눈으로 침대에서 퍼뜩 일어난 마릴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같이 먹을 생각인가 보다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마릴의 상태를 고려한 우리는 멀리 갈 필요 없이 숙소 1층에 마련된 식당 구역으로 향했다
* * *
로덴 일행과 헤어진 이후, 콜라드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는 관광을 만끽한 학자와 두 명의 호위는 해가 완전히 저문 밤이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고생하셨습니다선배님, 이 도시의 지리는 대강 파악했으니까 이번엔 제가 맡겨두고 올게요.”
“그래부탁하마.”
“다니르,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이니까 천천히 다녀와도 돼돌아오면 네 방에서 푹 쉬고.”
“예, 마나 님.”
혼자서 마차를 이끌고 역참으로 향한 다니르에게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거린 마나는 세라스와 함께 방으로 올라갔고,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아아~! 오늘 하루는 여러 가지 의미로 충실하게 보냈네도시 관광도 좋았지만 로덴 씨네랑 같이 이야기했을 때가 최고였어덕분에 던전의 단편적인 정보도 듣고, 친구도 사귀게 됐잖아.”
“축하드립니다.”
“흐흥, 고마워좀만 쉈다가 옆방에 놀러 가야지.”
동년배의 여자들과 신나게 떠들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마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방문할 생각이시군요.”
로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세라스의 입장에서 그녀가 호위해야만 하는 사람이 로덴 일행에게 제 발로 찾아가려는 이 상황은 무척 난감하다
“마나 님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까이 대하시면 예상치 못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았어, 알았어이번에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세라스도 나랑 같이 가는 걸로 하면 만사 OK 지?”
“하아아…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닙니다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곤란해하고 있는 게 분명한 세라스의 모습이 재밌다며 빙긋 웃은 마나는 다른 화제를 던졌다
“그런데 말이야, 세라스는 나한테 뭔가 하고 싶은 말 없니?”
“하고 싶은 말이라뇨?”
“으음~ 말을 살짝 바꿔서 물어봐야 하려나세라스, 나한테 뭔가 해야 할 말 없어?”
그 질문을 들은 세라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마나는 지금껏 쭉 끼고 있던 안경을 벗은 채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라스가 먼저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 지금까지 기다려 봤었는데…슬슬 궁금해서 안 되겠더라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후후… 끝까지 모르는 척 하기야? 세라스 너… 로덴 씨랑 구면이잖아'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이제부터 대답은 신중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조금 전까지 실없이 재잘거리던 여자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의 금안은 세라스에게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