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여정의 준비 (2)
* * *
“오오오…! 진짜 손 같다!”
“건틀렛이나 기다란 장갑만 끼고 다니면 의수라는 것도 전혀 모르겠어요.”
양 옆에 앉아 있는 쌍둥이 자매가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내심 즐기던 로덴은 이제부터 새로운 신체가왼손이 되어줄 의수를 쥐락펴락 하며 규칙적으로 움직여 보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움직임이 어색하다
일단은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주긴 하지만…반응이라던가 동작이 미묘하게 느리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이 적잖이 드는군통각 쪽은 어떠려나?
잠시 생각하던 로덴은 얼마든지 만져도 좋다며 쌍둥이 자매에게 순서대로 의수팔을 내밀었고저게 어떤 느낌일까 상당히 궁금해하던 그녀들은 사양할 것 없이 로덴의 의수팔을 원 없이 만져보았다
“역시 원래의 손 하고는 달리 좀 딱딱하면서도 차갑네요
“더운 날에 안고 자면 푹 잘 수 있을 거 같네그런데 오빠이거 무겁지는 않아?”
쌍둥이 자매가 의수팔을 이리저리 만지거나 더듬거릴 때마다 그녀들의 손이 닿는다는 감각도 확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좀 묵직하긴 한데차츰 익숙해지면 되겠지.”
마취된 부위를 만져지는 듯한 저릿한 감각이네이것도 역시 신경이 막 연결돼서 적응하지 못한 탓인가
이대로 당장 밖에 나가서 의수팔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완전한 밤이다더군다나 상당한 피로감도 몰려들었다
로덴과 쌍둥이 자매는 간단한 말을 몇 마디 주고받은 뒤록시아가 먼저 누워있던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끔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했다
여관에서 가장 큰 방에 걸맞게 상당히 커다란 침대라 바짝 붙기만 한다면 넷이서 함께 눕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그렇게 로덴 일행은 몹시 길게만 느껴지던 하루를 드디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 *
“여긴…?”
창문 틈 사이로 방안에 스며드는 아침 햇살과 멀찍이서부터 닭이 세차게 우는 소리에 반응하여 맨 처음으로 몸을 일으킨 사람은 록시아였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건 낯선 천장이다서둘러서 상반신을 일으킨 그녀는 주변 상황을 빠르게 확인해 보았다
록시아 본인은 커다란 침대의 끝자리에 자리해 있었고바로 옆에는 로덴그의 옆으로 메림과 마릴이 서로 몸을 다닥다닥 붙어서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황상 여관으로 추정되었다잠이 완전히 달아나며 전날의 일을 하나 둘 서서히 떠올린 록시아는 로덴의 몸을 꼭 안았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싸움의 끝에서 로덴만이 아니라 쌍둥이 자매까지 자기를 지키려다가 쓰려버리는 모습을 봤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에 자기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하게 될 수 있던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주인의 몸을 끌어안다가 어느새인가 얼굴을 파묻은 모양새가 된 록시아는 온기와 감촉냄새를 생생하게 느끼며 확실하게 살아있음을 절실히 실감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잠에서 깨어나게 된 로덴이 마족 소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네면서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일찍 일어났네잘 잤니?”
“네주인님잘 잤어요.”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느낌은 없고?”
“네주인님불편하기는커녕이렇게까지 상쾌한 기분으로 시작하는 아침은 생전 처음이에요.”
“다행이네.”
의식을 잃으면서 그대로 푹 잠들어서 그런지 피로감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님 하고 언니들은 괜찮으신가요?”
“어제 네가 회복시켜준 덕분에 다들 괜찮아모두들 네 덕분에 살았어.”
세 사람은 그대로 가만히 방치하다간 생명이 위급해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었는데지금은 이렇다 할 후유증 없이 말끔히 회복된 상태
상급 사제 저리 가라 할 수준의 회복 마법을 연달아서 발휘했다는 것이다
분명 굉장한 업적이긴 했지만정작 록시아 본인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눈치다오히려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님결국에 왼손은….”
회복을 끝낸 이후로도 끝내 복구하지 못한 로덴의 왼손을 떠올린 록시아는 말끝을 흐리게 되면서 침울해진 표정이 되었다
주인님이 앞으로 평생 동안 한쪽 팔만으로 살아가셔야 한다니
앞으로는 내가 이 힘을 써서 주인님의 왼손을 대신할 수 있게… 아니부족함 없이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해!
혼자서 온갖 상상을 펼치던 록시아는 주인의 왼팔이 있던 자리에 서서히 손을 뻗었다
아아그렇게나 듬직했던 주인님의 팔이 이렇게나 딱딱…
“…딱딱?”
텅 비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더듬거리던 그녀의 손 끝에서 차가우면서도 딱딱한 쇳덩이를 만지는 감촉이 전해졌다
예상치 못한 감촉에 눈을 크게 뜬 록시아는 실례를 무릅쓰고 로덴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 올렸다번들거리는 느낌의 은색의 팔이 주인의 왼팔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록시아의 반응을 지켜본 로덴은 옅게 웃으며 의수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아직도 움직임이 다소 뻣뻣하다
“예전에 던전에서 습득했던 아티팩트 중 하난데네가 자고 있는 사이에 끼워뒀어제법 폼나지?”
“그러면 이게 주인님의 새로운 왼손이 됐다는 말씀인가요?”
“뭐그런 셈이야.”
그녀는 단번에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면서도 이런 형태로나마 로덴이 왼손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ㅡ꾸르르륵
…동시에 공복감이 함께 몰려들었다는 게 문제지만
전날의 싸움으로 대부분의 마기를 소모한 직후조금 전까지 누워있던 탓에 체감하고 있는 공복감이 어마어마했고 그것에 비례하여 배가 울리는 소리가 로덴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로 크게 퍼졌다
단번에 얼굴이 벌게진 록시아는 배고픔보다도 창피하다는 생각이 더욱 커다랗게 몰려들었다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애써 못 들은 척 한 로덴이 몸을 일으킨다
“일단은 다 같이 아침부터 챙기고 시작할까?”
“……네.”
직후에 두 사람은 각자 메림과 마릴을 깨우고 난 뒤1층으로 내려가 넷이서 함께 배를 채우고 나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침의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일행은 무너진 가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어제는 당장 쉴 곳을 찾아야 해서 그대로 방치했지만 아무래도 확인해야 할 게 좀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해더미가 되어버린 포션 가게에 도착한 네 사람이 목격한 것은 잔해 사이를 뒤적거리고 있는허름한 옷을 걸친 사람들이다
몇몇은 허름한 차림새를 넘어서 바지만 걸쳐 입고 있다말라붙은 갈비뼈가 드러나는 상체를 보아하니 패션의 개념으로 웃통을 깐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뒷골목까지 이야기가 다 퍼져버렸나 보군.”
이른 아침부터 참 부지런들 하셔
같은 도시에 사는 시민들의 삶이 모두 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며 도시에 번화가가 존재한다면 빈민가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 저기서 신나게 루팅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빈민가의 거지들이겠지
어처피 잔해 사이에 깔려있을 물건들은 대부분 훼손되고 망가졌을 테니 저곳을 파헤치면서까지 남은 물건을 꼼꼼히 회수할 생각은 없었지만… 거처였던 장소가 털리는 장면을 계속 보고 싶지도 않고당장 여기서 해야 할 작업도 있었기에 방해꾼이 될 거지들을 몰아내기로 했다
“잠깐만 거기서 쉬고 있어좋게 좋게 돌려보낼게.”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를 적당한 그늘 아래에 앉혀두게 한 로덴은 잔해를 뒤적거리고 있는 거지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여기서 당장 물러가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말만 잘 들어준다면 녀석들에게 해코지를 가할 생각은 딱히 없다
비루한 영양 상태를 증명하듯하나같이 왜소한 체격을 하고 있던 거지들은 로덴을 올려다보며 모종의 위압감을 느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덴은 등을 돌리며 물러가려는 거지들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잠깐 기다려.”
“예…?”
“가기 전에 너희가 보따리에 싸들고 있는 물건들… 바닥에 깔아봐그대로 두고 가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안심해확인만 좀 하려는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기로 했다녀석들은 망설이는 티를 팍팍 냈지만 로덴이 근처에 놓여있는 돌덩이를 주워 들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니 순한 양이 되었다
흠원래는 적당히 부술 생각으로 집어 들었는데… 세밀한 힘 조절까지는 아직 안되네한동안 이쪽 팔로 힘 조절하는 연습도 해야겠어
돌가루 범벅이 된 의수팔을 훌훌 털어낸 로덴은 거지들이 내려놓은 보따리의 내용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보따리에는 조금씩 찌그러지거나 깨진 냄비 혹은 접시 등의 식기들이 담겨 있었다
“좋아통과.”
두 번째 보따리에는 로덴이 입었던 옷과 신발양말 등의 옷가지들이 담겨 있었다
“너도 통과다음."
세 번째 보따리에는 진열대에 놓여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금이 쩍쩍 갈라진 포션병들이 늘어져 있었다
“이야영감님 대박 터지셨네좋으시겠어?”
“…여기 두고 갈까요?”
“됐어영감님도 통과.”
“가감사합니다.”
저렇게나 많은 금이 나버렸다면 포션 자체가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기에 딱히 회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플라시보 효과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이후로도 로덴은 비슷한 느낌으로 간단히 내용물을 확인한 이후에 거지들이 그 물건을 챙겨가게 했다.
어차피 거의 망가지거나 포기한 물건들이고 그게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거니까문제는 없다
어느덧 그 많던 거지들이 딱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마지막 소지품 검사를 하던 로덴은 눈을 부릅뜨며 거지의 멱살을 붙잡았다
“……야지금 씨발네가 왜 이것들을 챙겨가려고 하냐? 어?”
“끄으으으윽!”
보따리에 담겨 있는 건 속옷!
모조리 속옷이다남성용이 아닌여성용 속옷당연히 속옷의 주인은 이 집에서 같이 살았던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다
그리고 이걸 가져가려고 했던 거지는 같은 여자가 아니라 헤이아치컷을 하고 있는 시커먼 중년 남성이다
단번에 눈이 뒤집힌 로덴은 녀석의 멱살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자잠시만요나으리… 이게 다 사정이…!!”
ㅡ짜악!!!!
“좆빠는 소리하지 마세요속옷 도둑 새끼가 사정은 무슨 사정이야.”
녀석의 뺨을 후려친 로덴은 듣기 싫다는 태도로 의수팔을 뻗어서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그러자 거지의 머릿속에서 눈앞의 남자가 조금 전에 이 손으로 돌덩이를 가루로 만든 장면이 재생되었다
“와아아악!! 돌멩이를 박살 낸 손으로 그러지 말아 주세요제발…!!!”
“솔직하게 말하면.”
속옷도둑의 음습한 욕망을 실토하게 한 로덴은 녀석의 손모가지를 아작내는 대신양쪽 검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헤이아치컷 머리카락을 싹 뽑아내는 정도로 조절하며 쫓아냈다
당연히 속옷들도 고스란히 두고 가게 했다
이미 먼지가 잔뜩 묻어버렸고이리저리 구겨진 속옷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하면 조금 전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으니 말끔히 처분해야겠다
아무튼거지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서야 그늘에 앉혀둔 세 여자를 다시 불러온 로덴은 특정 위치의 잔해 더미를 어렵지 않게 치워내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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