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떠나다 (2)
* * *
솔직히 상당히 의외였다
권위의 상징인 귀족. 그것도 영지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영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표면적으로 일개 연금술사 혹은 모험가 신분에 불과한 로덴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뜻을 전한 이 상황이 꽤나 의외였다
‘영지민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라… 영주로서의 프라이드가 어지간히도 높은 양반이네.’
로덴은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으며 상대방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대강이나마 파악했다
“아닙니다. 영주님. 일종의 사고와도 같은 일이었으니 크게 마음 쓰지 마십시오.”
멀린과 에스카로스가 포션 가게에 찾아왔을 때, 만일 현장에 경비병들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침입자를 막아내기는커녕 일방적인 학살이 펼쳐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멀린의 마법에 의해 사방이 얼음기둥으로 가로 있어 경비병이 오지 못하던 상황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고인가… 분명 마족 살해범들이 저 아이를 노리고 쳐들어왔다고 했었지? 이미 보고는 여러 번 들었지만 역시 본인들에게 직접 듣고 판단하고 싶군. 한 명씩 증언을 부탁하지.”
“네.”
ㅡ딸랑…! 딸랑…!
본격적인 증언을 듣기에 앞서 종을 크게 울려 사용인들을 부른 영주는 인원수에 맞는 홍차와 다과를 가져오게 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상세한 증언을 하라는 의미다
그렇게 로덴 일행은 향긋한 홍차 향이 물씬 풍겨지게 된 응접실에서 순차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만, 입장상 모든 진실을 담을 수는 노릇이기에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입을 맞춰둔 대로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뒤섞어서 최대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머지는 경비대장에게 말한 그대로입니다.”
“흠, 끝내 신원 불명의 마법사가 이동 계열 마법을 써서 도망쳤다는 말인가.”
증언을 끝까지 들은 영주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피해자의 입장인 로덴 일행을 추궁할 명확한 근거가 없었기에 더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ㅡ후루룩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홍차를 음미한 영주는 일행 중에 유일한 마족인 록시아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어떤 방법을 썼을지는 몰라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군. …데리고 있는 소녀가 마족이라는 사실 말이다. 사촌관계로 등록된 신분도 굳이 확인할 필요 없이 새빨간 거짓일터.”
“……예.”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가지만 보호자인 자네에게 굳이 물어보도록 하겠네. 어째서 저 소녀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감추게 하고 있었지?”
“주변 사람들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록시아가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따가운 시선을 받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보통의 인간들이 마족에게 갖고 있는 인식이 호의적인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영주는 역시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지금까지 신분을, 그것도 마족을 인간이라고 속이고 지내왔으니 원칙상으로는 적절한 처벌을 내려야겠지만….”
말꼬리를 늘인 영주는 록시아의 모습과 로덴의 의수를 흘끔 바라봤다
“뭐, 됐어. 지금껏 인간의 신분으로 조용히 지내온 것뿐이기도 하고, 이번 사고에서 제때 지원하지 못한 탓에 집하고 팔 한쪽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벌까지 내리기는 꺼려지는군. 지난 일 년간 자네의 가게에서 제공한 포션의 덕을 본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내 특별히 경고 조치로 넘어가겠다.”
“선처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만일 로덴이 처벌을 받는다고 쳐도 끽해야 벌금을 지불해야 하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모처럼 감면해준다고 하니 그는 감사의 말을 전했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록시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의 감사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찻잔을 내려놓은 영주는 다른 화제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포션 가게를 다시 세우긴 해야겠지? 원한다면 실력 있는 목공들을 소개해 줄 수 있다만?”
로덴이 이곳에 정착해서 가게를 차리기 전까지는 타 영지의 연금술사 길드에서 포션들을 매입해왔던 바르멜라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포션 가게가 하루빨리 재건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영주는 여차하면 건축 자금의 일부를 빌려줘서 은혜를 입힐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영주님의 말씀은 감사하군요. 하지만 저희는 오늘부로 당분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오려고 합니다.”
“아… 사건 이후로 자네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 마족 살해범 놈들에게 다시 공격받을까 봐 그러는가?”
“예, 놈들에게 위치가 드러난 상황이니 한동안은 몸도 숨길 겸, 그리운 고향땅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여행이 끝나면 바르멜라 영지로 돌아와 포션 가게를 새롭게 지어낼 것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여담으로 로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다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포션 가게의 잔해가 남아있는 땅의 지분을 처분하지 않고 남겨놨다
‘감추고 있는 진짜 사연이 따로 있어 보이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쉽사리 알 수 있는 종류의 사연은 아니겠군.’
인재들이 떠나는 이 상황에 대해 상당히 아쉽다는 생각을 한 영주였으나 떠날 이유가 있어서 떠나는 사람들을 억지로 붙잡아둘 정도로 고압적인 성향도 아니었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무탈한 여행의 끝에서 다시 돌아오길 바라겠다는 말을 건네준 영주의 모습을 뒤로한 로덴 일행은 영주관에서 빠져나와 성문 밖에서 미리 예약해둔 마차로 향했다
마차 주변에는 로덴의 가게에 정기적으로 들렀던 단골 모험가들과 쌍둥이 자매의 동료인 핀과 주노아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종종 모험가 길드를 드나들던 쌍둥이 자매에게 이야기를 접했기에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렸던 것이다
로덴 일행은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충분히 나누고 나서야 마차에 올라탄다
ㅡ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정든 바르멜라 영지를 서서히 떠나간 네 사람은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 * *
로덴과 록시아, 쌍둥이 자매가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나갔다
도시나 마을 등을 잇는 가도를 지나칠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는 길의 마차에 몸을 맡긴 채, 여관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편하게 이동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안전이 보장된 길이기에 마차를 타는 동안에는 불필요한 트러블을 겪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험한 지형의 산과 숲을 빠르게 통과하고자 도보를 통해 길을 지나칠 때는 해당 지역에 자리를 잡은 마물들과 산적들이 로덴 일행에게 수시로 덤벼든다
체감상 한 시간에 한 번의 빈도다. 그야말로 조금만 지루해진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는 수준
‘숨을 거면 차라리 제대로 좀 숨어라. 이것들아.’
그리고 현재. 록시아하고 쌍둥이 자매와 함께 깊은 산속을 일직선으로 지나치고 있던 로덴은 조금만 주의를 집중하면 찾을 수 있는 수준의 매복 흔적과 아주 조금도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살기를 감지하며 속으로 한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애써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유지한 로덴은 마릴에게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마릴, 근처에 몇 명이 대기하고 있는 건지 맞춰볼 수 있겠어?”
“네, 오라버니. 모두 합쳐서… 18명이네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일곱, 뒤랑 옆에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는 사람들이 열 하나죠.”
“정답. 마릴도 이제 적의와 살의가 담긴 기척을 능숙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됐네.”
상대방의 매복 능력이 아무리 형편없다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적의 숫자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게 된 마릴의 성장에 로덴은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뒤편에서 따라오고 있는 메림과 록시아 또한 어렴풋이 적의 낌새를 알아챘기에 눈에 띄지 않게 공격 마법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일행이 몇 발자국 더 걸어가자 수풀 사이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무리가 날이 시퍼런 무기를 빼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거칠고 비릿한 행색과 기세를 보면 사람을 써는 것에 익숙한 놈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굳이 확인할 것 없이 산적 놈들이겠지. 자기 지갑이랑 남의 지갑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지 장애 새끼들.’
아무튼, 놈들에게 굳이 포위를 당해준 로덴 일행이 서로 등을 맞댄 구도로 멈춰 서자 산적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덩치가 비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 이제 와서 진형을 짜려해 봤자 이미 늦었어. 얼간이들!”
아무리 로덴 일행이 네 명뿐이고 그럴듯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쌍둥이 자매뿐이라지만 마법사가 있다면 경계할 법도 한데 놈들은 망설임도 없이 두목의 손짓에 따라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숫자와 경험을 믿는 것이다. 덩달아 유일한 남자인 로덴을 제외하고는 죄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수준의 미인만이 보였으니 상당히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남자 놈은 늑대 먹이로 만들고 나머지 년들은 매일 같이 단체로 돌려서…!”
ㅡ부우우욱! 퍼석!
신나게 지껄이던 두목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다가 완전히 팽창하여 터져 버렸다
녀석의 저급한 말을 듣다 못한 록시아가 권능으로 발현하여 놈의 몸뚱이가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바람을 짧은 시간에 집어넣은 탓이다
“록시아… 어지간하면 그건 아껴두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주인님. 저 인간이 하는 말의 뒷부분을 귀에 담고 싶지 않았어요.”
녀석의 뒷말을 듣기 싫었던 것은 로덴도 마찬가지였기에 더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두, 목?!”
한편, 갑작스럽게 몸이 터져버린 두목의 피를 뒤집어쓴 산적들이 크게 당황하는 사이 마릴이 검을 뽑아 놈들에게 달려갔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마릴의 검격이 그려지는 순간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산적들의 사지가 하나하나 썰려나갔다. 그녀의 움직임에 제대로 된 반응을 하는 녀석이 한놈도 없다. 무기를 쥐고 있는 자세를 보면 제법 휘둘러 봤던 솜씨지만 진정한 실력자에게 검술과 체술을 꾸준히 배운 마릴에게 대항할 수준은 아니다
마릴이 화려하게 날뛰는 동안 사방을 둘러싼 궁수들은 마법사인 메림과 록시아가 굵직한 얼음 다발을 날리며 하나하나 꼬챙이로 만들듯이 처리했다
열여덟 명의 산적과의 전투에서 로덴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이런 녀석들 덕분에 그동안 세 사람에게 꾸준하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해 줄 수 있었지. 이쯤 되면 고마워질 지경인데.’
3분도 되지 않는 시간만에 산적들을 몰살한 로덴 일행은 적당히 챙길 물건만 건져낸 뒤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길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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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드디어 보인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 우거진 나무 사이를 빠져나온 로덴 일행의 시야에 이번 여행의 맨 첫 번째 목적지. 하론 공국의 수도 콜라드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로덴 일행이 수도로 방문하는 목적은 총 가지다
첫 번째는 앞으로 여행에서 계속 사용할 이동 수단을 구매하는 것
두 번째는 수도의 마탑에 방문하여 록시아를 정규 마법사로 등록시키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반년 전부터 수도 주변에 유지되고 있다는 던전에 입장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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