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야생 (4)
* * *
로덴의 중얼거림을 바로 옆에서 들은 일행들이 그를 향해 시선을 흘긋거렸다.
““공룡?””
“주인님, 공룡이 무슨 뜻인가요?”
“아… 별거 아냐. 내 고향에서는 드레이크 녀석들을 공룡이라고 불렀거든.”
기본적인 배경 지식이 상당히 다른 만큼 로덴이 그녀들에게 공룡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려면 한 세월은 걸릴 것이고, 적들이 뛰어오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말할 시간도 없었다.
“뭐, 딱히 중요한 의미는 아니니까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자고.”
“네.”
그렇기에 적당히 얼버무린다.
‘솔직히 말해서 공룡이나 드레이크나 별반 차이도 없으니 공룡이 어쩌고 하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겠어…. 근본적으로는 덩치 큰 파충류니까. 이곳 사람들에게 변종 드레이크라고 불려도 딱히 이상하진 않겠지.’
여행길에 거쳐간 대장간에서 새로 구비한, 흑검하고 제법 유사한 길이와 무게의 검을 쥐어든 로덴은 자신들을 서서히 포위하고 있는 회갈색 공룡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날렵해 보이는 생김새와 그에 걸맞은 몸동작, 선 키가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수각류, 갈고리를 연상시키는 발톱.
로덴의 지식으로 알기에… 「벨로키랍토르」라는 명칭, 혹은 벨로시랩터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리는 공룡과 대부분의 특징이 일치한다. 그는 편의상 녀석들을 랩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ㅡ두두두두두!!!
적들을 탐색하고 있던 사이, 재빠르게 움직여서 로덴 일행을 완전히 포위하고는 위협적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랩터의 수는 모두 합쳐서 아홉. 머릿 수로만 따지면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없군. 보면 알겠지만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할 생각이야. 정면 하고 후면은 나하고 마릴이 맡을 테니 록시아, 메림 너희 둘은 침착하게 측면에 대응하면서 반격해.”
“퀴레에에엑!!”
로덴은 두 사람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높이 점프하여 달려들던 랩터를 베어버렸다.
촤작! 즉시 피와 내장을 흩뿌린 녀석이 두 동강 나며 지면에 처박힌다.
던전의 제1 계층에 있는 마물치고 제법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긴 했지만 딱 그뿐,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흠… 일단 나는 두 마리만 더 처리하고 나머지 놈들이 얘들하고 싸울 수 있게 하는 게 경험을 쌓기 딱 적당하겠어.’
그리 생각한 로덴이 정면의 양측에서 도약하려는 두 녀석에게 먼저 달려들더니 랩터의 반사신경으로는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접근, 연달아서 목을 베어냈다. 마치 야채를 써는 것처럼 부드럽게 썰어버린다.
동족 세 마리가 단 한 명에게 순식간에 당해버리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 나머지 랩터들은 몸을 흠칫흠칫거렸다.
“퀴리익!”
“퀘이에엑!”
녀석들은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더니 로덴이 있는 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단 당장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사냥감 대신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고, 가냘파 보이는 암컷들을 우선적으로 노리기로 한 것이다.
세 여자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한 랩터들이 높이 뛰어든 순간, 고리 모양의 스태프를 땅에 꽃은 메림이 주문을 영창 했다.
“파이어 월!”
ㅡ화르르륵!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불꽃이 공중을 날아들고 있는 랩터들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구워냈다.
수풀이 무성한 장소라서 화염을 함부로 다루기 위험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주변 일대는 습기가 제법 있는 편이라 불이 크게 번질 가능성은 미미하다.
아무튼, 열기가 매섭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태울 정도의 고화력은 아니었기에 이대로 빠르게 지나친다면 가벼운 화상을 입을지 언정, 치명상을 당하지는 않을 터다.
…다른 마법과 연계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래비티 다운!”
완드를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 록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퀴아아악?!!”
동시에 랩터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몸을 지그시 누르는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자력에 이끌려버린 N극 혹은 S극 마냥 대지에 처박혀 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성채가 지어져 있는 장소에 말이다.
치이이익!! 가죽이 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바닥에 들러붙은 뱃가죽에서부터 생으로 구워지는 고통을 받은 랩터들은 괴성을 지르면서 발버둥 쳤지만 놈들의 힘보다는 록시아가 일시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중력의 힘이 더욱 강했다.
중력에 짓눌려진 채, 아래쪽에서 솟고 있는 화염에 의해 서서히 타 죽어 가고 있는 랩터들을 바라보던 메림은 예상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몇 초만 발을 묶어두고서 추가타를 쏟아부 울 계획이었지만… 이거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좋은데?”
중력 제어 마법 같은 광범위 마법은 영향을 끼치는 범위에 비례하여 효력이 떨어지게 돼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록시아가 사용하는 마법은 눈앞에 있는 적들을 불의 장벽 위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내가 다루는 속성이 아니라서 기초 수준의 대지 마법밖에 못 가르쳐 줬는데도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다니… 날이 가면 갈수록 상식적인 수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엄연한 마왕님인가.’
록시아가 마법에 대하에 아무것도 모르는 때부터 지금까지도 마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입장인 메림으로서는 두드러진 발전이 기쁘기는 했지만.
‘…이 아이는 옛날의 나처럼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면 안 돼.’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은 오만불손 해지기 쉽다.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처절히 알고 있던 메림은 록시아의 지나친 성장에 내심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기쁜 오산이네요. 저희 둘이 이 마법만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이놈들을 편하게 처리할 수 있겠어요. 메림 언니.”
“어…, 응. 남은 드레이크들은 마릴이 맡아주면 딱 맞겠네.”
확실치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며, 록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메림은 그녀와 함께 마법을 유지하면서 마릴을 바라본다.
이제 남은 적은 둘. 그 녀석들은 후방을 지키고 있던 마릴과 한창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마릴이 우세한 상황이다.
“퀴아아아…!!”
두 마리의 랩터는 피칠갑이 돼버린 상황에서도 뾰족한 이빨과 갈고리 같은 발톱을 휘둘러 어떻게든 적을 공격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마릴은 로덴에게서 배운 회피 동작을 십분 발휘하여 최대한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피하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반격을 가했다.
“흐읍!”
슬슬 충분하다 생각한 그녀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짧은 기함 소리와 함께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뛰어들더니, 물 흐르는 동작으로 목표물의 발목을 베어냈다.
예리한 칼소리와 함께 힘줄이 절단된 랩터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곧장 자세를 고쳐 잡은 마릴은 스트레이트 펀치를 휘두르듯이 버클러를 앞세워 랩터의 머리통을 강타, 가까운 나무까지 쭉쭉 밀어냈다.
ㅡ꾸득…! 꾸드드득!
버클러와 나무 사이에 끼여진 랩터의 머리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결국에는 퍼석! 두개골째로 골통이 으깨져버렸다.
마릴은 조금 전에 발목을 베어낸, 바닥을 버둥거리던 랩터의 목을 단칼에 베어내는 것으로 이 던전에서의 첫 번째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ㅡ짝! 짝! 짝!
“익숙지 않은 타입의 적들이었을 텐데, 다들 잘 싸웠어.”
가볍게 손뼉을 부딪히며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에게 수고의 말을 건넨 로덴은 그녀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전리품을 챙기기로 한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짐승들에게서 건질만한 것은 당연하게도 피와 살이다.
“이 공룡… 아니지, 드레이크들의 가치는 비늘이 달린 가죽. 특히 꼬리 쪽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박피는 내가 할 테니까 너희는 밑준비만 해줘.”
…잠시 후.
불에 바싹 타버린 네 마리를 제외한 랩터의 사체가 한 군데에 모여졌다. 녀석들의 꼬리를 지체 없이 잘라낸 로덴은 갈무리용 칼을 꺼내고는 주저 없이 살과 가죽 사이에 꼽아 넣었다.
ㅡ휘릭, 휙! 찌이익.
“오오….”
지켜보고 있던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꼬리 가죽을 귤 껍데기 마냥 통으로 벗겨낸 로덴의 손놀림은 전문가의 그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와, 정말 완벽하게 분리하셨네요. 주인님. 이 상태면 볼 것도 없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겠는데요?”
“꼬리 가죽은 평균적으로 50 쿠퍼가 조금 넘는 가격에 팔린다고 하던데. 1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짭짤하네.”
마물의 가죽은 흠집 없이 잘 벗겨져 있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깔끔하게 발라진 꼬리 가죽을 바라본 두 마법사가 한 마디씩 하고 있을 때, 마릴은 로덴의 손동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이런 사소한 것 까지 배우고자 하는 마릴을 보며 옅게 웃은 로덴은 동작을 조금 더 천천히 하거나, 그녀가 직접 실습하게 하면서 나머지 꼬리를 마저 벗겨냈다.
‘…이왕인 김에 고기도 챙겨봐야지. 이런 때가 아니면 도대체 언제 공룡 고기를 먹어 볼 수 있겠어?’
로덴은 겸사겸사 적당한 부위의 고기를 한 근 정도 챙겼다.
몽뚱이 쪽의 가죽도 어느 정도 가격은 나가는 편이지만 모든 것을 알뜰히 챙기기에는 무게 부담이 많이 들고, 시간도 상당히 지체될 것이기에 그대로 방치한 채 길을 나아갔다.
이후에 로덴 일행은 와일드 던전 1층의 정글을 탐사하는 동안 간간히 싸움을 걸어오는 랩터 이외에 다른 공룡과도 마주했다.
정면에서 봤을 때 방패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프로토케라톱스」라고 불리는 초식 공룡이다.
평균적으로 멧돼지보다 조금 더 커다란 수준의 덩치를 하고 있던 녀석들은 로덴 일행과 같은 인간 무리에게 딱히 적대적인 낌세를 보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다가가면 위협하는 정도, 랩터 무리에게 뜯어 먹히고 있는 사체도 종종 보인다.
백악기의 일부를 몸소 체험하며 신기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로덴과 일행들은 던전 진입 이후에 약 두 시간이 지나갔을 때쯤… 다음 계층으로 가는 게이트를 열게 됐고,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같은 시각, 콜라드 지부 마탑의 최상층.
언제나처럼 서류 더미와 연구 일지들을 살펴보던 마탑주, 아르테라는 조금 전에 막 확인하게 된 록시아의 마법사 등록 신청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니까 이 마족이 메림이 데려온 제자라는 소리지? 도대체 언제 방문했던 게야?”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전날, 정확히는 아침 시간이라고 합니다. 마탑주님.”
“크흠, 메림도 참…. 직원 말고, 같은 마법사에게 이름을 밝혔다면 바로 만나봤을겄을….”
침음을 흘리며 산신령처럼 길게 늘어진 수염을 더듬거린 백발 노중년 마법사는 바로 옆에 있는 그의 비서 겸, 제자에게 록시아의 신청서를 건네줬다.
“마족이라면 도시의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겠지. 찾아내는 즉시, 마탑의 최상층에 하루라도 빨리 방문하라 전하도록. 그리고 당연히….”
“예, 메림도 같이 오게끔 지시하겠습니다. 마탑주님.”
신청서를 받아 든 제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방안에 혼자만이 남게 된 마탑주는 온갖 종이가 널부러진 책상에서 등을 돌리고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는 메림과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족을 제자로 삼았다니… 그 아이답긴 해. 모험가 따위를 하기 위해. 차기 마탑주 후보가 될 기회를 걷어찬 변덕쟁이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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