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19화 (119/149)

〈 119화 〉 대적자 (10)

* * *

에스카로스가 과거에 에시드라는 이름을 하고 있던캄바우의 시설에서 같이 생활한 아이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하던 유년기 시절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기억 속에 깊숙이 남아 있는 한참 아래의 동생이 있었다

그 아이는 또래들보다 체격이 작았고행동도 느리고겁도 많았다즉약하다

기초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며 몇 가지 엄격한 생활규칙을 내리기만 할 뿐아이들끼리의 일에는 딱히 관심을 주지 않고간섭도 하지 않는 환경인 시설에서 약자로 찍힌 아이는 여러 가지 의미로 먹잇감이 되기 쉽다

자연스럽게 또래들의 먹잇감이 돼버린 아이가 별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안 그래도 모자란 배식을 절반 이상 빼앗기는 광경을 매일같이 지켜보면서 적지 않은 불쾌함을 느낀 에스카로스는 참다못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가 이마를 한대 쥐어박으면서 분노를 표출한 대상은 가해자 쪽이 아닌괴롭힘을 당하던 피해자… 어렸던 소녀다

ㅡ꽁!

“아야앗……!”

“야! 저항 한번 안 하니까 다른 놈들이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너만 노리잖아.”

“괜히 어설프게 반항하면 더 심해지는걸요어차피 저 같은 건 이기지도 못할게 뻔하고…”

ㅡ꽁!

에스카로스는 다시 한번 어린 소녀의 이마를 쥐어박으면서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이기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찍소리 못하고 그따위로 살고 싶다고? 넌 그게 좋냐? 어?”

“…끄으읏…좋지 않아요.”

연달아서 이마를 얻어맞은 소녀는 억울한 표정을 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소년이 시설의 아이들 중 확고한 실세인 에시드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기에 그만 때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무서우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옆에서 이딴 모습을 계속 봐야 되는 나도 짜증 나서 참기 힘들었거든이제부터 날 따라 하면서 주먹 쥐고 자세 잡아.”

“주주먹은 갑자기 왜요?”

“뭐긴 뭐겠어이제부터라도 네 힘으로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지.”

“저기… 그냥 에시드 오빠가 시설 아이들 중에 가장 강하니까… 걔네한테 저를 못살게 굴지 말라고 딱 한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차라리 그게 훨씬 간단하고 빠를…”

ㅡ꼬옹!!!

이것으로 세 번째이마에 구멍이 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어버린 소녀는 눈가에서 눈물이 그렁그렁거렸다

“끄으윽…!”

“네 문제는 네 손으로 직접 해결해함부로 건드리면 너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라고.”

“…네.”

살며시 부어올라 버린 이마를 매만지던 소녀는 어설프게나마 상대방을 따라 하며 주먹을 꾹 쥐었고소년은 본격적인 주먹싸움을 알려주기에 앞서 뒤늦게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아참너이름이 뭐였더라?”

“로록시아예요.”

그렇게 대화를 나눈 날을 기점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록시아에게 주기적으로 몸싸움 기술을 알려주기 시작한 에스카로스는 나름 괜찮은 근성을 보여준 그녀를 유난히 신경 써줬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찼을 때의무적으로 받은 측정을 통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서 시설에서 안내를 받아 그의 후견인이자 교육자가 될… 대마법사 멀린이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되어 이름을 새롭게 바꾸게 된 그날까지

* * *

그리고 지금두 마족 남녀는 서로 마주 서 있었다

록시아는 로덴과 에스카로스의 사이에 끼어있는 채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얼굴을 하고 있고,

에스카로스는 들고 있던 대검을 비스듬히 내려놓아서 지면에 닿게 하면서도 언제든지 다시 휘두를 수 있게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한창 싸우고 있던 도중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이런 곳에서 록시아너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에시드 오빠는 겉모습 만이 아니라 말투도 많이 변해버렸네요뭐랄까… 근엄한 느낌이 들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그리고 지금의 내 이름은 에스카로스다.”

뜻밖에 만나게 된 인연인 록시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에스카로스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적지 않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자세히 보니까 총명함마저 드러날 정도로 눈빛이 또렷해자신만의 확고한 생각과 이념을 품고 있는 이의 눈이야세뇌의 영향을 받아서 자의식이 혼잡한 상태로는 보이지 않는데…

마왕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멀린에게 미리 들었던구제할 방도가 없을 수준으로 세뇌당했다는 이야기와 눈앞에 있는 록시아의 상태는 확연하게 달랐다

원래의 계획은 용사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마왕의 그릇의 숨을 거두고서 에스카로스가 힘을 계승받는 것이었지만… 그 대상이 같은 시설에서 나름대로 돌봐준 인연인 록시아고정신도 멀쩡한 상태라면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느긋하게 들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나눌만한 장소도시간도 아니구나.”

에스카로스는 비어있는 손을 서서히 뻗어서 손바닥을 꽉 펼쳤다소녀에게 이 손을 잡으라는 듯이

“록시아나쁘게 말하지는 않겠다이대로 나하고 함께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자지금 당장.”

“마계국으로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왕성이지스스로 깨닫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네가 있어야 할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어찌 되었든 마왕이라는 명확한 구심점을 되찾을 수 있다면 마계국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터그걸로 충분해나하고 멀린이 이 아이를 잘 이끌어주면 될 뿐이야

“마왕성….”

록시아는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매우 지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로덴바로 뒤에서 나란히 서있던 쌍둥이 자매 메림마릴과 순서대로 눈을 마주쳤다

마족 소녀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과특히 주인님과 이대로 속절없이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금 에스카로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에스카로스는 조금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순순히 따라가는 대신 저 남자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네가 바라는 데로 저 남자를 더 공격하지 않겠다고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할 테니 이대로 얌전히 내 손을 잡거라그렇지 못한다면…”

ㅡ스르응

지면에 기대고 있던 대검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 에스카로스는 당장이라도 로덴을 공격할 수 있는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그는 로덴과의 전투로 인하여 적지 않은 부상을 입어 버렸지만 이대로 계속 싸워서 상대방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기력 정도는 남아있다

주인님…죄송해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소녀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로덴을 목숨을 지키기 위해 에스카로스의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릇을 처리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서 용사까지 이대로 살려두겠다니…에스카로스 님지금 내리고 계신 결정은 여러 가지로 많이 곤란합니다만….”

지금까지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멀린이 지팡이 소리를 크게 울리며 목소리를 내었고에스카로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니 네 녀석의 말과 달리 세뇌를 당했다기보다는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일단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백보 양보해서 그릇을 생포하는 것까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저 계집은 나중에라도 잘 구슬려서 죽이면 그만이니 말이지.

“지금 제압하고 있는 저 용사 녀석은 당장 숨통을 끊는 것이 무조건 옳습니다전대 마왕을 살해한 경력이 있는 그는 매우 위험합니다물론에스카로스 님이 훌륭하게 승리를 거머쥐시긴 했지만 이대로 불화의 씨앗을 남겨둔다면 한없이 위험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이 아이에게 약속을 나눈 상태다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지금은 내 결정을 따라다오.”

멀린의 말을 들은 에스카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말에 굉장한 설득력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번 꺼낸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굳혀두었기에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신념에 맞지 않는 설득에 결단코 응하지 않는 에스카로스의 대답을 들은 멀린은…

“하아아…쓸데없는 정에 사로 잡혀 버린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나 물러 터졌다니더는 안 되겠군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눈을 부릅뜨며 기이한 형태의 수인을 맺은 뒤마나의 파동을 에스카로스의 머릿속에 직접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방법만큼은 정말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자그럼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적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십시오.”

“크으으읍?! 으윽…! 멀린!! 너 지금 무슨 짓을…!!! 끄으윽….”

그러자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처럼 양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은 에스카로스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지독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억누른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에시드 오빠?!”

명백하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의 에스카로스를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를 낸 록시아는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바로 뒤에 있던 로덴이 그녀를 뒤에서 꽉 붙잡았다

“지금 저 녀석한테 다가가면 안 돼!”

“하지만 주인님! 에시드 오빠가….”

“내가 봐도 정상은 아닌 거 같긴 해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다가가다가는 녀석의 손에 죽을 거다.”

로덴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머리에서 손을 떼어내고 아무 말 없이 대검을 붙잡은 에스카로스는 지금까지 로덴과 싸웠을 때와는 달리흉흉하기 짝이 없는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스카로스가 갑작스럽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멀린에게… 조금 더 정확히는 머릿속에 심어진멀린의 특별한 마나가 깃든 수정 파편에 있다

검은 사냥개 대원들의 머릿속에 심어둔 것과 일치하는 이 수정 파편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추종하는 신도 혹은 나치에 강렬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독일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멀린의 말에 의구심을 품지 않게 하며그를 추종하게 만든다

표면적으로는 주군으로 삼고 있는 에스카로스에게는 평상시에 효력을 최소한으로 하여 무의식적으로 멀린의 말에 따르게 되는 수준으로 조절했지만지금처럼 마나를 주입하여 강제적으로 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

후후… 제대로 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유년기일 때 미리미리 손을 써야만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그것만 제외하면 가장 성공적인 연구였지

비열하게 웃은 멀린은 에스카로스가 다시 싸우기 시작하려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로덴 오라버니! 여기 받으세요!!”

ㅡ휘리리릭!

조금 전에 달려오는 길에 땅에 꽂힌 흑검을 미리 챙겨두었던 마릴이 흑검을 로덴에게 있는 힘껏 던졌고로덴은 그것을 요령 있게 받아내며 고맙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록시아를 쌍둥이 자매 쪽으로 피신시키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는 에스카로스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끄아하아아!!”

“흐읍…!”

ㅡ카앙캉! 카가가각…!!

다시금 시작된 두 남자의 공방전에스카로스가 품고 있는 살기는 어마어마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탓에 조금 전과 싸웠을 때와는 달리 특유의 정밀함이 한참은 모자랐다오히려 훨씬 할만하다

에스카로스와 검을 맞대고 있는 로덴이 상대방의 다음 수를 생각하며 최선의 선택지를 계산하고 있었을 때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던 멀린이 두 남자가 싸우고 있는 동안 허공에 그려낸 붉은 마법진이 완성이 되었다

선을 넘어버린 이상 일대일 따위를 고집할 이유는 없지

“나의 의지에 따라태고의 화염이적의 영혼마저 남김없이 태워버릴 지어다…헬파이어 블레스트.”

지옥계의 화염을 현세에 강림시키는화염계 최강의 대인 마법 헬파이어 블레스트가 로덴의 옆에서부터 나선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크읏…! 망할!!”

평소의 로덴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였지만 체력의 거의 빠져버린 상태에서 호적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느라 회피가 한 발 늦어버렸다

ㅡ화르르르륵!!!!!!

이윽고 어마어마한 열기를 머금은 지옥불이 로덴이 있던 자리를 빔처럼 스쳐 지나갔고로덴의 왼쪽 팔의 일부가 그것에 삼켜져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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