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44화 (144/149)

〈 144화 〉 옛 인연 (3)

* * *

던전에서 습득한 전리품의 대부분을 처분한 로덴이 마릴과 나란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던전 입장료, 마차비, 그리고 소모한 물자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면… 이번 탐색의 수익은 56실버 30쿠퍼네요.”

“지형 때문에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대형 마물이라 그런지 제법 짭짤하네그나저나 마릴, 빠져나간 돈을 일일이 계산하고 있었구나.”

“이래 봬도 언니하고 둘이서 여행했을 때는 제가 가계를 담당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네가 메림의 지출을 틀어막아 주고 있었구먼.”

“방심할 때마다 언니가 종종 엉뚱한 물건을 집어버리긴 했었죠.”

그는 마릴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단한 놈인데, 도무지 꼬리가 잡히질 않아.’

뒤를 따라오는 녀석이 있기 때문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부터 뒤를 잡혔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에 쌓은 경험과 감 덕분에 추적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챈 상황

동행하고 있는 마릴에게도 말을 아낀 상태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역으로 꾀어내 보려 했지만 상대 쪽의 잠행 능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이만한 능력이면 여자를 목적으로 쫓아오는 놈팽이는 아니겠고, 멀린 놈이 보낸 끄나풀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어어찌 됐든 완전히 뿌리치거나 잡아야겠는데….’

경험상 이 정도 수준의 추적자의 미행을 따돌리는 것은 도시 내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놈을 잡는 것

녀석을 어떻게 끌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마릴이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스승님, 이제 거리는 충분히 둘러본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많이 돌아다니긴 했지.”

미행을 눈치챈 이후부터 여관으로 돌아가는 대신, 적당한 이유를 붙여 약 1시간 동안 도시를 배회했었던 그는 마릴에게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즉시 얼굴이나 행동에 희미한 어색함이 나타나기 마련, 방에 도착한 이후로 미루는 게 더 적절할 것이라 판단했다

‘하기야, 이대로 언제 끝날지 모를 술래잡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지금 묵는 곳도 임시 거처일 뿐이니까 위치가 들통나도 큰 문제는 없겠지.’

만에 하나의 경우에는 예정보다 빠르게 이 도시를 떠나 추적자를 밖에서 처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말대로 여관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에 도착한 로덴과 마릴이 안으로 들어선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연달아 열렸고, 그 소리에 반응하여 뒤 돌아본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인물은 연녹색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엇, 아까 길드에서 봤던 분이다….”

워낙 특징적인 갑옷 덕분에 길드에서 기사와 마주쳤던 사실을 곧바로 기억하며 중얼거린 마릴

“…….”

한편, 기사를 말없이 응시하던 로덴의 마음속은 의문으로 휩싸인 상태였다

‘틀림없어추적자는 이놈이야이런 갑옷 차림인데도 내가 찾아내지 못했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까지 완벽하게 미행해놓고 이제 와서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의도는 대체 뭐지?’

미행에 대한 걸 직접적으로 따져봐야 상대가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니 의미는 없다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노려보고 있으니, 손님들을 지켜보고 있던 여급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기사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학자님이 말씀하신 일행분 맞으시죠?”

“그렇다.”

“돌아오시면 3층에 계신 방으로 안내하라고 하셨거든요절 따라오시죠.”

“그래, 부탁하지.”

마나가 방을 대여할 당시, 그녀에게서 적지 않은 팁을 건네받았던 여급은 최대한 성의를 보이고자 기사의 짐을 대신 짊어졌다

계단으로 향한 여급을 따라가기 시작한 기사는 앞에 서있던 로덴을 지나치는 순간, 살며시 부딪혀 버리더니…

“미안하군.”

기계처럼 딱딱한 어조의 짤막한 사과를 뱉으며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

“3층이라면 저희랑 맞은편 방이네요조금 전에 학자님이 어쩌고 했는데, 호위 용병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지우리도 얼른 방으로 가자.”

“네.”

마릴과 나란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로덴의 손에는 조금 전에 기사와 부딪히던 순간에 은밀하게 넘겨받은 쪽지가 쥐어져 있는 상태였다

* * *

문을 열어젖힌 로덴과 마릴의 시야에 들어온 건 책상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여인의 뒷모습

당연히 록시아와 메림이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즉각 반응한 그녀들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오! 이제야 돌아왔네어서 와.”

메림은 다리를 꼬고 앉은 그대로 반갑게 손을 흔들거렸고,

ㅡ와락!

주인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다가간 록시아는 그의 몸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힘껏 끌어안았다

상당히 적극적인 환영에 눈을 껌뻑거린 것도 잠시, 마족 소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준 로덴은 인사말을 건넸다

“다녀왔어.”

“어서 오세요주인님, 마릴 언니.”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록시아의 얼굴에 자그마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녀는 동글동글한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음? 웬 안경이야?”

“그게 있죠책을 읽는 동안 이걸 끼고 있으면 눈이 훨씬 편해질 거라고 메림 언니가 추천해줘서 사봤어요.”

“우리처럼 수시로 책을 끼고 살아야 하는 지식인들에게 인기 있는 상품이지내가 애용하는 녀석이랑 같은 걸로 골라줬어.”

자리에서 뒤늦게 일어난 메림은 한껏 거들먹거리는 표정과 요란한 동작을 취하며 안경을 착용했다

“어때? 어때? 지적인 여성의 매력이 평소보다 물씬 느껴지지 않아?”

“안경을 끼고 있어 봐야 그런 이상한 포즈랑 표정을 하면 뭔 소용이겠어.”

단호한 대답을 듣게 된 메림은 볼을 잔뜩 부풀렸고, 피식 웃으며 그녀를 가볍게 외면한 로덴은 기대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록시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이 보시기에는 어떤가요? 어울리나요?”

“잘 어울리는구나평소보다 더 똘똘해 보이는데.”

딱히 안경 페티시는 아니지만 록시아가 안경을 쓰고 있는 지금의 모습 또한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귀엽기도 하고.”

“에헤헤….”

덧붙인 칭찬에 배시시 웃은 록시아는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몸을 부비적 거리며 한동안 포옹을 즐겼다

몇 분 뒤, 겨우 자유의 몸이 되어 방에 들어선 로덴은 조금 전까지 록시아와 메림이 앉아있던 책상을 훑어봤다

거기에는 딱 봐도 어렵고 난해해 보이는 내용의 서적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표지에는 마탑 특유의 인장이 찍혀 있다

“…마탑에서 책을 빌려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책 자체가 은근히 귀중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마법과 관련된 지식이 담긴 서적은 특별 취급받는 고가의 물건이다그래서 의외였다.

“나하고 록시아처럼 마탑에서 인정받은 마법사는 일부 책도 빌려 올 수 있거든뭐, 공짜는 아니지만.”

두 남녀가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장비를 바라보던 메림과 록시아는 그것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자잘한 먼지와 풀때기를 팡팡 털었다

“던전에서 돌아온 참이라 그런지 둘 다 꼬질꼬질하네피 냄새도 폴~폴 풍기고.”

“주인님 하고 마릴 언니의 옷과 장비는 저희가 정리해 놓을 테니까….”

“느긋하게… 으음~ 아니지, 아니지후딱 씻고 돌아와.”

그녀들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인 로덴과 마릴은 나란히 욕실로 들어가 원정 중에 축적된 먼지와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고, 순수한 의미로 씻기만 했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우우…!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개운하네요.”

“그러게, 해방감까지 느껴져.”

훨씬 개운해진 표정이 된 두 사람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록시아와 메림의 곁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다시 모인 로덴 일행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 던전과 마탑에서 겪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크흐흐, 그때 록시아가 새로 익힌 마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시전 해버리니까 다른 녀석들이 얼마나 놀라 자빠졌는지 알아? 우리끼리만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고.”

“그래? 마탑에서 순조롭게 배우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말이지, 오늘 아침에는 마족년 주제에 어쩌고 하면서 시비 걸던 새끼를 아주 그냥 작살….”

록시아가 마탑에서 보인 활약상을 신나게 떠들고 있던 메림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중단됐다

ㅡ스으스으…

곁에 있던 동생, 마릴이 어느새인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곯아떨어져 버렸기 때문

“에잉, 이제부터 진짜 재밌는 부분인데언니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잠들어 버리긴.”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던전을 탐색하는 동안 검술 훈련도 병행했으니까 무리도 아니겠지.”

“후후… 주인님? 제 생각에는 그거 말고도 숨겨진 이유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주인의 사타구니를 더듬거리기 시작한 록시아는 붉은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음흉하게 뜨고 있었다

“주인님의 아래쪽에 있는 굵고 뜨거운 검으로 밤의 훈련을 치르게 하셨겠죠? 그러면 이제 저희가 훈련받을 차례겠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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