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야생 (6)
* * *
마탑에서 전달받았다는 편지를 모두 읽은 메림은 그것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여관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이걸 건네준 마법사가 남겨둔 말이 따로 있던가요?”
“마법사 아가씨들이 돌아오는 데로 최대한 빨리 건네주고, 어느 시간대라도 상관없으니 마탑의 사람에게 그 편지의 뒷면에 새겨진 인장을 보여주면 바로 안내인을 붙이겠다고 하던데요.”
“아아, 예. 전해줘서 고마워요.”
여관주인과의 대화를 적당히 끝마친 메림은 일행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요약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탑주랑 만날 수 있다는 뜻인가? 마탑에 신청서를 제출했을 당시에 최소한 나흘은 걸릴 거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만, 아직 이틀이나 남은 상황에서 이런 편지를 보낸다라… 마탑주가 그렇게 한가로운 위치는 아닐 텐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과 장비들을 정리하면서도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편지의 내용을 곱씹은 로덴은 의문이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아하하… 로덴 오빠, 나까지 지명한 걸 보니까 이거 아무래도 테라 영감님이 신청서에 적힌 내 이름을 기억해 버린 거 같네.”
어렴풋이 짐작 가는 바가 있던 메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로덴의 의문을 해결해주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테라 영감님?”
“조금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르테라 마로크 영감님. 이 도시의 마탑주 되는 사람의 풀네임이야.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일단 그 영감님한테 이거 저거 배웠었거든.”
“엇, 그러면 메림 언니가 마탑주님의 제자였다는 말씀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록시아는 물론, 로덴도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메림을 바라보자, 그녀는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니, 아니, 아니. 제자라고 불릴 정도로 거창 한 건 아니고 마탑에 다녔을 당시에 테라 영감님한테 다른 마법사보다 조금 더 관심을 받은 정도야.”
“세간에서는 바로 그런 걸 제자라고 불러. …아무튼간에 지인이라는 소리구만.”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 메림은 록시아를 향해 편지를 팔랑거렸다.
“록시아는 어떻게 하고 싶니? 원래 생각했던 일정보다 많이 빨라졌지만 이대로 마탑으로 가볼까?”
“으음… 네, 메림 언니만 괜찮다면 이대로 마탑으로 방문해서 최대한 빨리 마법사 신분증을 빨리 받고 싶네요.”
각자 신분증이 될 물건을 갖고 있는 로덴과 쌍둥이 자매와 달리, 유일하게 신분증이 없었기에 여행 중에 크고 작은 불편함을 여러 차례 겪었던 록시아는 이대로 곧장 마탑으로 향하기로 했다.
조금 전에 던전에서 귀환한 참이지만 아직은 해가 중천에 있는,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체력도 충분히 남아있다.
각자의 짐과 장비를 숙소에 내려둔 뒤, 순서대로 씻고 나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일행은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다녀올게요. 주인님.”
“록시아, 내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만 메림하고 떨어지지 않게 잘 따라다니거라.”
“네!”
“저녁때 다시 봬요. 스승님.”
“이따 봐, 로덴 오빠.”
“잘 갔다 와.”
다만, 지금까지 넷이서 행동했던 것과 달리. 세 여자와 로덴은 따로 움직이기로 한다.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의 목적지는 마탑이고, 혼자서 거리를 나아가기 시작한 로덴은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을 처분하기 위해 가죽이나 뼈 소재를 주로 다루는 공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거리를 성큼성큼 돌아다닌 로덴이 도착하게 된 곳은 비교적 왕래가 적은 자리에 자리 잡은 마물 소재 세공점을 겸한 방어구 가게.
규모는 그냥저냥 평범하다.
“계십니까.”
“어서 옵셔~!!”
조용한 인사말과 함께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인 로덴이 마주한 주인장은 온몸에 풍성한 적갈색 털이 시선을 사로잡는 수인 부부였다. 참고로 둘 다 실눈을 하고 있는 여우의 모습이다.
ㅡ킁킁….
손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습관적으로 코를 벌름거린 여우 부부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번뜩이며 순차적으로 말을 건넸다.
“오오, 이 냄새는…! 자네, 폐광촌의 던전에 들렀다 오는 길인가? 변종 드레이크의 피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군.”
“모두 수도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 방문한 지 얼마 안 된 분인가 보네요.”
몸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잔향만으로 특유의 채취를 포착한 여우 부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내려놓은 로덴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공룡에게서 갈무리한 전리품들을 바닥에 전시하듯이 올려두었다.
“예, 이 가게에서 드레이크의 소재를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몰라도 잘 찾아왔구먼. 그런데… 녀석들의 가죽이랑 뼈가 산더미로군. 도대체 몇 명이서 이만큼이나 사냥해온 겐가?”
“네 명이서 사냥한 결과죠.”
“허, 겨우 네 명이 이렇게 많이 잡았다니…. 뼈 굵은 모험가들도 힘겨워하는 수준의 던전이라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소재를 챙겨 오는 모습은 여태껏 못 봤는데.”
“여기서 단번에 사들이기는 과한 양입니까?”
로덴의 물음에 여우 부부는 붉은 털이 이리저리 휘날릴 기세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세간에 드레이크라고 인지되고 있는 공룡의 뼈와 가죽을 세공하여 만드는 일련의 상품들은 도시 내에서 은근한 수요가 있지만….
아티팩트라는 기대 요소가 없는 던전이라 공룡의 소재를 수급하는 게 썩 순탄치 않은 편이기에 어쩌다가 몇몇 실력파 모험가 파티가 팔아주는 걸 매입하는 게 전부다.
즉, 없어서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아닐세, 여기 내려놓은 물건 모두 넘겨주게나! 내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주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처분하기는 많이 번거로운 로덴의 입장으로도 무척 반가운 제안이었으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여보. 양이 너무 많은데, 이것 좀 도와줘.”
“알았어요.”
물건이 하도 많은 탓에 시간이 다소 걸릴 테니 편히 기다리라며 손님을 앉힌 여우 부부는 마주 앉은 채 수북이 쌓인 소재들을 분류하기 시작한다.
랩터 꼬리 가죽, 박치기 공룡의 두개골, 굵직한 뿔, 철퇴 같은 꼬리, 두터운 등껍질, 익룡의 피막 등등… 전부 확인하는 것만 십 분 이상이 소요됐고,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한 여우 부부가 요란스럽게 기뻐하면서 값을 매겼다.
“와아…! 전부다 무척이나 말끔하게 발라놨네요. 안 그래요?”
“그러게, 여보. 하나같이 훌륭한 상태의 소재들이야. 모두 합쳐서 40실버에 사겠네.”
마물의 부산물만을 팔아서 받는 돈 치고는 제법 짭짤한 가격이다.
“괜찮은 가격이네요. 이것들 중에 일부를 써서 주문 제작도 맡기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추가 주문이라면 대환영이지. 어떤 물건을 만들고 싶은 겐가?”
가게 곳곳에 전시돼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보던 로덴은 그중에서 특히나 눈여겨보고 있던 자그마한 가죽 가방을 가리켰다.
“요 며칠간 도시를 돌아다녀 보니까 저런 형태의 가방을 두른 시민들이 종종 보이던데, 여기서 만든 물건이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비슷한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여기 말고 더 있거든. 뭐, 당연히 우리 가게에서 만든 물건이 당연히 최고지만.”
“그렇다면 여기 있는 공룡… 아니지, 드레이크 가죽을 주재료로 한 가방 세 개를 만들고 싶군요.”
“알겠네. 주문 제작비는 매입비용에서 탕감하는 걸로 합세.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형태가 있나?”
“네.”
지금까지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에게 그럴싸한 선물을 챙겨준 적이 없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던 로덴은 이번 기회에 그녀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예전에 록시아한테 사줬던 완드는 마법사로서 꼭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 선물하고는 엄연히 다르지. 흠, 공룡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라… 걔네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후로 로덴은 세 여자에게 선물할 가방의 디자인에 대해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그 무렵, 안내인을 따라 마탑의 최상층에 도착한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는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마탑주와 대면하고 있었다.
“…대충 3년 만인가?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메림, 마릴. 두 사람 모두 못 보던 사이에 더 성숙해진 분위기야.”
“그러는 테라 영감님은 못 보던 사이에 주름이 늘어 버렸네. 잘 지냈어?”
ㅡ꾸우욱!
연장자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발언을 바로 옆에서 들어버린 마릴은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는 언니의 머리통을 강제로 숙이게 했다.
“끄아앜!”
“어머,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죄송합니다. 마탑주님.”
“괜찮아, 괜찮아. 예전에 메림한테 듣던 말들이랑 비교하면 이 정도야 애교지.”
넉살 좋은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으며 커피잔을 기울인 마탑주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족 소녀를 흘긋거렸다.
“마족을 제자로 삼았었다니… 답다, 다워.”
“됐고. 영감님도 바쁜 몸일 테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굳이 초대장까지 보낸 용건은 뭐야? 만약 그때의 제안 때문이라면 내 대답은 여전히 똑같으니까 헛수고라고 미리 대답할게.”
단호한 메림의 말에 마탑주는 혀를 차며 목소리를 냈다.
“에잉, 오랜만에 만난 노인한테 쌀쌀맞기는.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더는 언급하지 않으마. 그냥 이야기나 좀 듣고 싶어서 불러봤다.”
“무슨 이야기?”
“지난 3년간 너희들이 겪었을 세상에 대한 이야기지. 은근히 궁금하더구나. 한때 우리 마탑의 유망주였던 네가 굳이 선택한 모험가라는 입장에서 겪은 세상이. …덩달아서 어쩌다가 마족을 제자로 삼게 됐는지도 알고 싶고.”
마탑주는 쌍둥이 자매가 간단하게라도 경험담을 들려준다면 록시아의 마법사 등록에 대한 안건도 바로 알아봐 준다고 했다.
“아, 바로 알아봐 주겠다는 거지 무조건 등록시켜준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거라. 마탑 공인 마법사로 인정받으려면 기본은 갖춰야지. 아무튼, 너희의 대답은?”
“썰을 푸는 정도라면… 알았어.”
그렇게 쌍둥이 자매는 기억을 되짚으면서 마탑주에게 그간 겪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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