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마왕 록시아 (3)
* * *
쿨럭쿨럭연신 피를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멀린은…
“당장 에스카로스 오빠를 원래대로 돌려놔!”
ㅡ퍼어어엉!!
숨 돌릴 여유조차 없이 연달아서 마법이라는 이름의 폭격을 가하는 록시아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대해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공격과 방어를 하는 입장이 서로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록시아가 손가락을 튕겨내면 폭발이 일어나고어딘가를 지목하면 수십 다발의 얼음 화살과 전격이 쏟아지고손날을 휘두르면 보이지 않는 칼이 날아들고손을 움켜잡으면 손 모양의 바위손이 솟아나는 등등
본래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완성되는 마법을 가벼운 손짓과 머릿속의 이미지 만으로 순식간에 구현화시키는 마왕 록시아의 권능은 무시무시했다
멀린이 상식을 벗어난 공세를 버텨낼 수 있던 비결은 지금의 록시아 못지않을 정도로 빠르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대마법사에 걸맞은 연산 능력과 지금껏 쌓아 올린 기나긴 세월에 비례하는 경험과 역량 덕분이다
“아…안 돼! 이런 촌구석에서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못했다뼈와 내장이 손상돼버릴 정도의 부상을 입은 탓에 육체와 정신의 한계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적의 사정 따위를 봐줄 리 없는 록시아가 외통수로 몰아붙인 녀석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다음 마법을 시전 하려는 순간
ㅡ스르르륵
온몸에서 용솟음치던 마기가 잠잠해지는 것과 동시에 검게 물들었던 록시아의 흰자위가 원래대로 돌아왔고형상화시키고 있던 마법이 캔슬됐다
“…!”
마법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아?
눈을 크게 뜬 록시아는 생각만으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반칙과 다름없는 자신의 권능을 당장 더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로덴과 쌍둥이 자매를 치료하고멀린과 치열한 마법 대전을 펼치며 권능을 연달아서 사용한 대가로 대부분의 마기를 소모한 것이다
처음으로 휘두르게 된 힘의 한계치를 그녀 스스로가 잘 몰랐기에 벌어진 불상사였다
난관에 봉착해버린 멀린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기를 모두 소모한 마왕 록시아를 역으로 처리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끄으읏…! 우리 아직 살아있었네?”
소란 속에서 가장 먼저 의식을 되찾은 메림이 주변을 두리번거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환경과 록시아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지다가도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로덴과 동생을 부르며 뺨을 가볍게 찰싹거렸다
“오빠! 오빠! 마릴!! 마아릴!! 퍼뜩 일어나!!!”
ㅡ짝짝짝!!
“아파….”
메림의 목소리와 손바닥이 닿은 로덴과 마릴도 뒤를 이어서 몸을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기랄용사 놈이 다시 일어나 버렸어
…지금의‘육체’로는 무리겠군놈들을 처리하기는커녕 마왕을 각성시켜버리다니…
멀린은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해 버리고 중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에스카로스까지 자신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로덴 일행을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ㅡ스팟! 우우웅!
블링크를 써서 에스카로스의 옆으로 이동한 멀린은 남은 마나를 모조리 쥐어짜내 마계국과 연결되어 있는… 동그란 구멍 같은 모양의 차원문을 만들어냈다
워낙 급하게 만들어낸 차원문이라 여러 가지로 불안정했지만 그런 문제를 따질 여유는 없다일단은 여기서 탈출하고살아남아서 다음 기회를 도모하는 게 최우선이다.
“쿨럭…! 크허억!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지만 다음에는 내 너희들을 기필코….”
피를 토하면서도 에스카로스를 겨우겨우 조종하여 먼저 차원문에 들어가게 한 멀린은 마지막으로 로덴과 록시아의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기면서 차원문으로 몸을 던졌다
“거기서!!”
이제야 막 일어나게 된 로덴이 서둘러 뛰어가서 멀린을 붙잡으려 했지만 한발 늦어버렸다녀석의 몸은 이미 차원문을 통과한 상태다
“젠장코앞에서 사라져 버렸군.”
지금이라도 당장 차원문에 뛰어들어서 저놈을 뒤쫓고 마무리를 지어야 할까?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눈앞에 열려있는 차원문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을지 완전히 미지수고어쩌면 이것 자체가 함정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기에 함부로 따라갈 수 없었다
ㅡ스르륵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이마계국과 연결된 차원문이 완전히 닫힘과 동시에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로덴은 후환이 될 것이 분명한 멀린을 처리할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살짝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록시아를 향해 눈을 돌렸다
“록시아….”
“주인님….”
이번 일을 계기로 마왕으로 거듭나게 된 록시아의 모습은 로덴이 의식을 잃기 전과 비교하여 확연하게 달라져 버렸다
한없이 여린 소녀라는 인상을 주던 앳된 외모는 한층 더 무르익어 이제 막 꽃봉오리를 피운 꽃에 비교해도 커다란 실례가 될 정도로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여인의 그것으로 거듭났고마족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상징성을 보여주는 뿔도 이전보다 더욱 커다래지면서도 한 바퀴 말려있는 독특한 형태가 되어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성숙해진 느낌을 물씬 풍기게 된 록시아는 순서대로 눈을 마주친 로덴과 쌍둥이 자매를 바라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메림 언니마릴 언니… 모두들 다시 눈을 뜰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
주인과 언니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가던 록시아의 발걸음이 점차 비틀거리더니 스르르 눈이 담긴 그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ㅡ파밧!
바닥에 쓰러지는 대신재빠르게 뛰어간 주인의 품에 폭 안긴 채 의식을 잃어버렸다바로 옆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쌍둥이 자매가 적지 않게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록시아?!”
그녀들이 달려오는 록시아의 상태를 가볍게 진찰한 로덴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안심해깊은 잠에 빠진 것뿐이야.”
격정에 휩싸여 대부분의 마기를 소모한 반동으로 몰려온 수마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강제로 깨우지 않는 한 꼬박 하루가 지나야 눈을 뜰 수 있다
“휴우우~ 단순히 자고 있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로덴 오빠왼쪽 팔….”
“완전히 없어져 버린 거죠?”
쌍둥이 자매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다른 것 보다도 가장 시급해 보이는 로덴의 왼팔을 바라봤다
맹렬한 지옥불에 당해버린 왼팔은 팔꿈치 아래에서부터 전소되어 버렸다
타다가 만 장작이 연상되던 절단면은 록시아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말끔한 모양새가 되었으며 딱히 이렇다 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그렇지.”
자기 나름대로 이런저런 업보를 쌓으면서 지금껏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정작 팔을 잃어버리게 된 로덴 본인의 반응은 상당히 무덤덤했다
반면로덴의 대답을 들은 쌍둥이 자매는 상당히 어두워지려는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는 만에 하나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더라도 절단된 부분이 심각하게 손상되지만 않으면 치료 마법이라던가 포션이라는 회복 수단을 통해 어렵지 않게 수복시킬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었거나없어져 버린 경우에는… 죽음 이외의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전설 속에나 나올법한 궁극의 비약인 『엘릭서』외에 소실된 신체를 재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가 남은 평생을 외팔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와 일치하였기에 한없이 착잡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마없어진 팔은 어떻게든 고칠 방법이 있거든.”
“…고칠 수 있다니?”
“서설마 로덴 오라버니는 엘릭서를 갖고 계시는 건가요?”
로덴의 말을 듣자마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쌍둥이 자매는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조금 전에 보게 된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사건 사고를 생생히 목격해버린 그녀들은 이제 뭐가 나와도 놀랄 것이 없을 지경이었기에 로덴의 품에서 엘릭서가 튀어나와도 납득이 갈 거 같았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물건은 아니고내가 옛날에 던전에서 찾아낸 아티팩트가 있거든어디 보자….”
록시아를 안고 있는 자세를 고친 로덴이 남은 팔로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려는 순간
ㅡ우르르르르…!!
주변 지대를 둘러싼 얼음 기둥들은 창조자인 멀린이 멀찍이 떠나간 영향으로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지금까지 얼음 기둥을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완전히 무장한 경비원들이 포위하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무구를 착용하고 있는 경비대장 버헴이 앞장서서 로덴 일행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집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군… 로덴 선생!! 다른 식구들은 괜찮소?!”
“아버헴 씨일단 치료를 해둬서 보기보다는 멀쩡한 상태니까 저희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영지에 정착한 지 1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기에 경비대장인 버헴과 어느 정도 면식이 있던 로덴은 경비병의 모습을 보자마자 흑검을 인벤토리에 도로 넣어두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버헴은 로덴의 모습을 보다가 왼팔의 상태를 알아챘다
“멀쩡하다니… 왼팔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잖소! 도대체 지금까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그 굉음들은 대체 무엇이고?”
“이거 참 뭐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로덴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로덴 말고도 다른 일행들을 눈에 담은 버헴은 그에게 안겨있던 록시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에 솟아나 있는 뿔을 뒤늦게나마 인지했다
“마족…?”
적어도 버헴이 알고 있기로는 이 영지 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마족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소동을 일으킨 범인이 이 마족일까? 라는 생각이 스치다가도 로덴이 마족 여인을 한없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의심이 도로 사그라든다
더군다나 마족임을 상징하는 뿔과 귀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성숙해진 느낌이었지만 이 사람 역시 버헴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인상이다
“설마 그 마족… 록시아 양이오?”
“…예사정이 좀 있습니다.”
사실을 숨길 수 없는 상황에서 어설픈 거짓말을 꺼내는 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다로덴은 말이 나온 김에 이번 사건에 관한 증언 또한 일부의 진실을 뒤섞어서 버헴에게 전해줬다
“실은 제 가게를 습격한 범인들… 아무래도 이 아이를정확히는 마족을 노리기 위해서 쳐들어온 모양새 같았습니다.”
“마족을 노렸다는 말인 겐가?”
거기까지 들은 버헴의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간 것은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마족 살해범에 관한 소문이었다
녀석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다는 생각에 이를 바득바득 간 경비대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로덴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로덴 선생놈들은? 그놈들은 어디로 도망쳤소? 감히 우리 영지에서 이딴 테러를 벌이다니…”
“조금 전까지 주변에 펼쳐진 얼음 기둥을 생각하면 알 수 있겠지만상당한 수준의 마법사가 있었습니다그리고 녀석들은 마법으로 도망가버린 상황이죠.”
도시 안에서 난동을 녀석들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말한다면 똑같은 마족 출신인 록시아의 입장도 자연스럽게 더 안 좋아질 거야일단 범인은 인간 절대주의 세력으로 생각하게끔 애매하게 대답하자
거기까지 생각하며 쌍둥이 자매에게 말을 맞춰달라는 사인을 은밀하게 보낸 로덴은 곤히 잠든 록시아를 안고 있는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피곤한 표정을 보였다
“보시다시피 난데없이 습격을 당하고가게가 박살나버린 입장이라 심신이 지쳐버려서 슬슬 쉬고 싶습니다만… 버헴 씨이번 일에 관한 구체적인 진술은 다음번에 해도 괜찮겠습니까?”
“으음….”
잠시 고민한 버헴은 로덴과 록시아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휴식이 필요한 모습이긴 하군알겠소자세한 증언은 가까운 시일에 듣는 걸로 하도록 하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됐소우리가 가장 필요했을 순간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지현장을 조금 더 확인하고 돌아가겠소.”
그렇게 해서 로덴과의 이야기를 끝마친 버헴은 부하들과 함께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야 그들을 물리며 영주에게 돌아갔다
싸움 때문에 집이 완전히 박살 났으니 이곳에서 쉴 수는 없다
곧장 도심지로 진입한 로덴 일행은 주변의 시선을 뿌리치며 여관으로 들어가4명이 넉넉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방을 잡았다
함께 다인실에 입장하고서 록시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혀두는 동안쌍둥이 자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질문을 받았기 때문인 아닌 순수한 로덴의 의지로 사정을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너희들도 완전히 휘말려 버렸으니 마땅히 알 권리가 있겠지.”
쌍둥이 자매와 함께 방의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 앉은 로덴은 한숨을 몰아쉰 뒤가장 핵심이 될 결정적인 말을 맨 첫 번째로 꺼냈다
“얘들아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용사고록시아가 마왕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