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17화 (117/149)

〈 117화 〉 대적자 (8)

* * *

“저것들은….”

사방에 세워둔 얼음 방벽을 뚫어내고 안으로 침입한 쌍둥이 자매의 존재를 최초로 감지한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낸 얼음 방벽에 고열로 인한 충격으로 구멍이 생겼음을 알아챈 멀린이었다

인간들에게 별 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 성격인 멀린이지만쌍둥이라는 특이점 덕분에 조금 전까지 동행했던 모험가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만들어낸 얼음 방벽을 녹여냈어… 더군다나 가장 마나가 적은 부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골라서 효율적으로 공격했구먼상당히 유망 있는 마법사야.”

…인간 계집 치고는 말이지애써서 벽을 쳐놨는데기어코 이곳으로 기어들어오다니네년들의 사인은 내 마법이 아니라 알량한 호기심이다

멀린은 어중간한 잔챙이가 주군의 싸움에 난입하는 불상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웅얼거리듯이 살상용 마법을 간단히 캐스팅하고 나서 쏘아냈다

“…아이스 랜스”

ㅡ치이잉…치잉

허공에서 만들어진날카롭고도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두 자루의 굵직한 얼음창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감과 동시에 한창 싸우고 있던 로덴과 에스카로스가 멀린의 돌발행동을 뒤늦게 알아챘다

“멀린?! 갑자기 무슨 짓을…!!!”

두 남자는 동시에 똑같은 곳을 바라보며 똑같은 대사를 외쳤다

검을 맞대다가 말고 에스카로스에게서 거리를 쭉 벌린 로덴은 서둘러 록시아가 있는 위치로 한달음에 뛰어가날아오는 얼음창을 베어내기 위해 흑검을 세워 잡았다

하지만두 자루의 얼음창은 그의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좌우로 갈라져서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애초에 목표물은 록시아가 아니라 더욱이 뒤편에 있는 쌍둥이 자매다

로덴은 스쳐 지나간 얼음창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그의 뒤에 있던 메림과 마릴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게 됐고두 자루의 얼음창의 끝이 그녀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서둘러서 얼음창을 뒤쫓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상당한 거리가 벌려졌으며가속력까지 붙어버린 투창을 따라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ㅡ쉬이이이익!!!

쌍둥이 자매의 가슴팍을 꿰뚫기 위해 쭉쭉 뻗어나가던 두 자루의 얼음창은…

ㅡ스거억! 파지직!

그녀들의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스카로스가 메림을 노리고 있던 얼음창을 대검으로 베어내고마릴을 노리고 있던 얼음창은 번개 마법을 쏘아내서 중간에 소멸시켰다

자기들에게 날아드는 얼음창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어를 준비하던 쌍둥이 자매는 눈을 껌뻑 껌뻑 뜨며 에스카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도시 중앙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기껏 말해줬더니만…싸움에 끼어들어서 죽기 싫다면 멀찍이 꺼져 있거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이 일방적으로 말한 에스카로스는 그대로 멀린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 그를 쏘아보았다눈치 빠른 노마법사는 그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저 계집들이 얼음 방벽을 멋대로 뚫어내서 안으로 기어들어 왔었기에 에스카로스 님의 싸움을 방해하기 전에 미리 처단하려고 했습니다.”

“…그래너한테는 분명 방해꾼을 물려내는 역할을 맡겼었지너는 그것을 충실히 수행한 것뿐이니 구태어 비난은 하지 않겠다저 여자들에게는 조금 전에 경고했으니구체적인 방해를 하지 않는 이상 공격하지 말거라.”

“에스카로스 님이 그것을 원하신다면 그대로 따를 생각이지만… 어째서 인간 계집들의 목숨 따위를 신경 쓰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 모험가 일행들은 우리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를 보여줬고특히 저기 있는 쌍둥이 자매는 마차에서 나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줬다그러니 군주의 도리로서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것이다알겠나?”

“예…뜻에 따르겠습니다

에스카로스가 멀린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고 있는 한편로덴과 록시아는 쌍둥이 자매가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메림 언니마릴 언니!!”

“둘 다 괜찮아?!”

로덴은 쌍둥이 자매에게 어째서 이런 위험한 곳까지 자진해서 들어와 버렸냐는 말은 일단 당장은 꺼내지 않았다

입장을 반대로 생각했을 때로덴 자신도 그녀들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왔을 테니까충고를 주는 것은 나중에

“저희는 일단 괜찮긴 한데요.”

“오히려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지여기서 도대체 무슨 난리가 터진 거야? 그리고 지금 록시아의 모습은 분명 마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그나저나 조금 전에 에스카로스 녀석이 너희를 도와줬던 걸로 보였던데무슨 꿍꿍이지.”

“에스카로스? 저 용병 아저씨 이름이 에스카로스라고?”

“따로 만나봤다는 듯한 분위기군.”

“실은 조금 전에 도시로 돌아오는 길의 가도에서….”

로덴과 록시아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들이 에스카로스 하고 멀린과 중간 길에서 마주치고 나서 같이 동행하게 된 사연을 간단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흠너희하고 만나게 됐을 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라….”

나하고 얘네들과의 관계에 관한 정보까지는 따로 수집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깊은 연관이 없는 척하는 게 더더욱 안전할 것이다짧게나마 생각을 정리한 로덴은 쌍둥이 자매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은 간단하게 설명할게두 녀석의 타깃은 나하고 록시아다특히 저 검은 갑옷… 에스카로스 쪽이 나하고 일대일 싸움을 원하고 있어서 거기에 응하고 있었지.”

후우하며 로덴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보시다시피 아직 결착이 나지 않은 상태야 싸움에 관여하지 말고 이대로 록시아랑 같이 있어줘그리고 너희에 관한 정보까지는 모르는 모양새니까… 사적인 관계가 아닌오랫동안 가게에서 알고 지낸 단골손님 모험가 정도로만 여기게끔 행동해.”

“오빠한테 설명을 들어봐도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영 모르겠지만….”

“저희가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으니 그렇게 할게요.”

조금 전까지 로덴과 에스카로스가 싸우는초인끼리의 싸움을 생생히 지켜본 쌍둥이 자매는 자신들의 수준으로는 도움은커녕 도리어 발목만 잡아버리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이해했기에 이대로 록시아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를 함께 있게 하고 나서야 등을 돌린 로덴은 대검을 땅에 꽂아둔 채양손으로 짚고 있던 에스카로스와 눈이 마주쳤다비록 그의 눈은 투구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친절하게 기다려주고 계셨어? 이거 고마운데.”

“등을 보여주고 있는 자를 습격해서 치졸하게 얻는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내가 바라는 것은 정면승부로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다용사여다시 검을 쥐어잡거라.”

ㅡ쑤우욱

에스카로스는 무를 뽑는듯한 시원스러운 동작으로 땅에 꽂아둔 대검을 뽑아냈고로덴 또한 녀석을 응시한 채 흑검을 고쳐 잡으면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상의가 완전히 탈의된 로덴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카로스는 다시 싸우기에 앞서 가벼운 농을 던져봤다

“검을 몇 번 주고받은 사이에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됐어이왕 기다려준 김에 옷도 다시 갈아입을 시간을 주지 못할 것도 없다만?”

“됐어어차피 갈아입아봤자 또 태워먹을 거잖아꼴사납게 변한 건 옷이 벗겨진 나보다는 갑옷이 너덜너덜해진 그쪽이지.”

“하하!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단 한 명의 적과 이렇게 많은 공방을 주고받은 것도 처음이고갑주가 이렇게나 심각하게 손상될 정도로 격렬하게 싸운 것도 처음이다.”

“그러냐? 갑옷이 다 깨지고 나서 보니까사실 이건 너무 강한 힘을 봉인하는 어쩌고 같은 진부한 설정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순수한 방어구로서의 의미로 착용하고 있는 갑주니까 그 점은 안심하도록.”

말을 주고받으면서 갈무리하고 있던 방대한 오러를 끌어낸 두 남자는 서로 간에 거리를 천천히 좁혔다그리고는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ㅡ카아앙! 콰앙!

그들은 이제 말 대신 검을 주고받았다대검과 흑검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충돌할 때마다 천지가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초근접전에 들어간 두 남자는 서로의 무기를 맞대고 있는 상태에서 때때로 주먹과 주먹을 주고받는다

ㅡ퍼억! 퍽!

방어 따위는 일절 염두하지 않고 휘두르는 주먹은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오게 만들만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서로의 주먹에 의해 모양이 살짝 바뀌어버린 입에서 피맛이 느껴지고 있지만 로덴과 에스카로스는 순수한 즐거움이 엿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계속해서 싸운다

로덴의 검격이 상대방이 막거나 도망가지 못하게 외통수로 몰아넣어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면 에스카로스는 메모라이즈 해둔 블링크로 순식간에 탈출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배후에서 나타나 로덴의 몸을 반으로 쪼갤 기세로 대검을 휘둘렀고 로덴은 회피 및 반격을 가한다

이 녀석한테 블링크가 남아있는 이상끝장을 보기는 썩 힘들겠는데…

메모라이즈 해둔 블링크는 사용할 수 있는 횟수의 한계가 명확하게 있을터로덴은 그것을 모두 소모시킬 요령으로 공방을 반복했다

*

“허억… 헉…!!”

“하아하아아아….”

…한참 동안 검과 주먹마법을 막아내며 싸움을 계속 이어나간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에스카로스의 갑주는 반파당한 상태였으며 드문드문 검에 베어진 바람에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고가장 성가신 탈출 수단인 블링크 또한 모두 소모해 버렸다

겉모습만 본다면 로덴이 승리자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겠지만…

적이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의 내구도와 마법의 사용 횟수가 무한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로덴의 체력 또한 무한이 아니었다

“허어억…! 크흐흐흐… 훌륭하도다! 용사라고 불리기에 한치의 모자람이 없는 실력이구나너를 나의 대적자로 인정하겠다…하지만 역시 인간의 몸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몸하고 검이 무뎌지는 것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어.”

장기전으로 이어진 격렬한 싸움의 끝에서 먼저 기세가 흐트러져 버린 것은 로덴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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