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대적자 (6)
* * *
ㅡ카아아아앙!!!
로덴과 에스카로스의 검과 검이 맞부딪히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온몸이 울리는 느낌을 선사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ㅡ쿠드득!
두 남자가 밟고 있던 땅이 깊숙하게 파이며 서로의 무기를 쥐어 잡고 있는 팔이 바들거리게 되었다
얼핏 보면 대등하게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로 에스카로스의 대검이 로덴의 흑검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단번에 베어낼 생각으로 휘두른 일격이었다만훌륭하게 받아쳤구나.”
“풀템을 낀 모양새로 남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온 주제에 잘난 척 주절거리기는.”
제법 묵직하다종합적인 근력 자체는 이 녀석이 한수 앞서고 있어그렇다면…!
이죽거리듯이 대답하면서도 반격의 수를 생각한 로덴은 점차 밀리고 있는 흑검의 방향을 크게 비틀어서 힘으로 찍어 내리려는 에스카로스의 대검을 위쪽으로 쳐냈다그리고는 상대방이 자세를 잡을 틈도 없이 흑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휘이익! 군더더기를 뺀 날카로운 참격은 뒤로 쭉 회피한 에스카로스의 흉갑 언저리만을 직선으로 살짝 베어내는 것으로 그칠 뿐이었다그는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흉갑에 세겨진 칼자국을 쓱 훑어냈다
“상당히 날카로운 공격이로군아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무사하지 못했겠어.”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뒤질뻔했다고 쉽게 쉽게 말하지 그래?”
“이건 동네 술집 싸움이 아니다이왕이면 좀 더 품위를 지키거라.”
로덴은 에스카로스에게 검을 겨눈 상태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뒤편에 있는 멀린의 모습을 예의 주시했다녀석이 후방에서 퍼부울 마법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하지만로덴의 예상과 달리 멀린은 딱히 주문을 읊어낸다거나 마나를 끌어모으는 낌새없이 말 그대로 순수하게 관전하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로덴의 시선을 알아차린 멀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쪽이 적잖이 신경 쓰이는 모양새인데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지주군께서는 네 녀석과 일대일로 겨루는 것을 강렬하게 원하고 계신다.”
“주군…?”
“말 그대로의 의미다이분께서는 나를 포함한 모든 마족이 충성을 다해서 따라야 하는마왕이 될 재능과 자격이 있는 분이시지.”
멀린의 말을 들으며 기억을 더듬은 로덴은 마계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됐다는 어느 마족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장기전이 걸릴 거라 추측된 내전을 최전선에서 검은색 갑주를 입고 대검을 휘둘러서 전장을 종횡무진 함으로써 1년도 되지 않은 단기간에 종결시켰다는… 인간들에게 까지도 명성이 알려진현 마계국의 일인자 에스카로스에 관한 소문을
과거와 비교하여 몸이 다소 무뎌져 버렸다지만 자신하고 검을 맞대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실력자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생각하던 로덴의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허이거 생각 이상으로 거물인 양반이 행차하셨구만.”
투구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로덴의 말을 들은 에스카로스가 피식 웃었다
“나보다는 오히려 네 녀석 쪽이 거물 아니던가? 15년 전에 선대 마왕과 함께 쓰러졌다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용사여.”
“…….”
한편로덴의 바로 옆에 꼭 붙어있던 록시아는 주인과 두 남자의 사이에 오가는그녀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커다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다가도 에스카로스가 로덴에게 용사라고 칭하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용사?”
주인님이 그 동화책에서 나온 용사라고요?
라고 질문을 꺼내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괜한 말을 걸어서 주인의 집중을 섣불리 흐트러뜨릴 정도로 눈치가 없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떠오르고 있는 의문들은 일단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이야기가 옆으로 세어버렸군멀린의 말대로 나는 과거에 용사로서 이름을 떨치던 네 녀석과 일대일로 승부를 벌이고 싶다.”
“거부권이 있기는 하냐?”
“당연히 없지그 대신승부를 벌이는 동안은 어떠한 방해도 없을 것이고네 옆에 있는 동족도 건드리지 않을 것을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서로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마음껏 싸우자꾸나.”
“하….”
이놈들을 상대로 어쭙잖게 도망가려고 해도 소용없겠군결판을 내긴 해야겠어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믿을 만큼 순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킬 사람을 옆에 두고 강적을 동시에 둘이나 맞닥뜨리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각개격파를 꾀하는 게 상책이었기에 놈의 말에 응하기로 했다
“록시아위험할 수 있으니까 조금만 거리를 벌려줄 수 있겠니?”
“알겠습니다주인님…꼭 이기세요.”
“그래.”
말이 바뀔 경우를 대비하여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록시아를 지킬 수 있을만한 적당한 거리에 떨어지게 한 로덴은 멀찍이 있는 멀린을 흘끔 바라보며 에스카로스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그나저나… 저런 노인네를 치어리더로 쓰려고 데려온 거라면 썩 좋은 취미가 아닌 거 같은데.”
“그런 무가치한 이유로 데려온 게 아니니 안심하도록 하거라저 녀석은 우리가 싸우는 소란에 몰려들 귀찮은 방해꾼을 쫓아내는 역할을 맡겨 두었거든…대화는 넘칠 정도로 나누었으니 슬슬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긴 대화를 끝마치자마자 전사의 눈을 하게 된 두 남자를 중심으로 날카롭고도 싸늘한 기류가 휘감겼다
ㅡ쉬이익!
조금 전과 정반대로 이번에는 로덴쪽에서 먼저 달려들었다
일반인은 논할 것도 없고어지간한 수준의 실력자의 육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를 내어 에스카로스의 측면으로 접근한 그는 몇 년 만에 기술명을 외치면서 특별한 오러를 담은 흑검을 내질렀다
“잔영검!”
극한까지 시간이 압축되는 감각 속에서 로덴의 검격의 궤도를 파악한 에스카로스는 미지의 기술에 대비해 일단은 방어에 치중하기로 하며 두툼한 대검을 방패처럼 사용해서 공격을 막아냈다.
ㅡ파캉!
로덴은 공격이 막히자마자 재빠르게 이동하여 상대방의 사각지대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공격을 가했다
ㅡ캉! 카가각! 카각! 카아앙!!!
하지만 모든 공격은 에스카로스의 대검에 의해 완벽히 상쇄되었다
빠르긴 하지만 그것뿐이다…설마 단순히 빠르게 휘두르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
여러 방향에서 내질러지는 참격을 막아내며 자세를 다시 잡던 에스카로스는 주변의 광경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로덴의 참격이 지나갔던 자리의 공간들이 갈라져있다에스카로스는 그것을 치워내기 위해 대검을 휘둘러 봤지만…
ㅡ카아앙!
허공이 아닌검에 맞부딪힌 것처럼 강렬한 불꽃이 튀면서 튕겨져 나갔다
“이 현상은 대체….”
에스카로스가 의문을 표하고 있을 때 주변에 흩날리고 있던 나뭇잎들이 일그러진 공간을 스쳐 지나갔다
ㅡ서걱
그곳을 지나간 나뭇잎들은 하나같이 두 동강이 나버리며 하늘을 향해 흩날려졌다
“그렇군… 참격을 그대로 ‘남기는’ 기술이었어.”
“그리고 지금 너는 지금 참격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거지.”
진상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에스카로스를 중심으로 참격의 잔영이 사방을 포위하듯이 퍼져있는 상태였다로덴은 적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예리한 오러가 담긴 흑도를 휘둘렀다
피하지 않으면 이대로 목이 날아가고피하기 위해 몸을 섣불리 움직이려고 하다간 사방을 둘러싼 참격에 의해 몸이 토막 나리라
“…블링크”
ㅡ츠팟!
로덴의 칼이 에스카로스의 목을 베어내기 직전그는 직접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이상적인 행동단거리 이동 마법인 블링크로 인한 회피를 선택하였다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로덴을 향해 대검의 끝을 향한 에스카로스는 재빠르게 공격 마법을 완성시켰다.
“라이트닝 스피어!”
ㅡ파지직! 파직!
대검에 세겨진 마법진이 나타남과 동시에 그 끝에서 뿜어진 맹렬한 빛과 열기를 품은 전격이 지그재그를 그리며 로덴을 향해 뻗어나갔다
번개가 중간에 두 개로 갈라져서 양측에서 노려오는 모양새가 아가리를 크게 벌린 뱀을 연상시켰다
“와 씨칼잡이 주제에 블링크까지 쓰는 건 반칙이지….”
마검사일줄은 몰랐는데…그리고 저 마법은 분명히 유도 기능이 있었지 아마?
ㅡ휘이익!
라이트닝 스피어의 특징을 떠올린 로덴은 회피를 포기하고 두 개의 번개를 베어내서 말끔히 소멸시켰다나름대로 위력이 있는 마법이긴 하지만 로덴의 기준으로는 딱 견제기 정도의 위력이다
로덴과 한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에스카로스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크흐흐흐흐….”
재밌군재밌어이 내가 도전자가 돼버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존재는 네 녀석이 처음이구나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 입가를 가린 부분이 깨져버린 투구에서 드러난 에스카로스의 입술은 의심의 여지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상대방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던 로덴은 에스카로스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이 자식지금 웃고 있는 거냐?
뭐… 솔직히 까고 말해서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니 피차 마찬가지인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은 로덴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자신은 평화로운 일상을 추구했을 텐데…
막상 기술까지 사용해야 할 정도의 강자와 마주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자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피가 끓어오르는 감촉과 두근거림이 그의 몸속에 확연하게 느껴졌다
로덴과 에스카로스두 남자는 서로의 마음속에서 적에 대한 흠 잡을 데 없는 상찬(??)을 보내며 다시금 서로의 검과 기술을 맞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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