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대적자 (5)
* * *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에스카로스와 멀린이 쌍둥이 자매 일행과 마주쳐서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ㅡ스르르륵
가도 한복판에서 솟구친 복잡한 형상의 마법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에스카로스와 멀린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인간들이 자리 잡은 땅인가? 우리가 살던 곳과는 사뭇 다르구나.”
“고향에서 빠져나온 동족만이 아니라 수인이나 엘프 등의 인족도 드문드문 있는 편이지만… 저희 대륙의 경우에는 인간의 비율이 상당히 크죠그러고 보면 에스카로스 님이 마계국에서 나오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소감은 어떻습니까?”
철커덕본격적인 싸움에 임할 때 늘 착용하는 갑주와 투구가 맞물리는 소리를 낸 에스카로스는 노을이 떠오르기 직전인푸르스름한 하늘의 풍경을 경이롭게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이렇게나 잘 보이는 하늘이라니 …노을이 뜨기 직전의 모습이라 유난히 아름답구나마계국 바깥의 하늘이 푸르다는 말이 사실이었어어째서 전대 마왕이 전쟁을 벌여서라도 인간들의 땅을 차지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군.”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높이 들어 올린 고개를 서서히 내린 에스카로스는 멀찍이서 겨우겨우 보이는 도시의 외곽을 바라봤다
“저기 위치한 도시가 네가 이야기한 그곳인가?”
“예원래는 저 도시에서 살짝 떨어진 위치로 자리 잡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거리가 거리다 보니 애매하게 떨어진 장소에 좌표를 잡아버렸군요가까운 숲으로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좌표를 가늠한 멀린이 다시금 매스 텔레포트를 읊으려고 했지만에스카로스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 가자지금은 마법으로 단번에 이동하기보다는 이 모든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가보고 싶어 졌다.”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늦어서 성문이 닫혀버려도 통과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ㅡ덜컹덜컹
대화가 끝낸 에스카로스와 멀린은 가도를 걸어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편에서 들려오는삐그덕 거리는 마차 소리에 무심코 고개가 돌아갔다.
행색을 보면 여행객 내지 용병 혹은 모험가 무리인 듯했다아니면 강도일 수도 있다어느 쪽이든 아무래도 좋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마차를 바라본 멀린이 씩 웃으면서 비릿한 목소리를 냈다
“때마침 잘 됐군요주변에 보는 눈도 달리 없고 하니 놈들을 조용히 처리하고 나서 마차로 모셔드리겠습니다.”
“뭐그것도 나쁘진 않겠군녀석들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거나지나치려고 하면 처리하고무언가 말을 걸려고 한다면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꾸나.”
“네.”
이윽고 마차는 두 사람의 바로 옆에 멈춰 세워졌다
평범한 노인의 모습을 한 멀린을 바라보던 마부핀이 연장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어르신저희는 바르멜라 영지로 돌아가는 길인 모험가 일행입니다만괜찮으시다면 겹치는 길까지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핀이 부드러운 어조로 멀린에게 건넨순수한 호의가 담긴 첫마디가 본인을 포함한 네 사람 모두를 살린 순간이었다
멀린은 예상치 못한 친절에 몇 초간 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옆을 슬쩍 바라봤다에스카로스는 고개를 까딱거려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쯧…!
속으로 혀를 차며 미리 계산하고 있던 공격 마법들을 모두 캔슬한 멀린은 넉살 좋은 노인처럼 허허 웃으면서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에 에스카로스와 함께 쌍둥이 자매 일행의 마차에 올라타며 두 일행의 짧은 동행이 시작됐다
쥬노아는 두 사람에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서는 도착하면 깨워달라며 꾸벅꾸벅 졸았고마부석에 앉아있던 핀은 고삐를 움켜쥐고 말을 모는 것에 집중했다.
정체를 감추고 있는 에스카로스와 멀린 하고 마차의 뒷칸에서 대면하게 된 쌍둥이 자매는 자기들끼리 떠드는 대신초면인 두 사람에게도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적당한 화제를 꺼내어 좋게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렇게 광산의 홉고블린들을 모두 처리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하고 마주쳤던 거예요.”
“손발이 맞는 동료끼리 모여서 다양한 의뢰를 수행한다라… 모험가들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군.”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모험가는 대강 이런 느낌이긴 해.”
에스카로스는 추후의 일을 대비하여 멀린에게 인간의 말을 미리미리 배워두었기에 쌍둥이 자매의 말을 모두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계국의 내전을 끝낸 이후에는 내전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도시의 안정화고위험 등급의 마물이나 적대 세력의 잔당들을 억제하기 위한 병력 배치에 대한 회의와 관련한 이야기만 나눈 반동일까…
자기들을 모험가라고 소개한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즐거웠다
한편신나게 떠들던 메림은 에스카로스가 입고 있는 검은 갑옷과 등에 매달린 대검을 흘긋흘긋 바라봤다
“용병 아저씨가 입고 있는 갑옷이랑 검은 되게 좋아 보이는데자잘하게 긁힌 자국이 은근히 많이 보이네그걸로 여기저기 많이 뛰어다녔나 봐?”
“…….”
이 내가 아저씨라니…
생애 처음으로 아저씨 소리를 들은 그는 메림의 말을 정정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했지만 어차피 한번 보고 마는지나가는 인연이다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하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이 녀석들과는 수많은 전장을 함께 오고 갔다.”
“전장인가~ 마물 상대가 전문인 모험가와 달리 대부분 용병들은 전쟁밥으로 먹고살긴 하지.”
“실례되는 말인 건 알고 있지만 용병일이 힘들거나 하진 않았나요?”
“아니… 전혀전장에서 마주하는 적에게 서로의 신념과 신념을 걸고 검과 검을 맞대는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뛰는 일도 없지.”
“뭔가 시적인 표현이네요.”
“용병 아저씨는 둘 중 하나같아엄청난 허세쟁이거나용병일이 천직이거나.”
“하…! 건방지면서도 재밌는 말이구나너희가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그런 느낌으로 에스카로스와 쌍둥이 자매 사이에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가다가… 어느새인가 마차가 멈춰 섰다
다행히도 늦지 않게 도착했기에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쌍둥이 자매 일행과 에스카로스 일행은 검문을 무탈하게 통과하고서 도시로 진입한 다음다시 두 그룹으로 갈라졌다
쌍둥이 자매 일행은 모험가 길드에 의뢰 완료 보고를 먼저 할 겸마차를 반납하기 위해서
에스카로스와 멀린은 로덴의 포션 가게로 가기 위해서
헤어지기 직전에스카로스는 쌍둥이 자매를 포함한 일행에게 나지막이 충고의 말을 꺼냈다
“너희들… 되도록이면 오늘 하루는 도시 중앙부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하거라.”
“???”
“아무튼덕분에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그러면 이만.”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쌍둥이 자매 일행에게 미련 없이 등을 돌린 에스카로스는 멀린과 함께 도시의 외곽 구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록시아는 로덴과 함께 내일부터 다시 운영할 장사를 위해 진열대를 미리미리 채워놓으면서도 창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니들은 오늘도 밖에서 주무시는 걸까요?”
“슬슬 저녁때가 다 돼가긴 하는데… 아직은 도시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이니까저녁밥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먹도록 할까? 혹시라도 걔들이 왔는데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으면 모양새가 좀 그렇잖아.”
“네주인님.”
마무리 작업을 끝마친 두 사람은 손님용 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들이켜면서도쌍둥이 자매가 오늘 안에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찻잔을 다 비워갈 때 즈음두 사람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아쉽게도 쌍둥이 자매는 아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로덴의 가게로 향하고 있는 갑옷의 남자와 노인의 모습이다
오늘은 장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뭐포션들은 미리 준비해 놨으니 못 팔아줄 건 없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 두 사람을 단순한 여행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로덴은 그들이 어느 정도 가까이 올 때까지 턱을 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
ㅡ벌떡!!
“주인님?”
서서히 거리를 좁힌 노인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세차게 일어났다
얼굴 자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지만로덴은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범상치 않은 집념과 증오심을 감지했다저것은 명실상부한 적이다
설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연달아서 적이 쳐들어 올 줄은 몰랐다.
로덴은 록시아에게 집안에 숨어있으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도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어중간하게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손에 닿는 곳에 있게 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
“…록시아지금부터는 내 옆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말거라.”
“네? 아알겠습니다.”
굉장히 진지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로덴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 록시아는 그의 뒤를 따라서 함께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잠깐 눈을 돌린 사이주인의 손에는 전날 새벽에 보았던 새까만 검이 들려있었다
로덴과 록시아를 향해 허리를 가볍게 숙인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그 검에 속절없이 팔이 베였을 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야…아참지금의 모습이라면 네 쪽에서는 전혀 모르겠군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볼까?”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은 손바닥으로 화장을 지우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옆으로 밀어냈다
다시 드러난 노인의 얼굴은 가젤 같은 구불구불한 뿔이 달려있는마족의 얼굴임과 동시에 로덴이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다
“멀린…!”
“네 놈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구만한건ㅇ… 아니지지금은 로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가?”
천천히 팔을 뻗은 멀린은 손가락 끝으로 록시아를 가리켰다무언가 공격이 올 것이라 짐작한 로덴은 놈의 마법을 튕겨내기 위해 자세를 잡았지만멀린이 시전 하는 것은 물리적은 종류의 마법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마왕의 그릇을 인간의 모습으로 잘 꾸미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 눈만은 속일 수 없지…거짓된 형상에서 벗어날 지어다디스펠 매직.”
ㅡ피이잉!
멀린의 손가락 끝에서 쏘아진 가느다란 빛줄기가 중간에 베어내려는 흑검을 무시하고 록시아에게 직접적으로 쏟아졌다.
록시아가 끼고 있던 반지의 마법이 순식간에 무효화되면서 소녀 또한 본래의 모습인산양 형태의 뿔이 달려있는 마족의 모습으로 강제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질적인 감각을 느낀 록시아가 자신의 뿔을 매만지며 로덴을 올려다봤다
“어엇?! 주주인님반지는 분명히 끼고 있는데… 어째서.”
“저놈이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주문을 걸어서 그래아티팩트가 일시적으로 고장 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렴.”
ㅡ스르릉
그 순간지금까지 멀린의 옆에서 침묵을 지키던 에스카로스가 천천히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릇이 여자아이인 건 의외군그나저나정말로 ‘주인님’이라는 호칭 따위를 쓰고 있다니…가여운 것용사에게 세뇌당해 버렸다는 말이 정녕 사실이었구나.”
노기를 띈 목소리를 내어 대검을 쥐어잡은 에스카로스는 번개처럼 파직 거리는 금색의 오러를 서서히 담아냈다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에스카로스를 멀린의 수하 정도로 짐작하고 있던 로덴의 몸에 경종이 울려지면서 멀린보다 저 녀석이 더 위험한 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됐다
“…허무하게 일격에 죽기 싫다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에스카로스의 몸이 섬광처럼 빠르게 사라졌다가 로덴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대검을 휘둘렀다재빠르게 반응한 로덴이 오러를 두른 흑검을 내질러서 맞받아쳤다
ㅡ카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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