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마왕 록시아
* * *
제정신이 아닌 에스카로스와 접전을 벌이고 있던 와중그에게 과도하게 집중한 탓에 후방에서 멀린이 날린 마법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했다
한순간의 안일함의 대가로 로덴의 왼팔이 지옥불에 뒤덮여 버리기 직전의 찰나의 순간
제기랄이 속도하고 각도… 무사하게 피하기는 글렀어하다못해 몸이라도…!
헬파이어 블레스트에 담겨있는 막대한 열기와 마나를 가늠한 로덴은 직접 노출된 부위를 보호해도 의미 있는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열기에 의한 간접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기로 빠르게 판단한 로덴이 공격에 닿기 직전인 왼팔을 제외한 온몸에 효율적으로 오러를 분배하는 것과 동시에
ㅡ화르르르륵!!!!!!
나선을 그리는 지옥불이 로덴이 있던 자리를 빔처럼 일직선으로 지나쳤고지옥불에 직격 당한 왼쪽 팔은 팔꿈치 바로 아래서부터 재조차 남는 일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소당했기에 타다가 남겨진 장작처럼 바짝 타버린 절단면에서는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크으윽….”
더럽게 아프긴 하지만 고통을 호소할 틈도 없을 정도로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출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과 마법에 직격 당한 왼쪽 팔 이외에는 피해가 미미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아…
아ㅡ!!!
“안 돼애애애ㅡㅡㅡ!!!”
사랑하는 이의 몸의 일부가 소실되는 광경을 생생하게 바라보게 된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의 째질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서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은 로덴이었지만
“크하아앗!!”
ㅡ파지직! 쿠르으응!!
지옥불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벌렸던 에스카로스의 대검에서 쏘아진용의 머리를 본뜬 형태의 번개가 그녀들을 노리고 있었기에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흑검을 쥐어잡아서 재빠르게 몸을 날린 로덴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번개용을 여러 차례 베어냈다
그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접근한 에스카로스가 맹렬하게 휘두르는 대검을 막아내며 조금 전의 공방을 이어나간다
“하아… 하ㅡ! 한 손으로만 싸우려니까 조금 많이 힘든데.”
만약에 이대로 속절없이 당해버린다면 멀린 놈은 목표물인 나하고 록시아는 물론이고그 옆에 있는 쌍둥이 자매까지 모조리 죽일게 뻔하겠지
망할 놈… 그렇게 둘까 보냐
불의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바람에 한쪽 팔이 소실되는 중상을 입어버렸지만로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굳혀두며 싸움에 임했다
한편자신이 날려 보낸 마법으로 숙적의 팔을 날려버리는 것에 성공한 멀린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흐흐흐일격으로 보내버릴 작정으로 사용한 마법이었지만… 설마 녀석이 나하고 같은 꼴이 돼버릴 줄이야뭐이건 이것대로 괜찮은 그림이군.”
오래전에 멀린의 왼팔을 잘라낸 로덴이 자신과 똑같은 처지가 돼버린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클클거린 노마법사는 그의 뒤편에 있는 록시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웃음기를 싹 지워냈다
당장은 마법을 조금 다룰 수 있는 수습 마법사 수준의 계집이지만지금의 위기 상황 자체가 힘이 깨어나는 계기가 될 위험성이 있어
저런 커다란 변수를 곱게 방치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지일 초라도 빨리 처리해야만 해
“…….”
ㅡ치이잉
그리 생각하며 주문들을 완성시킨 멀린은 마법으로 만들어낸 커다란 얼음창을 공중에 둥둥 띄어 올리다가 한창 싸우고 있느라 바빠 보이는 로덴을 향해 날려 보냈다
내가 같은 수법에 두 번씩이나 당해줄 거 같았냐?
“어디서 개수작을…!”
이미 한번 기습 공격을 당해 버렸던 만큼에스카로스와 접근전을 벌이면서도 후방에 있는 멀린에 대한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있던 로덴은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얼음창을 절반으로 쩌억 갈라냈다.
장기전으로 상당히 많은 기력을 소모한 것도 모자라 중상을 입어버린 로덴을 상황을 고려하면 훌륭한 방어였지만
사실 멀린은 로덴의 시선을 빼앗을 얼음창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은밀하게 만들어낸 자그마한 얼음 파편 여러 다발을 우회시켜서 록시아에게 날려 보냈었다
양쪽 방향에서부터 소리 없이 날아들고 있는 예리한 얼음 파편들이 마족 소녀의 목숨을 취하려고 한다록시아의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모습을 미리 상상한 멀린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내려는 순간…
ㅡ티잉! 팅!
ㅡ화르르르륵!!
“세상에… 저 사람지금 록시아를 진심으로 죽일 작정이었어…!”
“그러게 말이야덩달아서 저 재수 없는 노친네가 우리 둘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던 모양인데?”
로덴이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 록시아의 옆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던 쌍둥이 자매메림과 마릴이 양방향에서 날아드는 얼음 파편들을 마법으로 녹이거나 방패와 검으로 쳐내서 록시아를 지켜주었다
현재 쌍둥이 자매가 느끼고 있는 심정을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면 혼란 그 자체
오늘도 평소처럼 길드의 의뢰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넷이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의뢰를 하는 동안 겪었던 일들을 신나게 떠들고 있을 시간일 텐데…
돌아와 보니 함께 살던 집은 처참히 부서져있고로덴은 조금 전까지 마차에서 떠들던 용병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고록시아는 그녀들이 알고 지내던 모습이 아닌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커다란 폭풍에 휩쓸린 낙엽이 돼버린 기분이랄까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쌍둥이 자매는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멀린의 마법이 록시아의 목숨을 위협했을 때메림과 마릴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마족 소녀를 지키기로 했다
“록시아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상황인지 우리들로서는 아직도 영 이해가 안 되지만.”
“로덴 오라버니가 앞에서 싸우고 있는 지금너는 우리가 꼭 지켜줄게.”
“메림 언니마릴 언니….”
종족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 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그녀가 인간이든 마족이든 자기들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록시아라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으니까
언니로서또한 어른의 도리로서 이 소녀를록시아를 지키겠다고 굳게 결의했다
“끄으윽… 저 버러지 같은 계집들이 쓸데없는 짓거리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이 이를 갈면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로덴을 향해 최상위 대인 마법인 헬파이어 블래스트를 사용한 반동으로 한동안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 힘들지만 저런 모험가 나부랭이 계집 둘쯤이야그런 걸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갈아버릴 수 있다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최대한 알맞은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메림은 살상용 마법들을 캐스팅하고 있는 멀린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면서도 멋쩍어하는 얼굴을 하며 록시아를 불렀다
“아하하… 있는 폼없는 폼 잡아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저 노인보통내기가 아닌 거 같거든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야록시아도 내 옆에서 마법을 좀 보조해주렴.”
“네! 언니저도 같이 싸울게요.”
“후후대답 잘하네그동안 꾸준히 배웠던걸 철저하게 복습할 시간이야.”
그렇게 하여 로덴이 에스카로스와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는 멀린이 캐스팅하는 마법들을 막기 위해 셋이서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 * *
멀린이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를 향해 본격적으로 살상용 마법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지 약 10분이 지나갔다
“하앗…! 하아아아!!”
“으읏머리가….”
짧은 시간에 체내에 있는 대부분의 마나를 소진해버린 메림과 록시아는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다음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고
“크으으윽!”
미처 막아내지 못한 얼음에 찔리거나불에 데거나물에 베이거나돌덩이에 가격 당한 마릴은 피와 멍이 가득히 새겨진 몸을 일으키며 반쯤 망가진 방패와 검을 겨우겨우 들었다.
ㅡ카앙! 깡! 파지직! 콰아앙!
마지막으로 로덴은 여전히 한 손만으로 에스카로스를 어떻게든 상대하고 있느라 그녀들을 돕지 못한 채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로덴 일행의 모습을 보던 멀린은 슬슬 마무리를 지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모험가 나부랭이 치고는 제법 오래 버텼군저승에서 자랑거리로 삼아도 좋을 정도야…한 가지만 물어보겠다어째서 인간인 네년들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마족을 지키려는 거지?”
“이봐영감탱이그딴 게 질문이야? 언니가 동생을어른이 아이를 지키는데 거창한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는 법이라고!!”
“하… 시시한 이유였구먼뭐됐어이걸로 끝이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면서도 더블 캐스팅을 끝마친 멀린이 한쪽에는 얼음 파편들을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불덩어리를 만들어내어 세 여자가 있는 공간을 향해 동시에 발사했다
ㅡ푸푹! 푸푸푹!
ㅡ퍼어어엉!!
검과 방패로 얼음 파편들을 막아내다가 한계에 달한 마릴은 팔과 다리 배에 차디찬 얼음들이 꽂히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고
남은 마나를 쥐어짜 내 불덩이를 상쇄시킨 메림은 마나 고갈로 인한 반동으로 눈과 코귀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ㅡ파지지지익!!
“……!!!”
그녀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싸우고 있던 로덴도 결국 에스카로스가 내리꽂은 벼락에 의해 쓰러져 버리자일행 중 유일하게 일어서 있던 록시아는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 때문이다
나 같은 것 때문에 주인님과 언니들이 이런 꼴을 당해버렸다
…라는 생각과 죄악감이 소녀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몰려나오는 슬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탓에 죄책감은 눈물이라는 형태로 흘러나왔다
“주인… 끅! 님… 흐윽! 메림 언…니 으흐으으읏…!! 마릴 언니이…!!! ”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덴과 쌍둥이 자매는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위독해 보였다생명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ㅡ뚝.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다가 말고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어 올린 록시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증오심을 담은 눈빛으로 멀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 녀석은 오랜만에 다시 재회하게 된 에스카로스 오빠의 몸과 마음을 조종했다
저 녀석은 주인님의 왼팔을 태워버렸다
저 녀석은 메림 언니와 마릴 언니를 상처 입혔다
저 녀석은 우리들의 일상과 집을 무너뜨리고소중한 주인님과 언니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힌 적이다
저 녀석이 밉다
저 녀석을 죽이고 싶다
ㅡ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 사실을 상기했을 때 록시아의 마음과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을 타고났기에 빈민가에서 두들겨 맞을 때도같이 피난길에 오른 친구들에게 배신당했을 때도노예상인들에게 채찍질을 당했을 때도 단 한 번도 남을 미워해보지 않았던 소녀의 마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증오와 악의에 검게 물들었다
ㅡ빠직! 파지직!
록시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마기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싹 달라졌다
마기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자라버린 뿔은 더욱 위협적인 모양새를 뽐냈고눈동자 주변의 흰자위는 솟아오르는 마기로 인해 검게 물들어 버렸다
새로운 마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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