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옛 인연(2)
* * *
진입한 도시를 한동안 활보하던 마차는 3층 높이의 건물 앞에서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완전히 정차했고, 다시금 투구를 뒤집어쓴 세라스와 여학자가 순서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팡팡, 엉덩이를 가볍게 털면서 건물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던 마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흐흥~ 가까이서 보니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느낌이야. 좋아, 좋아. 콜라드에서 머무는 동안은 여기서 단란하게 지내보자고.”
“거참, 또 느낌 타령이시네. 적어도 숙소 문제는 안에서 둘러본 다음에 정하셨으면 하는데….”
“다 들려. 다니르, 투덜거릴 거면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줄래?”
마부석에서 말들을 달래주던 바가지 머리 청년, 다니르의 작은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마나는 한마디 툭 던지고서 여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라스는 다니르의 어깨에 손을 얹어 말을 건넸다.
“하루 종일 몰고 다니느라 고생했다. 나는 마차도 맡겨둘 겸, 길드에서 던전 입장 절차를 밟고 오마. 마나 님께는 조금 전에 말해뒀으니 굳이 전달하지 않아도 돼.”
“참, 선배님은 이 도시 지리를 알고 있다고 했었죠?”
“세월이 좀 지나서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주요 건물 위치는 기억하고 있어. 아마 모험가 길드도 내가 생각하는 장소에 있겠지.”
“엘프족인 세라스 선배님이 세월이라고 말하니까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ㅡ꾸드득…!
“그으읍!!”
“네 녀석은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내뱉어서 항상 문제야.”
생각나는 데로 나불거리는 다니르의 어깨에 올려진 세라스의 손에 적지 않은 힘이 들어가자, 그는 말을 도로 삼키게 됐다.
“마나 님은 그 사이에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군. 더 늦기 전에 빨리 따라가. …혹시나 해서 거듭 말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분 곁을 계속 지키고 있도록.”
“끄으으…. 예, 당연하죠.”
그 대화를 끝으로 세라스와 잠시 헤어지고서 여관으로 들어선 마나와 다니르는 그들을 정중히 맞이한, 정장 차림의 관리자에게 남은방의 유무를 물어봤고, 다행히도 긍정정인 답변을 들었다.
“현재 2층과 3층 방이 하나씩 남아있는 상태입니다만… 어느 방에 묵으시겠습니까?”
“둘 다 빌릴게요!”
시원시원하게 결정하며 닷새 치의 대금을 지불한 마나는 조금 뒤에 갑옷을 차려입은 일행이 돌아오면 자기들 방 위치를 알려주라는 말과 함께 약간의 팁을 넘기고는 바로 올라갔다.
그녀는 2층에서 3층으로 오르려는 계단에서 고개를 휙 돌려 자기를 따라오고 있던 다니르을 쏘아봤다.
“나하고 세라스가 쓸 방은 3층, 네가 쓸 방은 이쪽층 이니까 그만 따라오지 그래?”
“농담도 참… 만에 하나를 위해 저희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곁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수도의 여관에서 걱정도 팔자야. 방 구경 정도는 나 혼자 여유롭게 하고 싶다고.”
ㅡ짝, 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가볍게 부딪친 마나가 한 마디 덧붙였다.
“세라스한테는 너랑 계속 같이 있었다고 내가 잘~ 말할게.”
“제가 거짓말을 못해서 문제입니다. 만에 하나 들켜버리면 여러 가지 의미로 모가지라고요. 모가지. 제 밥줄 끊지 말아주십쇼. 제발.”
자기 목을 긋는 동작으로 간청하는 다니르를 바라본 마나는 입가를 가린 채 잠시 키득거린 뒤, 표정을 갈무리하며 자비를 베푸는 목소리를 냈다.
“흐흥,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따라와도 좋아.”
“후우우….”
차라리 마차를 모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간 다니르는 마나와 함께 3층으로, 그녀와 세라스가 며칠간 머물게 될 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크고 널찍한 방은 온갖 가구와 욕조등의 편의성이 모자람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여관은 이런 느낌이구나~ 여기도 영 수수한 감이 없잖아 있으니, 적절한 데코레이션이 필요하겠어.”
한동안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둘러본 뒤에 간결한 평가를 내린 마나는 둘러매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크고 작은 유리병들을 방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병에는 유니콘의 안구, 그리폰의 부리, 만티코어의 독꼬리 등등… 온갖 희귀한 마물의 신체 일부가 포르말린에 절여져 있다.
…잠시 후.
“후~ 우우. 이걸로 완벽해.”
자기만의 수집품으로 장식된 방을 다시금 둘러본 마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으윽, 징그러워. 이런 고깃덩이들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참… 이 컬렉션만은 앞으로도 평생 적응하지 못하겠네.’
그녀 하고는 달리, 곁에 있던 다니르는 벌써부터 속이 매스꺼워졌다.
“어때? 다니르, 조금 전의 밋밋한 풍경보다 지금이 훨씬 개성 있지 않아?”
“예, 예, 예, 그렇네요. 확실히 ‘개성’ 은 엄청나죠.”
나름 만족스러운 대답에 방긋 웃은 마나는 이번 여행의 결정적 계기가 된 물건을, 공룡의 살점이 담긴 유리병을 바라보며 두꺼운 안경 너머의 눈을 빛냈다.
“신종 드레이크가 가득한 던전이라니 걔네들을 직접 만나볼 상상만 해도 두근거려. 거기로 진입하면 에스코트 부탁할게.”
“마나 님의 취미에 공감은 못하지만, 뭐……. 맡은 일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저하고 세라스 선배만 의지하십쇼.”
“응, 응. 믿음직스럽네.”
이후로 한동안 두 사람은 난간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잡담을 나눴고, 방에만 있기 따분해졌다는 마나의 변덕에 의해 다시 밑으로 내려가게 됐다.
“어머?”
그렇게 3층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마주친 일행이 있었으니,
풍만한 상체를 반쯤 드러내는 대담한 로브를 입은, 마법사로 보이는 인간 여성과 눌러쓴 후드 아래에 솟아오른 뿔이 인상적인 마족 여성.
“…….”
“…….”
두 일행은 서로 눈인사만 적당히 주고받으며 지나쳤고, 마나는 그녀들이 자기네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와우, 둘 다 미인이네.”
“3층의 특실은 두 개뿐이라 했었죠? 저 마족은 마법사가 데리고 다니는 노예일까요?”
인간의 도시에서 생활하는 마족은 누군가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에 다니르는 적당한 추측을 던졌다.
“아마도 아닐 거야. 둘 사이의 느껴지는 공기라던가, 눈빛이 노예의 그거랑은 전혀 다르거든.”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는 조금 전에 눈여겨봤던, 마족의 미모와 머리에 솟은 뿔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뿔이 정말 예쁘더라. 걔 이름은 뭘까나? 가능하다면 저 마족의 뿔도 내 컬렉션에 추가하고 싶은데.”
“!”
소유욕을 어김없이 드러내는 마나의 말에 화들짝 놀란 다니르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마나 님! 아무리 마족이라도 그런 짓을 하시면…!”
“아이, 농담이야. 농~담. 뭘 그리 진지하게 놀라고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마나 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도저히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 없으니까 그렇죠.”
“나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성격 아니잖아. 가던 길이나 가자고.”
겉으로는 미련 없다는 태도를 보여준 마나는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저 마족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 * *
한편.
던전에서 폐광촌으로, 폐광촌에서 콜라드로….
마릴과 함께 별 탈 없이 도시에 되돌아온 로덴은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에게 귀환 보고를 올리는 동시에 가까운 시일에 다시금 던전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던전에 세 번 연속 진입하시겠다니, 정말 괜찮으시겠나요?”
“괜찮소. 절차상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자리는 남으니까 문제는 없어요. 단지 조금 놀라서 그렇죠. 거기에 세 번 연달아 들어가는 모험가 파티는 거의 없거든요. 아무튼, 여기 읽으시고 서명해주세요.”
접수원에 보여준 문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던전 내부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길드는 일절 책임지지 않지만, 습득하는 모든 전리품은 모험가의 소유물로 인정되며 던전을 공략할 경우 던전 현상금 5골드를 지급한다. ……라고.
“다음번에 몇 명이 들어갈지는, 일행과 상담해서 정하고 다시 오겠소.”
“알겠어요. 인원당 5실버가 필요하다는 점. 명심해주세요.”
“예.”
모험가 길드의 인력을 동원해서 던전 주변을 안정화 및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곳을 이용하기 위한 수수료를 내야 한다.
접수원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로덴은 마릴을 앉혀둔 대기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다리느라 지루했지?”
“아뇨, 딱히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걸요. 그나저나 스승님, 저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고개를 돌린 마릴은 로덴의 바로 다음 차례로 접수원과 이야기하고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향했다.
보이는 건 연녹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 그는 허리춤에 검을, 등에는 활과 화살받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모험가들 보다 장비가 유난히 좋네요.”
“무기하고 방어구 모두 흠잡을 데 없긴 하네. …저런 차림새라면 기억 못 할 리 없는데, 지금까지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보던 사람일려나?”
기사의 장비를 평가하던 로덴은 조금 전에 접수처에 있을 때 뒤에서 느껴지던 시선을 떠올렸다.
‘아까 전에 저 양반이 나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자의식 과잉인가.’
단순한 기분 탓으로 넘어간 로덴은 그대로 마릴과 함께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수고가 많군, 그러면 이만 실례하지.”
접수처에서의 볼일을 끝마친 기사, 세라스는 접수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주시하고 있던 로덴과 마릴의 흔적을 타고난 추적술을 발휘하여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자칫 복귀가 많이 늦어질지도 모르겠지만……꼭 확인해야 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