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23화 (123/149)

〈 123화 〉 여정의 준비

* * *

“얘들아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용사고록시아가 마왕이야.”

이렇다 할 도입부나 비유 없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먼저 내밀어서 돌직구를 던진 로덴은 쌍둥이 자매의 반응을 확인해 보았다

“어… 으음…로덴 오빠가 용사고,”

“록시아가 마왕이라고요…?”

로덴의 말을 곱씹은 그녀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로덴과 록시아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기야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허황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꺼내 들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15년 전에 마왕을 물리쳤다고 알려진 용사가 나옛 마왕의 힘을 물려받은 이번 세대의 마왕이 된 게 록시아라는 소리야.”

“설명을 더 길게 해 줘서 고맙지만 솔직히 확 와닿지가 않네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고나 해야 하나….”

“아까 전에 싸웠던 용병이랑 마족 노인이 두 사람에게 용사가 어쨋거니 마왕이 어쨋거니 하는 말을 몇 번 하긴 했죠.”

믿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실감 자체가 나지 않았다언니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전에 보고 겪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던 마릴은 싸우는 내내 로덴이 붙들고 있던 무기를 기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로덴 오라버니가 휘둘렀던 새까만 무기는 분명히….”

끝말을 흐린 그녀는 구석자리에 내려둔 배낭으로 향하더니 그것을 뒤적거려 낡은 책을 찾아냈다쌍둥이 자매가 어렸을 때 읽은 이후로 쭉 간직하고 있던… 용사에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다

당시에 알트마 왕국 측에서 상당한 공을 들여 출판한 책이었기에 가격도 은근히 비싸며 일부 페이지에는 삽화도 담겨 있었는데그중에는 용사가 사용했던 『칠흑의 검』에 대한 삽화와 묘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리에 돌아온 마릴은 테이블 위에 책을용사의 무기가 그려진 페이지를 쫙 펼쳐냈다책에 나와있는 무기는 로덴이 들고 있던 흑검과 상당히 유사했다

“…허어딱히 읽어보진 않아서 여태껏 몰랐는데책에 이런 것까지 적혀 있었군.”

책이라… 마침 잘 됐네입만 나불대는 것보다는 무언가 증거물이 하나라도 있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신뢰를 얻을 수 있겠지

“너희가 애지중지 하고 있는 이 책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이 녀석은 내가 용사라고 불리던 시절에 줄곧 사용했던 파트너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도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한 로덴은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흑검을 검집째로 다시 꺼내 들어 쌍둥이 자매에게 건네주었다

ㅡ스르릉

흑검을 받자마자 누가 뭐라고 할 거 없이 각자 손잡이와 검집을 잡고 천천히 뽑아낸 쌍둥이 자매는 흑검에서 은은하게 뿜어지는 마력과 광채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게 상위 마족들의 뿔을 정제해서 만들었다는 칠흑의 검인가요? 실물을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야야짝퉁일 수도 있어.”

“…아니거든.”

눈을 가늘게 떠서 메림을 쏘아본 로덴은 쌍둥이 자매에게 건네주었던 흑검을 돌려받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만으로 내 말을 온전히 믿어주기는 힘들겠지만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이 책에 적혀있는 내용들이 나의 대략적인 과거사다.”

“그러면 마왕성에 침입한 토벌대 전원이 마왕하고 함께 쓰러졌다는 결말은?”

“맨 마지막 부분은 진실하고 조금 많이 다르지용사는 공식적으로 그때 죽었지만보시다시피 나는 그 이후로 이름을 바꾸고 모습을 숨긴 채 나름대로 조용히 살아왔어.”

로덴은 그 당시에 단 한 명을 제외한 토벌대 전원을 몰살하고 혼자서 마왕과 싸웠다는… 지저분한 진실까지는 굳이 입에 담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다뤄야 할 문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정보이며지금껏 이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용사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쌍둥이 자매가 그 사실까지 알게 되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테니 말이다

한편쌍둥이 자매는 은근히 궁금해하고 있었던 로덴의 정체가 지금껏 책에서만 접한 동경의 대상인 용사라는 사실을 아직도 믿기 힘들었지만그녀들이 생생히 목격했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수준의 강자끼리의 싸움을 다시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했다.

로덴과 쌍둥이 자매가 이야기를 더 나누려는 순간

ㅡ똑똑똑!

“들어와도 좋습니다.”

“주문하신 음식들을 가져왔습니다손님.”

방을 잡았을 때 같이 주문해둔 식사를 챙겨 온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음식들을 식탁 위에 하나 둘보기 좋게 올리기 시작했다

“…달리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불러주세요.”

잠시 후상당히 많은 음식이 식탁에 놓여졌다평소에 그들이 먹는 양과 비교하여 배는 많은 양이었으나 과분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으로 소모한 에너지와 흘린 피를 식사 활동을 통해 최대한 보충해야 하니까

“일단은 먹으면서 얘기할까?”

“네.”

“알았어.”

일행은 식사를 하기 직전침대에 눕혀두었던 록시아를 살살 흔들어서 깨워보려 했지만 그녀는 눈썹을 살짝살짝 움찔거리기만 할 뿐일어나진 않았다

“아무래도 상당히 깊게 잠들어버린 모양이네억지로 깨우기보다는 이대로 푹 자게 두는 게 좋겠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린 쌍둥이 자매와 함께 식탁에 앉은 로덴은 셋이서 식사를 시작하면서도 록시아를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보면 알겠지만 나하고 록시아는 삼촌하고 조카 관계가 아니야.”

“뭐그야 당연하겠지로덴 오빠는 인간이고 록시아는 마족이니까….”

종족이 다르니 친척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윽고 로덴은 이 영지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간이 경매장에서 이종족 성노예로 팔리고 있던 마족 소녀를 처음으로 마주하고희미하게 느껴지던 마기를 통해 그녀가 마왕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곧바로 구매함으로써 시작된 인연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같이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가게에 맨 처음으로 방문한 너희 하고도 만나게 된 거지.”

“그런 이유 때문에 조금 전의 록시아가 오라버니한테 주인님이라고 불렀군요.”

“응남들이 볼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삼촌으로 불러도 좋다고 말해보긴 했는데저 아이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계속 고집하더라고.”

로덴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성노예로 팔리던 록시아를 구매했고여태껏 그 사실을 숨겨왔지너희가 봤을 때 내가 많이 경멸스러울려나?”

“만약에 오빠가 신분 차이를 이용해서 록시아를 혹사시켰다면 아마도 경멸했겠지만.”

“그러지 않았잖아요지금까지 두 사람을 계속 지켜봤으니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어요오라버니랑 함께 있는 록시아가 진심으로 행복해했다는 걸.”

“그래? 좋게 봐줘서 고맙네.”

행복인가… 확실히 록시아랑 같이 지내고 나서부터는 외롭다거나 허전하다는 생각이 거의 안 나게 됐었지그녀에게 마왕의 힘이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고

쌍둥이 자매와 이야기하다가도 고개를 돌려서 곤히 자고 있는 록시아의 모습을 눈에 새긴 로덴은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들을 오늘 벌어진 사건과 연결하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의 난장판을 벌인 마족들의 이름이 에스카로스하고 멀린이다.”

에스카로스는 멀린 놈한테 속거나 조종당하는 낌세였지만

쌍둥이 자매는 한쪽은 마계국의 일인자다른 한쪽은 대마법사로 널리 알려진 거물인 두 마족의 이름을 듣자눈을 크게 떴다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몰라도 녀석들은 구세대의 용사인 나랑 이번 세대의 마왕인 록시아를 노리고 있고아직 포기하지도 않았어.”

로덴은 차원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주 본 멀린의 눈빛을 떠올렸다

네 녀석이 어디에 있든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다시 찾아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깃든 눈빛이다

식사를 모두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로덴은 누워있는 록시아의 머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이대로 우리가 계속 지낸다면 머지않아서 습격이 또 일어날 거야더 철저히 준비한 다음에 수작을 벌이겠지오늘처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녹슬었던 실력도 다시 되살릴 겸나는 앞으로 록시아랑 함께 긴 여정을 시작하려고 해.”

여행의 끝에서 악연을 끝내야지

돌아갈 장소인 집도 완전히 박살난 상황이니 지금이라면 큰 미련 없이 이 땅에서 떠날 수 있다그렇다면 남은 걱정거리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쌍둥이 자매인데…

“너희는 어떡할래?”

“우리도 당연히 로덴 오빠랑 록시아랑 같이 갈 거야.”

“오늘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 잔뜩 생길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그래도 상관없어요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두 사람을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희도 같이 따라가고 싶어요.”

메림과 마릴이 보여주고 있는 표정에는 굳건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었기에 로덴은 두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두 사람을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해버려서 미안해알았어이대로 넷이서 같이 떠나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졌고슬슬 피로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여행의 방향성이 포함된 상세한 계획을 짜는 것은 일단 내일로 미루기로 하며 당장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세 사람은 종업원을 불러 식기들을 말끔히 치우고는 다 같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로덴의 양 옆에 앉은 쌍둥이 자매는 소실되어 버린 왼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분명… 그 팔을 고칠 방법이 있다고 했던가요?”

“분명아티팩트가 어쩌고 했었는데….”

“아까 전에 이거 먼저 얘기하려다가 뚝 끊겨버렸었지.”

방을 잡고공복을 채우고쌍둥이 자매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하느라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왼팔의 문제를 뒤늦게나마 해결하기로 했다

손을 뻗어서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로덴은 과거에 던전에서 습득한 이후로 여태껏 묵혀두고만 있던 아티팩트를볼링공 만한 크기의 쇠구슬을 꺼내 들었다

정식 명칭은 마력 구동 생체 금속구

전투를 끝낸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팔이가 얼마큼 불편한지 짧게나마 몸소 체험하게 된 로덴은 망설일 것도 없이 생체 금속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으며 왼팔의 절단면에 밀착시켰다

인벤토리를 정리하면서 이 녀석이 집힐 때마다 공간만 잡아먹는다고 투덜거렸는데 결국에는 써야 하는 순간이 와버렸군착용방법은 분명히 이렇게 해서…

보관하고 있는 동안 다양하게 시도했던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용법을 떠올린 로덴은 왼팔의 절단면을 통해 밀착하고 있는 생체 금속에 마나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곧바로 반응을 보여준 생체 금속은 공의 형태를 서서히 벗어나꾸물렁꾸물렁 거리며 맞닿아 있는 절단면을 완전히 뒤덮더니…

ㅡ슈르륵! 푸푹­푹!

식물이 땅에 뿌리를 박는 것처럼 가느다란 촉수 형태로 변형된 생체 금속 여러 가닥이 왼팔을근육을 파고 들어가 신경과 접촉했다

…!

신경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과 동시에 연결이 되는 강렬한 통증을 느낀 로덴은 신음성을 흘렸다

의수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통이 있으리라 어렴풋이 예상은 해두었다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손톱 바로 밑에 있는 살 속에 가느다란 철사 여러 개가 무자비하게 파고드는 기분이랄까… 방안에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새찬 비명까지 질렀을 거 같다

…진통약이라도 먹어둘걸 그랬나

굵고 짧은 종류의 격통이었기에 뒤늦게 후회해봤자 한발 늦었다

고통을 곱씹고 있는 로덴을 줄곧 바라보다가 손수건을 꺼내 든 마릴이 흘러나오는 땀을 닦아주었다

“오라버니괜찮으세요?”

“후… 잠깐 따끔거린 정도야신경 써줘서 고마워마릴.”

반면로덴의 얼굴보다는 왼팔의 변화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던 메림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오빠가 말한 아티팩트구나…근데 모양이 좀 거시기한데….”

로덴의 몸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며 신경이 연결된 생체 금속의 맨 끝부분은 반질반질한 구형을 하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매우 단순해 보였다

…이거 완전히 도라에몽 손이네

속으로 피식 웃은 로덴은 생체 금속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평상시에 사용하던 왼팔을 이미지 했다그러자 즉각적으로 반응한 생체 금속이 다시금 변형되기 시작하더니 온전한 왼손이 되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닌 금속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은색을 띄고 있는 점을 제외하면 진짜 손과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형태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