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야생 (8)
* * *
“어우야… 문을 열자마자 약 냄새가 폴폴 진동하고 있네. 이왕이면 환기라도 좀 하면서 해.”
“그래? 익숙해져서 못 맡고 있었나 보네. 아무튼, 마탑주하고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거야?”
여기저기에 장식품처럼 널려있는 약초들을 보며 가볍게 손부채를 휘적거린 메림은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활짝 열고는 로덴의 질문에 대답했다.
“별건 없고, 못 본 동안 우리가 겪은 일들을 좀 듣고 싶다고 하더라.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간단히 썰 좀 풀었지. 그다음에 테라 영감님은 록시아랑….”
쌍둥이 자매는 시선을 록시아에게 돌려서 설명을 대신하게 했고, 그녀는 마탑주에게서 치른 테스트의 과정과 결과를 간결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법사 신분증을 받으려면 사, 나흘 정도는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주인님.”
가죽 세공 가게에서 가방이 만들어지는데 걸린다는 날짜와 얼추 비슷한 기간이다.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그는 거리를 좁힌 록시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시험 치르느라 애썼어. 록시아, 장하네.”
“에헤헷….”
마족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도 그녀에게 들은 시험의 내용에 의외라는 감상평을 꺼낸다.
“요즘에는 인간 사이즈의 골렘까지 다 있군. 인공 마물하고 싸움을 붙이다니… 마법사 시험은 질의응답이나 문제 풀이 같은 느낌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메림, 네가 치른 시험도 저런 느낌이었어?”
예상과 다르게 메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마탑의 인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과정은 로덴 오빠가 상상하는 거랑 비슷해. 마법의 기초에 관한 주제로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은 다음에 시험자가 사용 가능한 마법들을 선보이게 해서 대략적인 역량을 파악하는 거지.”
“음? 그러면 록시아가 오늘 치른 건?”
“아무래도 테라 영감님이 록시아의 실력을 살짝 떠본 모양새야. 같이 돌아오는 길에 얘한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됐어.”
마탑주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제자. 메림이 데려온, 더군다나 마족 출신인 록시아에게 적지 않은 호기심이 동했다는 것이 그녀의 추측이다.
“그 할아버지의 의도야 어찌 되었든 무사히 통과했고, 저도 나름대로 즐거웠으니 이제 와서는 별 상관없어요.”
결과가 좋았으니 그러려니 한 록시아는 로덴이 손보고 있던 약재와 도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음, 그것보다 주인님. 작업하시던 게 조금 남은 거 같은데 저도 같이 도울게요.”
마음만 받겠다고 말하려다가도 일행들이 돌아온 상황에 방에 약품들을 계속 늘어뜨리는 것도 모양이 안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록시아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그러면 부탁할게. 록시아, 거의 다 끝낸 참이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네, 주인님.”
“저랑 메림은 그동안 씻고 올게요. 스승님.”
“우리처럼 약초학이 없는 문외한이 어중간하게 도우면 더 꼬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이따 봐~”
몇 마디 더 주고받은 쌍둥이 자매는 욕실로 발길을 돌렸고, 로덴과 록시아는 약품 조제 작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록시아는 집에서 지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주인님하고 작업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포션 가게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 같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만들어야 할 게 딱 하나뿐이라서 그때보다 많이 간소화됐지만.”
“떠나기 전에 상당히 많이 챙겼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겨우 한 달만에 거의 다 떨어져 버렸네요. …피임약.”
현재 주인과 함께 만들고 있는 약이 무엇인지 굳이 입에 담은 록시아는 한가득 챙겼던 피임약의 대부분을 소모할 정도로 수 없이 몸을 섞은 나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젠 밤마다 몸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서로 적지 않은 허전함마저 느끼게 될 지경.
“만약에… 할 때마다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저하고 언니들 세 사람 모두 생겨 버렸겠어요. 주인님♡”
ㅡ후욱!
눈을 게슴츠레 뜬 록시아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선을 넘은 이후로 단 둘이만 있을 때마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유혹한다.
“크흠, 큼! 일단 지금은 작업에 집중하자.”
“후후, 네.”
로덴은 마족 소녀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마무리에 집중했다.
호흡이 잘 맞는 조력자 덕분에 작업은 몇 분 걸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면서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해 나간다.
이윽고 모든 정리를 끝마친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록시아가 주인을 올려다보더니,
“주인님, 내일부터는 날마다 마탑에 가보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이유 먼저 듣고 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니 마탑주에게 허가를 받게 된 덕분에 마탑의 인원만 드나들 수 있는 서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했고, 록시아는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을 드나들며 마법 지식을 다방면으로 쌓고 싶다고 한다.
“록시아가 거기서 배우고 싶다면야 그렇게 해도 좋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혼자서 다니지 말고, 동행자를 데려가야 해. 이유는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마족인 그녀가 혼자서 인간의 도시를 돌아다닌다면 귀찮은 날파리가 꼬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는 록시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님이 그리 말씀하실 거 같아서 메림 언니한테 미리 이야기했어요.”
“드나드는 장소가 마탑인 걸 생각하면 같이 갈만한 사람이 메림밖에 없긴 하네. 걔가 네 보증인 이기도 하고 말이지. …알았어, 내일부터 메림하고 같이 돌아다니도록 해.”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보다 더 발전하고자 하는 향상심을 품고 있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힘이 없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까지 위험에 빠지는 일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거겠지. 더군다나 록시아는 그 녀석, 에스카로스를 어떻게든 구하고 싶어 하는 눈치고 말이야.’
잠재 능력을 깨우친 록시아가 지금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대강 짐작한 로덴은 일전에 겪은 습격의 주역 중 한 명이자, 과거에 록시아와 인연이 있는 마족인 에스카로스를 떠올렸다.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녹슬었다지만 자신과 정면으로 싸워서 끝내 우위를 점한, 현 마계국의 일인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실력자다.
‘에스카로스가 록시아를 처리하는 대신에 마계국으로 데려가려던 순간부터 멀린 놈이 본색을 드러냈었지. 이후에는 조종이라도 하는 것같은 모양새였는데….’
중간부터 꼭두각시처럼 변해버린 에스카로스의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원흉이 멀린에게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다.
이쪽에서 그쪽을 찾아가든, 반대로 그쪽에서 이쪽을 찾아내든, 언젠가는 다시 대면하게 될 것이며 확실한 결착을 내야 한다.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여행의 과정에서 록시아는 최대한 힘을 키우고, 로덴은 예전 실력을 조금이라도 더 되찾아야 할 것이다.
로덴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사이, 쌍둥이 자매가 방으로 돌아왔고, 이날도 어김없이 넷이서 함께 밤을 보냈다.
* * *
다음날.
로덴과 마릴, 록시아와 메림. 이렇게 두 명의 검사와 두 명의 마법사로 딱딱 나뉘게 된 일행은 전날 밤에 미리 이야기한 대로, 각각 던전과 마탑을 목적지로 하여 잠시 헤어졌다.
제자 마릴과 함께 마차에 올라, 폐광촌에 도착한 뒤에 던전 입구 앞에 섰을 때….
“두 명이서 여기에 들어가겠다니…. 데이트할 장소를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괜찮겠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렸고, 여기의 대표로 보이는 모험가가 로덴과 마릴에게 다시금 확인하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이 던전에 서식하는 변종 드레이크(공룡)의 전반적인 신체 능력은 마물로서 중상위권에 속했기에 고작 두 명이서 던전에 도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끼리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서 들어가는 거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선택은 본인들 몫이니까. 알아서 잘들 하라고.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살아서 돌아오고 싶다면 3계층까지만 탐사하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고맙군. 수고들 해.”
그래 봐야 로덴의 눈높이에서 단순히 덩치 큰 도마뱀 수준이라서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입구를 지키는 모험가들을 지나치며 일그러진 균열을 통과한 두 사람은 공룡들이 서식하는 백악기 배경의 던전에 다시금 발을 들였다.
‘어쩌다 보니 마릴하고 단 둘이서만 입장하게 됐지만, 얘한테도 나한테도 수련의 개념으로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더 적절하겠군.’
여전히 울창한 정글지대를 나아가기에 앞서 검을 빼든 로덴은 허리춤까지 올라와 있는 빽빽한 수풀들을 석석 베면서 나아갔다.
두 사람이 지나간 길에는 키 큰 풀들이 우수수 눕게 됐다.
“저번에는 탐색한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돌아다녔지만 이번에는 빠르게 진행할 거야. 잘 따라와, 마릴.”
“스승님. 첫날부터 3계층에 들어선 것도 굉장히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이고, 벌써부터 말대답은. …가자.”
“네.”
단독으로 배회하는 공룡과 마주하면 마릴 혼자서 싸우게 하고, 무리와 마주할 때는 같이 싸우면서도 그녀가 적당히 애먹을 정도로만 적들을 떠넘기는 식으로 최대한 전투 경험을 쌓게 했다.
지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데다가, 로덴의 무력을 바탕으로 저돌적으로 나아간 덕분에 두 사람은 날이 어둑해지기도 전에 네 번째 구역에 들어섰다.
ㅡ쿠워어어어어!!!
게이트를 통과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흉포한 울음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은 딱 마주친 로덴과 마릴을 내려다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 이 녀석이 4계층에 주로 서식하는 드레이크네요. 이렇게 직접 보니까, 입구를 지키던 사람들이 3계층까지만 탐사하라고 경고한 게 저절로 납득이 가요.”
적을 올려다보며 상당한 위압감을 느낀 마릴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먹잇감으로 인지한 두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공룡은 과장 하나 없이 집채만 한 크기인, 어림잡아 5m는 되어 보이는 듯한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으며 폭력을 육체로 형상화시킨 것처럼 톱니 같은 이빨이 드러난 주둥이와 온몸에 꽉 찬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녀석의 정체는 육식 공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른바 폭군 도마뱀이라는 뜻을 가진 「티라노사우르스」다.
여담으로 모험가 길드에서 녀석은 산의 폭군이라는 오우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의 수준인 마물로 측정되어 있는 상태다.
이놈 하나를 잡으려면 숙련된 은 등급 모험가 여럿이 합을 맞추거나, 기사단 급의 무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난이도가 갑자기껑충 뛰었구만. 이만한 녀석이 보스가 아니라, 일반 마물로서 4계층을 활보하고 있는 던전이라면 여기를 반년 넘게 공략하지 못한 게 썩 무리도 아니었겠어.’
ㅡ크와아아악!!
로덴이 속으로 납득하는 동안에도 티라노는 아가리를 쩍 벌리며 재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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