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여정의 준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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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낸 로덴 일행은 가는 길을 틀어막고 있던 잔해 더미들을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끔 치우거나 부수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입과 함께 라이트 마법으로 불빛을 낸 네 사람은 지하 내부의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싸움의 여파로 인해 폭삭 무너져버린 지상 쪽과는 달리 이곳은 어찌어찌 형채는 유지하고 있었으며 상당히 많은 양의 비품상자 안에 보관한 포션과 재료들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포션 제조 작업의 중추를 담당하던 자동 배합기의 경우는 당장 작동시키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지만어차피 한동안 여행을 떠날 예정인 만큼 당분간 이 녀석을 가동할 생각도 없었고 가장 중요한 동력원들은 온전했으니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입구 앞이 무너져 버려서 그런지 위쪽을 뒤적거리던 녀석들은 여기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모양이네.”
조금 전에 거지들을 몰아낼 때로덴이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혹여나 지하 작업장에 있는 물건들까지 빼돌렸을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있는 물건까지 선뜻 적선해줄 정도로 대책 없는 기부천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설마 그 과정 속에서 속옷 도둑을 잡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아무튼오랜만에 들어오게 된 작업장을 둘러보다가 약학 지식을 다루는 책자를 주워들은 메림은 그것의 먼지를 훌훌 털어서 로덴에게 건네주었다
“떠나기 전에 물건들이라도 몇 개 건지고 가려고?”
“이대로 떠나고 빈 집이 돼버리면 결국에는 여기까지 털리게 돼있으니챙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겨야지예를 들면 이 책자처럼 중요한 지식과 조제법을 담아낸 자료나 포션과 약재들…정리하는 걸 조금 거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로덴을 바라보던 세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전했다
“네그러면 저는 마릴 언니랑 같이 저 끝에서부터 시작할게요.”
“부탁할게메림은 이쪽으로.”
“오케이~”
작업실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로덴과 록시아가 각각 메림하고 마릴과 같이 움직이는 형태로 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메림과 함께 움직인 로덴은 자동 배합기를 분해하여 동력원이 되는 순도 높은 마정석들과 주요 부품을 인벤토리 안에 하나 둘 차곡차곡 집어넣거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책자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들을 챙겼다
그리고 마릴과 함께 움직인 록시아는 막자사발측량기비커 등의 조제 도구들과 포션과 재료를 보관하고 있는 상자를 방 한가운데에 구분하기 쉽게 옮긴다
난잡해진 지하의 모든 물건을 정리하는 작업은 서로 손발을 맞추어가며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해쳐나가니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잠시 후
자동 배합기의 핵과 주요 부품상급 포션과 재료조제 도구와 책자 등은 약간의 여유 공간만을 남겨둔 채 로덴의 인벤토리에 최대한 눌러 담아내는 것으로 선별작업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후우…! 이만하면 충분하겠지도와줘서 고마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던걸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그나저나지하의 물건들을 전부 다 챙기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나 봐.”
뿌듯한 표정으로 코 밑을 쓱 긁은 메림을 포함한 일행의 시선은 미처 담아내지 못한 포션과 기타 재고를 담아낸 상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내 인벤토리의 공간도 무제한은 아니니까.”
상자에 있는 물건들은 모험가 길드랑 상단에 연락해서 떨이 장사로라도 처리해야겠어이대로 지하에 썩혀두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겠지
지난 1년간 바르멜라 영지에서 포션 장사를 하면서 모아둔 돈을 합치면 앞으로의 여행에서 금전 때문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겠지만 여행 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말끔히 치워내서 쉴 공간을 만들어낸 로덴은 록시아 하고 쌍둥이 자매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네 사람 모두 아침부터 상당히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됐지만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앗….”
한편주인의 곁에 앉은 채 작업 중에 묻혀버린 먼지를 살살 털고 있던 록시아는 머리를 매만지던 도중 두툼한 뿔이 손에 닿게 되면서 뒤늦게 깨닫게 됐다
지금의 자신은 평소처럼 반지를 통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뾰족한 귀와 뿔이 달려있는 마족의 모습을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나어제도 언니들에게 내 진짜 모습을 들켜 버렸었지
전날에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신경 쓰지 못했고오늘은 잠시 망각하고 있던 바람에 지금껏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여유로운 상황에서 새삼 자각하게 되니 급격하게 몸이 굳어지며 쌍둥이 자매의 눈치를 살살보게 됐다
눈에 띄게 흘끔거리고 있는 록시아의 시선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메림과 마릴은 마족 소녀의 양 옆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각각 오른손과 왼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순서대로 한 마디씩 했다
“갑자기 왜 우리들의 눈치를 살펴보고 그러실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말해보렴.”
“네.”
그녀들의 손길 덕분에 굳어진 표정을 풀 수 있게 된 록시아는 말을 이었다
“언니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그거야 당연히 우리의…”
“귀여운 동생이지.”
사전에 합이라도 맞춰둔 것처럼 메림의 말을 마릴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으며 대답을 내밀었다
그 말을 들은 록시아는 가슴이 뭉클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쌍둥이 자매를 바라보며 이전과 형태가 많이 달라져버린 자신의 뿔을 더듬거렸다.
“…언니들과 달리 인간이 아닌이런 뿔이 달려있는 마족인데도요?”
“우리는 여전히 널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종족이 조금 다른 게 무슨 상관이야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다는 사실 쯤이야 하나의 개성쯤으로 생각하면 되지.”
“아니면 록시아는 우리를 언니들로 여기고 있지 않고 있는 거니?”
“아아뇨! 메림 언니랑 마릴 언니는 저한테 있어서 소중한 언니들… 아니가족이에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목소리를 높인 마족 소녀를 바라본 쌍둥이 자매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났다그녀들 사이에서 종족의 차이 같은 건 사소한 문제였다
“록시아도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다니 다행이네언니들은 기뻐.”
동생과 함께 마족 소녀를 가볍게 끌어안던 메림은 세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우리끼리 당장 주고받고 싶은 말은 다 나눴으니까 나머지는 오빠한테 맡길게여기서부터는 로덴 오빠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알았어.”
록시아의 맞은편 자리로 위치를 바꾼 로덴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면서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주렴어제는 네가 자고 있어서 두 사람에게만 먼저 말했었지만 사실 너하고 나는….”
이야기를 전하는 대상이 다른 만큼 세세한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로덴은 전날 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가며 록시아에게 지금까지 쭉 말하지 않고 있던 진실을… 그가 과거의 용사이며 그녀가 이번 세대의 마왕이라는 진실을 최대한 차분하게 들려주고증명했다
주인이 들려주는 말을 단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경청한 록시아는 로덴이 용사였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마왕이라는 사실이 몇십 배는 더 놀라웠다.
한때 그녀는 마계국의 주민이었기에 마왕이라는 게 어떤 것을 상징하는 단어인지 절실히 알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마왕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니……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든 이야기다
“…내 말을 당장 믿지 못하더라도 괜찮아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그러니 너무 무리해서 당장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오래 걸려도 좋으니 하나씩 천천히 받아들여줘.”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그녀의 주인님인 로덴이 저렇게나 진지하게 말해주고 있으니 감히 사실 여부를 의심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날의 싸움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어째서 자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내심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지금 이 순간로덴에게 듣게 된 이야기를 통하여 비로소 의문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에요저는 주인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요.”
“잠깐만내 말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게 아니야네가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받아들여야 해그러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일단은 주인이 이야기한 데로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성급하게 굴지 않고차분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록시아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는 쌍둥이 자매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저기 주인님어젯밤에 언니들에게 저희가 맨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어… 그러니까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아니라사실은 주종관계라는 것도 설명하셨죠?”
“응계속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주인님은 딱거기까지만 말씀하신 모양이군요….
같이 지내온 1년간 언제나 주인의 모습을 눈에 새긴 록시아였기에 지금 그의 대답과 표정을 읽는 것 만으로 주종관계에 대한 이야기까지만 쌍둥이 자매에게 밝혔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말은 즉로덴과 록시아가 쌍둥이에게 전해야 하는… 진실이 아직 한 가지 더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주인님이번에는 제가 주인님께 품고 있는 이 감정을 저의 입을 통해서 언니들에게 직접 전하고 싶어요.”
“……알았다.”
거기까지 들은 로덴은 록시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바로 눈치챘다원래는 둘이서 함께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일단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ㅡ꿀꺽
결심을 굳힌 듯목울대를 울리며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난 록시아는 그대로 로덴을 꼭 끌어안음과 동시에 쌍둥이 자매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메림 언니마릴 언니사실 저도 언니들 못지않게… 아니그 이상으로 주인님을 한 명의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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