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대적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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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덴은 용사로서 이름을 날렸을 당시단신으로 7인의 마왕 토벌대를 처리한 다음에 곧장 전대 마왕과의 혈투를 벌여서 승리를 거머쥔… 등의 제법 화려한 과거를 소유하고 있다
토벌대를 처리했을 때는 마족들과의 전투로 어느 정도 체력과 마나를 소모한 뒤의 가장 취약한 순간에 기습 공격으로 한 명을 제거하여 우위를 점했고
마왕과의 싸움은 이전 회차의 생생한 기억으로 상대방의 호흡과 패턴을 완전히 파악함으로써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는 특이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시절 로덴의 무력은 『명실상부한 최강자』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허나… 더 이상 강해질 필요도계기도이유도 없었기에 15년이라는 짧다고 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실력에 점차 녹이 끼어버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억허어억…!”
제기랄… 벌써부터 숨이 벅차오른다오러를 유지하는 것도 점차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있어그동안 이어진 평화에 찌들 대로 찌들어 버린 건가?
장기전으로 이어진 싸움에서 눈에 띄게 호흡이 흐트러져 버린 로덴은 에스카로스와 주먹을 주고받느라 입안에 고여버린 피를 땅바닥에 퉤뱉어내며 비릿한 피맛을 떨쳐냈다
마왕과의 혈전 이후로 누군가 하고 이렇게나 치열하게 일대일로 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덴은 지금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면 기초 수행을 겸한 운동이라도 하면서 감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눈앞의 적을에스카로스를 응시했다
“이토록 즐거운 싸움은 태어나서 처음이구나마왕의 그릇을 세뇌시켜서 허튼수작을 꾀하려는 음습한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솜씨다.”
“하아…? 세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애써 모르는 척하려는 것인가? 지금 네가 데리고 있는 저 소녀내 동족에 대한 이야기다.”
양손으로 잡고 있던 대검을 어깨에 걸친 에스카로스는 여유가 있는 손을 뻗어 조금 떨어진 위치에 쌍둥이 자매와 함께 서있는 록시아를 가리켰다.
“과거의 용사하고 이번 세대의 마왕의 그릇이 같이 지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하지 않은가? 중간에 어떠한 경위를 거쳤을지는 몰라도 네 녀석 쪽에서 의도적으로 저 소녀에게 접근했을 터.”
“완전한 헛소리는 아니군.”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로덴은 간이 경매장에서 노예로 팔리고 있던 록시아를 처음 봤을 당시그녀가 품고 있는 마왕의 힘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했었기에 굳이 거금을 들여서 록시아를 구매했었다
혹시나 하는 미심쩍은 마음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해보기 위해서
면밀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것은 의도적인 접근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때 당시의 록시아가 달리 느껴지는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마족 소녀였을 경우로덴의 성격상 굳이 소녀를 구매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나쳤을 테니까
아무튼 호기심을 채운 이후에는 이미 적지 않은 돈을 써서 그녀를 구매했고앞으로 운영할 포션 가게의 일을 보조할 종업원이 필요하긴 했던 상황이었기에 그대로 거두어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시간과 추억이 쌓일수록 로덴에게 있어 록시아는 점차 소중한 존재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서하고 싶은 말이 뭔데?”
“멀린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소녀는 이미 철저하게 세뇌당했다고 하더군여기까지 와서 직접 확인해보니까 그녀는‘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노예를 자청하고 있었지나는 네 녀석을 쓰러트리고 노예가 돼버린 내 동족이자마왕의 그릇인 소녀를 해방시킬 생각이다.”
거기까지 말한 에스카로스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대검을 바로잡았다이제부터는 입 대신 검으로만 말하겠다는 뜻이다
로덴도 그에 응하여 흑검을 휘어잡았다생각 이상의 장기전을 치러서 상당히 지쳐버린 상태였지만녀석에게 적지 않은 데미지를 누적시켰고 성가신 블링크도 다 소모시킨 눈치였으니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뻗으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이번에 서로에게 휘두르는 검으로 승패의 여부가 명확하게 갈라질 것이다.
“후우우…!”
호흡을 가다듬고는 최대한 집중력과 오러를 끌어내어 거리를 좁힌 로덴의 흑검이 섬광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그의 흑검이 여덟 개로 분열하는 착각을 일으키는 참격하나하나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공격을 가하는 8연 검진이 에스카로스의 몸을 사방팔방에서 덮쳤다
……이거 정말 놀랍군마지막 순간에 확실한 승부수를 보기 위해 이런 기술을 남겨두고 있었다니경이로울 정도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의식의 끝자락여러 각도에서 자신의 몸을 베어내려고 하는 흑검의 잔상들을 눈으로 겨우 좇은 에스카로스는 자신의 신체능력과 반사신경 만으로는 이 참격들을 막거나 피해서 흘려낼 수 있는 횟수는 다섯 번이 한계라고 직감했다그 이후 나머지 참격에 의해 치명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탈출하는 데 사용할 블링크도 모두 소모했기에 에스카로스는 일시적으로 한계를 끌어내기로 했다
검과 동시에 마법을 자유로히 다룰 수 있는 마검사인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속성 마법은 전격 계열 한 가지뿐이지만그것은 오히려 하나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승화되었다
에스카로스는 전격 속성의 마나를 근접전에서 활용할 방법을 탐구한 끝에 자신을 전투력을 한계치까지 강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냈다
ㅡ파지지직!
스스로에게 전기부하를 걸친 에스카로스는 뇌의 명령을 생략하는 반사신경만으로 온몸을 움직이게 만듦으로써…
ㅡ카앙캉카캉훙! 카각! 후웅! 카아앙!
사방에서 노려오는 로덴의 8연격을 하나하나 검으로 막아내거나 회피하는 등의 완벽한 대응이 가능해졌다
캉!!! 에스카로스가 마지막 공격을 튕겨내는 순간강렬한 충격을 버텨내지 못한 로덴은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공중을 여러 바퀴 회전하던 흑검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땅에 푹 꽂히게 됐다
로덴이 흑검을 주워 들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망설임 없이 베어버릴 기세를 띄고 있는 에스카로스의 대검이 그를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었다
“흐흐이걸로 끝났다에스카로스 님의 완전한 승리야.”
역시 그 시절에 비해서 상당히 많이 무뎌져 버렸어아무리 날고 기는 용사라고 해도 결국에는 열등종일 뿐이지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린 멀린이 흡족하게 웃으며 주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주인님!!!”
“록시아!! 지금 그쪽으로 가면 위험해!”
셋이서 함께 모든 것을 지켜보다가 다급한 얼굴로 먼저 달려간 록시아를 뒤따른 쌍둥이 자매가 소녀를 뒤늦게나마 말리기 위해 나란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있는 힘껏 달려가는 소녀는 어찌나 빠른지 다람쥐를 연상케 했다
머지않아 주인의 곁으로 돌아온 록시아는 팔을 대자로 뻗은 자세로 에스카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녀는 눈앞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대검을 올려다보며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승부는 이제 끝났잖아요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당신들의 목적은 저죠? 따라가라고 하면 이대로 순순히 따라갈 테니까 더 이상 주인님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아 주세요.”
중간중간에 에스카로스와 멀린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던 시선을 느끼며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록시아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 그런 결단을 내렸다
“아안 돼! 당장 내 뒤로 물러서!”
당연히 로덴은 록시아에게 물러가라며 있는 힘껏 소리쳤으나 지금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쩌다 보니 대검의 끝을 소녀에게 향하게 된 에스카로스가 입을 열었다
“가엾고 딱한 것자신의 몸을 던져서까지 저 남자를 지키려고 하다니… 철저하게 세뇌당하면서 길들여진 모양이로군.”
차라리 일격에 편하게 보내주는 게 좋겠어
같은 마족을… 하물며 이런 소녀를 베는 것만은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내가 마왕이 되어 마계국을 확실하게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린 에스카로스는 록시아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
뭐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인데설마 나하고 같은…
ㅡ쩌저억후두둑!
에스카로스의 마음에 기억의 편린으로 인한 동요가 일어났을 때… 격렬한 전투의 영향으로 군데군데 금이 가있던투구의 얼굴을 보호하는 부분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공자 같은 얼굴금을 녹인 것 같은 눈동자와 함께 에스카로스의 오른쪽 눈썹 옆에 또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특이한 흉터가 드러나게 됐다
투구 속에 가려져 있던 에스카로스의 얼굴을 보게 된 록시아는 마계국에서 생활했던 당시의어린 시절의 기억의 일부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냈다
“그그 눈 하고 흉터…! 혹시 에시드 오빠…아닌가요?”
“!! 그 이름을 알고 있다니… 너이름이 뭐냐? 어디 출신이지?”
“록시아… 마계국 제4구역캄바우 고아원 시설 출신의 록시아예요…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에시드 오빠 맞죠?”
“…그래옛날에는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못 본 사이에 몰라볼 만큼 훌쩍 자라 버렸어.”
옛 기억을 더듬더니 말투가 한층 부드러워진 에스카로스는 소녀를 겨냥하고 있던 대검을 천천히비스듬하게 내려놓았다
한편예상치 못한 상황 변화에 몹시 당황한 멀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게 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을 다듬었다
“에스카로스 님?!”
이거 어쩌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지도 모르겠는데…만약의 경우에는 머리에 미리 심어둔 그걸 사용할 수밖에 없겠어
멀린은 최악의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수단을 미리 생각하면서도 에스카로스가 어떻게 나올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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