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옛 인연
* * *
ㅡ쿠구구구!!
한 마리의 생물이 달리는 것만으로 주변의 나무와 수풀이 흔들리고 땅이 마구 울린다.
살아있는 자연재해를 목격하는 기분이다.
‘옛날에 봤던 괴수 영화의 한 장면이 아른거리네.’
육중한 몸집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속도로 맹렬하게 접근하고 있는 티라노를 보며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재빠르게 칼을 꺼내든 로덴은 마릴을 슬쩍 곁눈질했다.
현재 그녀의 실력으로 저 녀석과 싸우게 하다가는 십중팔구 당하겠지.
“혹시 모르니까 멀찍이 물러나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잘 봐 두고.”
“……네.”
달려오는 중인 티라노의 모습을 보며 상대방과의 힘의 격차를 몸소 체감하고 있었던 그녀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나로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겠구나….’
충분히 거리를 벌린 마릴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로덴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웃어넘겼다.
‘납득은 하더라도 은근히 분하다는 표정이구만.’
그녀를 가르치는 입장으로서 상당히 건전한 현상이다.
제자가 월등히 강한 적에게 두려움을 품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발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녀를 위해 몇 마디 건네주고 싶었으나, 이미 티라노가 사정거리까지 접근한 상황. 한가로이 떠들 여유는 없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돌진하고 있는 티라노의 공격을 측면으로 회피한 로덴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녀석에게 칼을 휘둘렀다.
촤아악! 살이 쭉 갈라지면서 피가 사방에 튀긴다. 훌륭한 카운터를 먹였지만 로덴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기분이다.
요란하게 피가 튀기만 했지, 실상은 얕게 베였다.
덩치가 커다란 적을 검으로 상대하는 몇 가지 요령을 제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약간의 힘 조절을 했다지만 방어력이 예상을 웃돌았다.
“생각보다 가죽이 질긴데.”
출혈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티라노는 굵직한 꼬리를 둔기처럼 내려치며 공격을 이어나갔다.
ㅡ후우웅! 콰직!
꼬리가 지면과 충돌하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마구 울렸고, 신속하게 피한 로덴이 있던 자리는 움푹하게 파였다.
‘이만한 위력이라면 어중간한 수준의 전사는 한방에 골로 가겠어. …마릴을 뒤로 물려두길 잘했군.’
거대한 꼬리는 바닥에 박힌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 지형을 쓸어내며 다시금 적을 노렸다.
중간중간에 놓여있던 온갖 두터운 식물들은 엄폐물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꼬리에 휩쓸린 채 지푸라기 마냥 스러진다.
그냥 맞아주기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힘이 담긴 꼬리는 회피하기 난해한 각도와 속도로 로덴에게 다가왔다.
뭐, 피하려고 한다면 아주 못 피할 것은 없겠지만… 굳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나.
로덴은 조금 전보다 더욱 날카로운 마나를 담은 검격을 휘둘러 티라노의 꼬리를 말끔하게 절단했다.
쿠웅! 두툼한 살덩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땅이 흔들렸고,
ㅡ크와아아아악!!!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족 이외에의 생물에게 부상을 당해버린 티라노는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과 분노로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맨 처음보다 훨씬 난폭한 기세로 돌진했다.
보면 볼수록 순수한 신체능력은 확실히 수준급이지만…
‘결국에는 똑같은 패턴으로 돌아왔군. 모처럼 보는 공룡, 그것도 티라노랑 제법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라 나름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짐승인가.’
기대치가 지나치게 컸나 보다.
이제 패턴은 충분히 봤다. 땅을 박차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로덴은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는 티라노를 향해 검을 세웠다.
노리는 부위는 목. 더 이상 길게 끌 것 없이 일격으로 깔끔하게 끝낼 요령이다.
ㅡ후우웅!
검이 티라노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몸을 크게 비틀은 녀석이 참격을 회피했기 때문에 일격에 끝내지는 못했다.
“한 번 당한 덕분에 내 공격에 반응할 수 있게 된 모양이군. 마물을 상대로 헛방질을 한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놈은 로덴의 공격을 피한 것뿐만이 아니라 반격까지 시도했다. 내심 놀랐다.
육중한 몸뚱이로 짓누르려는 티라노의 육탄공격을 높이 뛰어서 피한 로덴은 그대로 녀석의 목을 베어냈다. 이번에는 빗나가는 일없이 적중했다.
쿵! 티라노의 거대한 머리가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마릴이 로덴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수고의 말과 함께 수통을 꺼내 들었다.
“고마워.”
몸을 움직인 직후에 마시는 물이라 그런지 유난히 상쾌하다. 목을 축인 로덴이 티라노를 해체하기 위에 녀석의 사체로 다가가자, 옆에 있던 마릴도 작업을 거들겠다고 했다.
“혼자서도 괜찮은데.”
“저 혼자만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한걸요.”
저렇게 말하니 무작정 말릴 수 없는 노릇, 둘이서 함께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이 구역에 있는 드레이크의 경우는… 가죽 하고 힘줄이 주로 취급된다고 했던가요?”
“그래,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 최대한 질 좋은 부분을 추려내서 챙겨야지.”
두툼한 힘줄을 요령 좋게 끄집어낸 로덴이 시험 삼아 힘껏 당겨보니 팽팽히 당겨지다가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당기는 힘을 느슨하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신축성을 보여줬다.
이만하면 오우거의 힘줄과 버금가는 수준이다.
‘상등품 활시위라던가 현을 만드는 재료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
뿐만 아니라 가죽의 상태도 양호하니 상당히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잠시 후, 해체작업을 끝내고서 짤막한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사체 냄새에 이끌린 청소부들이 모이기 전에 냉큼 자리를 비웠다.
로덴과 나란히 터벅터벅 걸어가던 마릴은 문득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로덴의 모습을 번갈아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작업했는데, 저희 둘 다 피투성이가 돼버렸네요.”
“그러게. 평소에는 메림이나 록시아가 써주는 클린으로 바로바로 해결했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서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피비린내가 후각을 은근하게 자극했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물가가 없었으니 씻을 수 없는 노릇, 그대로 탐색을 이어나갔고, 두 사람은 크고 작은 육, 초식 공룡들과 마주쳤다.
지금껏 마주친 다른 공룡들과 마찬가지로 덤벼들려고 하다가도 거리가 가까워지면 화들짝 놀라더니 허겁지겁 도망가버린다.
“…….”
녀석들에서부터 자신의 손바닥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내린 로덴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 핏자국을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몸에 배인 피 냄새 때문에 도망가는 모양이네.”
“? 피 냄새를 맡은 마물은 훨씬 더 저돌적으로 덤벼들지 않던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만 피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위압감을 느껴버리는 경우도 있거든.”
조금 전에 봤던 티라노의 모습을 떠올린 마릴은 수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녀석이 이 구역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겠지. 놈의 피를 뒤집어쓴 덕분에 사소한 전투를 쉽게 피하게 됐어.’
도망치는 적들까지 구태어 잡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로덴은 이 구역에 서식하고 있을 다른 티라노들을 사냥하는 것을 목적으로 길을 나아갔다.
이곳의 다음 계층은 상당히 높은 확률로 보스 구역이니 될 수 있다면 이번 탐사를 통해 그곳으로 진입 및 공략할 생각이다.
* *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던전 바깥의 세상에서는….
ㅡ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절제된 화려함을 갖춘 이두마차가 힘찬 말굽 소리를 울리며 가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
후드를 푹 눌러쓴 모양새로 마차를 몰고 있던 이는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 콜라드의 성문을 보자마자 저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왔다.
“이게 하론의 수도인가… 마나 님의 고집 덕분에 기어코 여기까지 와버리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원.”
중얼거리면서도 서서히 속도를 줄인 그는 성문 앞에서 마차를 세웠고, 인근 경비병이 검문을 위해 다가오자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것은 갈색 바가지 머리를 한 순박한 인상의 청년.
“하하… 다들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는 너스레를 지으며 경비병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젊은 마부 구만.”
“절차상 마차 안을 좀 확인해야겠네. 서로 피곤하지 않게 검문에 협조해 주면 고맙겠군.”
“얼마든지요.”
고개를 끄덕인 청년이 등을 돌렸을 때 문은 진작에 열려 있는 상태였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길게 땋은 푸른 머리가 어울리는, 학자풍 차림의 안경녀와 연녹색 갑옷을 착용하고 있던 장신의 기사다.
“끄으으읏~! 여기가 콜라드 맞아?”
“…네, 마나 님. 제가 기억하고 있는 콜라드의 풍경하고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구나. 던전은 아직 무사하겠지?”
정황상 마나라고 불린 안경녀가 일행의 중심이고,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이라 판단한 경비병은 만약을 대비해 말을 높였다.
“일행은 이렇게 세 사람이 전부입니까? 신분증을 보여줬으면 합니다만….”
“예, 예.”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신분증을 보여준 마나는 자신들이 이웃나라 알트마 출신 학자와 호위며 이 도시에서 반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던전의 생태조사를 위해서 방문했다고 설명해줬다.
“……문제 될만한 물건은 없군요.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콜라드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학자님.”
“호호, 수고하세요.”
짤막한 검문이 끝나자 청년은 마부석으로, 학자와 호위기사는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곧바로 움직인 마차는 도시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흐음, 시내 쪽은 외곽에 비해서 많이 변했군요.”
창틀을 통해 도시 내부를 감상하던 기사가 투구를 벗으니 금발벽안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고,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마나가 습관적인 동작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긴 하지만 세라스만 계속 가리고 다니게 하니까 뭔가 미안해지네.”
세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성의 정체는 마왕과의 사투끝에 사망했다고 세간에 알려진 용사의 동료이자 파트너로서 같이 모험했던 과거가 있는 엘프다.
그녀는 길쭉한 귀를 쫑긋거리며 학자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저도 이러는 게 더 편하니 괘념치 마십시오. 왕녀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