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옛 인연 (6)
* * *
난데없이 토사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세라스의 모습에 나하고 록시아는 그 자리에서 마네킹처럼 굳어버렸다
토사물로 난장판이 된 바닥은 가능하다면 모자이크라도 씌우고 싶을 지경, 실수로 그만 내용물까지 확인해버렸다
음… 아침을 사과로 때우는 식습관은 여전한 모양이군
한편, 내 옆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록시아는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모양새다
“마, 맙소사… 저를 보자마자 굉장한 기세로 토했어요.”
하기야 자신을 보자마자 즉석 부침개쇼를 펼치는 사람을 본다면 대부분은 놀라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스의 토약질이 멈추자, 조심스럽게 다가간 록시아는 그녀에게 자그마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이거라도 쓰세요.”
“허억… 헉…!”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세라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고, 다시금 록시아를 마주 보게 됐다
그러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안색이 새파랗게 물들어버린 세라스는…
“우우웁…?”
ㅡ철펏! 철펏!
“꺄아아악! 이, 이 사람 또 토하고 있어?!!”
다시금 바닥을 향해 힘차게 게워내기 시작했고, 기겁한 마족 소녀는 내 뒤로 바짝 숨었다
정황상 구토의 직접적인 원인은 록시아가 확실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마족 공포증이 있는 모양이야손수건은 내가 전달할 테니까 록시아는 조금 더 떨어져 있어 줄래?”
“확실히… 그러는 게 좋겠네요”
적당히 갖다 붙인 이유에 수긍한 록시아를 멀찌감치 피신시켜둔 뒤, 세라스의 상태를 살펴봤다두 번 연속으로 게워내는 거라 그런지 대부분이 헛구역질이다
“하아… 하… 우우우읏….”
인연을 끊은 이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여자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저렇게 안쓰러운 모습을 봐버리니 심경이 복잡해진단 말이지
“괜찮냐?”
등이라도 두드려 줄까 하는 생각으로 손을 뻗었으나 찰싹하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거세게 뿌리친 세라스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 손대지 마!”
ㅡ휘익!
“거, 성질머리 하고는… 그렇게 싫으면 직접 손대지 않을 테니 하다못해 이거라도 써입가에 토를 묻히는 악취미가 없다면 말이야.”
“….”
조금 전에 록시아가 건네주려던 손수건과 함께 던진 비아냥에 수치심을 느꼈는지 얼굴이 붉혀진 세라스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낚아채 입가를 닦았다
“제기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모자라 동정까지….”
아랫입술을 질근거리던 그녀는 옥상 중앙에 있는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히고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개방된 옥상이었구만괜히 벽 타고 올라왔네
“괜찮으세요?”
얼얼해진 내 손을 걱정스럽게 어루만지던 록시아는 세라스가 떠나간 자리를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도와주려던 사람의 손을 그런 식으로 내치고서 사과도 없이 떠나다니…주인님한테 저게 무슨 태도람!”
“난 괜찮으니까 인상 피렴.”
“아흐응….”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뿔을 살살 어루만지자 몸을 흠칫거린 그녀는 금세 순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후우우, 그나저나 주인님아까 전에는 깜짝 놀라서 말하지 못했는데, 그 여자엘프 아니던가요?”
“음, 그렇지엘프는 처음 보는 거려나?”
“네.”
물론 록시아 같은 마족 또한 인간에 비해서 귀가 길고 뾰족한 편에 속하지만 엘프종의 경우는 확연하게 구분이 갈 정도로 더욱 길쭉하다
“엘프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늘씬해서 비율이 좋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인가 봐요그 여자… 성격은 영 별로 같지만 키는 부러워요.”
세라스에 대한 록시아의 평가가 은근히 신랄하다조금 전의 언행 때문에 다소 미운털이 박혀버린 듯하다
여담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라스의 신장은 약 174cm어지간한 성인 남성 부럽지 않은 수준
“너도 그 엘프만큼 커지고 싶니?”
“그 정도까지 바라는 건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자랐으면 좋겠어요막 이렇게….”
까치발을 들어서 키가 커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마족 소녀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프흐흐, 록시아는 그냥 이대로인 편이 귀여워서 딱 좋은 거 같은데.”
“읏… 이럴 때는 기뻐해야 할지 삐져야 할지 헷갈리네요.”
“삐지지는 말아줘슬슬 메림이랑 마릴도 일어날 시간인데 방으로 돌아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멈칫했다
“주인님, 잠시만요.”
그러더니 조금 전에 세라스가 바닥에 남기고 간 토사물 덩어리로 총총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대로 방치하는 건 뭔가 아닌 거 같아서요.”
ㅡ파사삭
웅얼거리듯이 간단한 주문을 영창한 록시아가 마력을 흘려보내자, 토사물 덩어리가 공중에 흩뿌려지며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굳이 치워줄 필요는 없는데.”
“이 정도쯤은 간단하고, 저한테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으니까요마족 공포증이라고 하셨죠? 세상에는 그 정도까지 마족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다 있네요.”
적당히 같다 붙인 핑계인 마족 공포증을 록시아는 정말로 믿어주는 눈치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세라스는 딱히 마족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적대하는 종족으로서 반감을 품고 있는 정도였지단순히 마족과 마주쳤다는 이유로 그렇게 요란하게 토할 리 없어…심지어 두 번 씩이나
“아무튼, 뒷정리도 다 했으니 이제 내려가자.”
“네.”
뭐, 됐다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 나는 록시아의 손을 이끌며 옥상에서 내려갔다
* * *
“끄으으응… 마릴, 좀만 더 당겨줘.”
“이렇게?”
“응, 응훨씬 낫네.”
…방으로 돌아온 로덴과 록시아는 2인 1조 스트레칭으로 서로의 몸을 풀어주고 있는 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보게 됐다
“슬슬 마무리하려던 참에 딱 맞춰서 돌아왔네이른 아침부터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바람 좀 쐬러 옥상에 올라갔는데, 록시아가 따라왔더라고.”
“그래? 일단 밥이나 먹자조금만 더 늦었으면 우리끼리 먹으려고 했다고.”
서로에게 아침인사를 주고받은 로덴 일행은 그대로 1층에 있는 식당 구역으로 내려가 아침을 챙겨 먹기 시작했고, 세 여자는 식사 중에 자기들끼리 이야기 꽃을 피웠다
‘역시 말해야 하려나….’
그녀들을 나직이 바라보던 로덴은 이 자리에서 세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세라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마왕과의 결전 직전, 그를 따라온 토벌대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했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이야기해야만 한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그녀들에게 피로 물든 과거를 드러내자니 선뜻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죠조금 전에 옥상에서 엘프랑 마주쳤어요.”
바로 그때, 쌍둥이 자매와 한창 떠들고 있던 록시아가 세라스를 언급했다
““엘프…?””
쌍둥이 자매는 당연히 흥미를 보였고, 록시아는 옥상에서 겪은 일을 간략히 설명해줬다
“아~ 어제 그 사람이 엘프였구나차림새 하고 체격 때문에 영락없이 남자라고 생각했었어.”
“크흐흡…걸작이구만마족을 봤다고 해서 토하는 엘프라니그나저나 옆방 사람이라면 어제 마주쳤던 학자랑 시종처럼 입은 그 두 사람도 일행일 텐데꽤나 특이한 조합이네?”
‘우리 일행이 할 말은 아니겠지만’라는 뒷말을 덧붙이며 식사를 마무리한 메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 오빠오늘은 마차를 살펴볼 예정이라고 했었지?”
“그래, 앞으로 쭉 타고 가야 할 테니까 최대한 튼튼한 녀석으로 알아보려고.”
로덴 일행이 이 도시에 방문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여행에서 애용할 이동 수단의 구매다여기에 체류하는 기간도 오늘을 포함해 벌써 사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니 슬슬 마차를 골라야 할 때가 됐다
“그럼 이번엔 나랑 록시아도 같이 갈래이런 건 다 함께 보면서 정해야지.”
“따라오는 건 상관없긴 한데…, 여기 지내는 동안 록시아하고 마탑에 드나들면서 새 마법들 좀 배워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흐흥, 오빠랑 마릴이 던전에 다녀오는 동안 알짜베기 마법으로 몇 개 건지고 왔어.”
“아직 연습이랑 숙달이 필요해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준까지는 안되지만요.”
마법을 배운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텐데… 본인들이 저리 말하니 순순히 믿기로 한 로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그러면 넷이서 다 같이 가보자고.”
“저기… 저는 그냥 여기 남아 있을 테니까, 셋이서 다녀오세요.”
“음?”
조심스레 목소리를 낸 마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어날 때부터 몸이 좀 나른하다고 해야 할지…오늘은 방에서 좀 쉬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어제도 가장 먼저 뻗어버리더만, 혹시 감기라도 걸린 거 아냐?”
로덴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릴의 이마에 손을 올려봤고, 미열이 느껴졌다
“…열이 조금 있네.”
진단과 동시에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그는 종이에 싸여 있는 환약을 꺼내 들었다
여행 중에 생길 수 있는 다양한 경우를 대비하여 사전에 마련해둔 약 중 하나다.
“앗, 약을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너 감기 걸려본 적 없지? 이런 건 미리미리 대처해야 나중에 고생 안 해…때마침 식사도 끝난 참이니까 지금 바로 먹자씹는 약이니까 꿀꺽 삼키지 않도록 주의하고.”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로덴의 지시에 결국 따르기로 한 마릴은 그가 쥐어준 환약을 입에 쏙 넣고는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잔뜩 찌푸려진 마릴의 표정이 환약의 맛을 대신 설명해줬다
“조금… 아니, 많이 씁쓸하네요.”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지먹느라 고생했어자, 여기 물.”
“고마워요스승님.”
약을 먹고 나자 훨씬 나른한 표정이 된 마릴을 방으로 바래다준 로덴은 앞으로 타고 갈 마차를 고르기 위해 록시아와 메림과 함께 역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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