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46화 (146/149)

〈 146화 〉 옛 인연 (5)

* * *

사방에 드리운 어둠이 서서히 옅어지려는 이른 새벽

“…….”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로덴은 복잡하고 갑갑한 기분을 억누르며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후우우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크게 내뱉은 그는 내내 손에서 팔락거리고 있던 편지를 다시금 들춰봤다

『동이 트는 시간,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편지의 뒷면을 살펴보면 그리운 이름이 적혀 있다

『한건우』

‘…이거 아무리 봐도 그 여자의 글씨가 틀림없네.’

자로 재듯이 균일하고 깔끔한 필체로 적힌 옛 이름은 못 알아 볼래야 못 알아 볼 수 없다

지금의 로덴이 이쪽 세상의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한, 처음으로 또박또박 읽어본 이쪽 세상의 문자가 그녀가 적고 읽어준 이 이름인데 어떻게 못 알아보겠나

‘이 편지를 건네준 갑옷 녀석이 그녀, 필리아겠지……참, 본명은 세라스던가.’

다시금 생각해보면 체격도 얼추 비슷하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갑옷 차림으로 어떻게 그런 교묘한 미행술을 펼칠 수 있었을까 내심 의문이 들었는데, 언제나 파티의 눈과 귀가 되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납득할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서서히 주변이 밝아지는 것이 태양이 점차 수평선 위로 오르려고 한다머지않아 일출이 다가온다

“슬슬 시간인가일방적으로 건네받은 편지의 지시를 순순히 따라줄 의무는 없겠지만…역시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

결국 옥상에 오르기로 결정한 로덴은 떠나기에 앞서,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세 사람 모두 곤히 자고 있다로덴은 그녀들이 깨지 않게끔 속삭이듯이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돌아오기 전에 그녀들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간단한 쪽지를 남겨둔 로덴은 그대로 방에서 떠나갔다.

다만, 문이 아닌 난간을 통해서

경험상 이런 건물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잠겨있다그렇다면 차라리 벽면으로 올라가는 게 훨씬 수월하고 빠르다

ㅡ사사사삭!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양다리에 마나를 집중시킨 뒤, 벽을 평지처럼 타고 올라타 신속하고 빠르게 옥상에 도달했다

‘그러고 보면 이 응용법도 필리아한테 배웠었지.’

옥상을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반대편에 서있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투구를 벗고 있는 기사다

양 옆으로 튀어나온 길쭉한 귀, 가지런히 묶인 채 살랑거리는 금발의 포니테일… 너무나도 익숙한 뒷모습이다로덴은 눈앞에 있는 인물이 세라스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바로 그때, 수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떠올랐다그 풍경을 바라보던 세라스는 로덴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시간에 딱 맞춰서 왔군건우… 아니, 지금은 로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가썩 어울리는 느낌의 이름은 아니야.”

“겨우 이름이나 평가하려고 이 시간에 불러낸 건 아니겠지? 우리가 그런 걸로 한가로이 떠들 사이는 아닐… 어…? ”

“이까짓 걸로 뭘 그리 놀라고 그래? 하려던 말은 끝까지 하라고.”

다시 마주하게 된 세라스의 얼굴은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외견 이외에 커다란 차이점이 생겼다

“아니면 너도 같이 피고 싶어 졌나?”

“… 난 됐어좀 의외라서 그래.”

절반 이상 태워진, 제법 굵직한 연초를 꼬나물고 있었다발밑을 유심히 보면 다 피운 연초가 두 개 떨어져 있다

ㅡ쓰으으읍…! 퉷!

정정한다이제 세 개다

세라스와 재회하면 일어나게 될 경우를 전날부터 다방면으로 생각했던 로덴이지만,

입에서는 허여멀건 연기를 뿜어내며 방금 막 다 피운 연초를 발로 지지는, 빼도 박도 못할 골초로 변해버린 저런 모습만은 예상치 못했다

‘흠, 흠사람이 담배 좀 필수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고,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건…역시 그거지.’

과거의 로덴은 마왕뿐만이 아닌 용사까지 같이 처리하기 위해 꾸려진 토벌대와 마왕을 말살한 직후, 유일한 생존자인 세라스에게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자신이 마왕과 함께 죽었다는 암시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를 통해 용사의 죽음을 세상에 퍼트리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은거 생활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와 대면하고 있는 세라스가 보이고 있는 저 태연한 반응이 뜻하는 것은…

“암시가 풀려버렸나…이 자리에서 부하들의 원수라도 갚아보시게?”

“널 죽일 생각이라면 번거롭게 따로 만날 필요 없이 자는 틈을 노려서 여럿이 기습했을 거다.”

로덴의 목소리에서 적의가 섞여 나오자, 가볍게 두 손을 들어 올린 세라스는 공격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일단 들어봐, 네 말대로 암시가 차츰 풀리면서 하나둘씩 떠올라버렸다모든 걸 떠올린 순간 내가 느낀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나?”

자조적인 웃음을 보여준 그녀는 품속에서 새로운 연초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ㅡ치이익…!

“후우우….”

익숙한 동작으로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세라스는 희뿌연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마왕이 토벌된 이후로 대략 5년이 흘러갔을 무렵

아티팩트의 영향력이 점차 옅어짐에 따라 암시가 풀린 그녀는 되살아난 기억에 의해 한 달에 걸친 커다란 혼란을 겪었다

이후로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세라스가 세상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살아있을 용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셀 수 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나를 그냥 방치하기로 정했다고?”

“그래, 원래의 계획에서 많이 엇나가 버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용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됐지네가 이대로 과거를 감춘 채 얌전히 지내고 있어 준다면 이쪽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 더 이상 세라스를 신뢰하진 않지만, 그녀에게서 자신을 향한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말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제 와서 날 찾아온 이유는 뭐야?”

“후우우우…딱히 찾아내려 했던 건 아니야모험가 길드에서 우연찮게 너랑 마주쳤어…이렇게 불러낸 건 네 녀석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다.”

연초가 타버린 부분을 탁탁 쳐서 떨쳐낸 그녀는 연초의 끝자락으로 로덴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기억이 떠오른 순간부터 쭉 궁금했다그날… 어째서 나를 살려뒀지?”

“하, 뭘 물어보나 했더니만 그날의 기억이 다 떠올랐다면 알고 있잖아? 알트마의 윗대가리한테 용사를 처리했다고 보고할 사람이 필요했고, 계획의 적임자가 너였어그뿐이야.”

“그건 이유가 안 돼거짓 증언을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대원을 이용하는 게 훨씬 더 안전했을 거다.”

로덴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종족을 상징하는 길쭉한 귀를 매만진 그녀는 말을 이었다

“개인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엘프들은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편이다그리고 네가 아티팩트로 시전한 암시 또한 마법의 일종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풀려버렸지.”

ㅡ퉷! 지이익, 지익!

어느새인가 다 피운 연초를 뱉어낸 세라스는 그것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으며 재차 물어봤다

“네 녀석이 그것조차 예상하지 못할 머저리는 아닐 텐데… 말해어째서 나를 살려뒀지?”

“……….”

논파당한 로덴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짤막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그를 노려보고 있던 세라스는 돌연히 귀를 쫑긋쫑긋거리더니 바닥에 내려두고 있던 투구를 뒤집어썼다

“저기서 누가 올라오고 있군네 일행인가?”

“뭐…?”

로덴은 그제야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말대로 조금 전에 그가 올라왔던 방향에서부터 사람이 올라오고 있는 기척이 느껴진다

서서히 드러난 것은 휘어져 있는 검은 뿔그리고 로덴의 일행 중에 유일하게 뿔을 소유한 인물은…

“주인님…?”

플라이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풍선처럼 둥둥 띄우고 있던 록시아였다

조금전에 로덴이 방을 떠나던 순간, 잠에서 깨어나버린 록시아는 그가 난간을 통해 옥상으로 오르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처음에 그녀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으나 역시 참지 못하고 따라왔고, 지금에 이르게 됐다

주인을 발견하자마자 햇살 같은 미소를 보인 록시아는 그를 향해 쏜살 같이 날아갔다그리고는 힘껏 안았다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록시아, 오늘은 유난히 일찍 일어났네.”

그녀의 난입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로덴은 애교스럽게 얼굴을 부비적거린 록시아의 등을 차분히 쓰다듬었다

포옹을 만끽하고서야 살며시 떨어진 록시아는 시야가 좁아진 탓에 보지 못했던 세라스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챘다

“이분은 누구시죠?”

“…옆방 사람여기서 마주친 김에 잠깐 떠들고 있었어.”

“아, 어제 말씀하신 그 기사분이군요.”

전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맞장구친 록시아는 세라스를 향해 고개를 살며시 꾸벅거렸다

‘왕녀님하고 다니르가 마주쳤다는 마족… 주인님이라는 칭호로 놈을 부른다는 건 역시 이종족 노예인가다른 여자도 끼고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못 보던 사이에 가리지 않고 집어먹는 색골로 변질해버렸군이래서 남자는.’

한편, 투구 속에 숨겨진 세라스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경멸감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마족 소녀를 응시하던 세라스는 언젠가 경험한 적 있는 감각에 점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느낌은 설마…?”

과거에 로덴에게 제압당한 뒤, 알현실에 끌려갔던 세라스는 얼떨결에 용사와 마왕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에 느끼던 마기와 똑같은 기운이 눈앞에 있는 마족 소녀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을 감지한 세라스는 크게 경악하고는 황급히 투구를 벗어던지더니…

“우웨에에엑…!!!”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마왕에 대한 공포심이 터지며 토사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뭐, 뭐, 뭐, 뭔가요?!”

세라스와 록시아,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토사물로 범벅이 돼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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