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13화 (113/149)

〈 113화 〉 대적자 (4)

* * *

시간을 너무 지체하다가는 용사 측에서 다음 공격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거나 그릇과 함께 종적을 감출 가능성이 있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많이 없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속전속결로 빠르게 놈을 쳐야 한다

로덴하고 록시아가 자리 잡고 있는 바르멜라 영지가 마계국과 지나치게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면 멀린은 검은 사냥개들을 대거 동원한 메스 텔레포트로 강습을 강행했을 것이다

하지만마계국의 동북쪽에 자리한 이곳 마왕성에서부터 대륙의 최서부에 위치한 바르멜라 영지까지의 거리는 대륙 끝과 대륙 끝 수준의 거리다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멀린이라도 그토록 먼 거리에 다수의 인원을 이동시키는 것에는 상당한 애로사항이 벌어진다그것이 익숙지 않은 좌표라면 더더욱

멀린의 마법으로 초장거리를 같이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딱 한 명그렇다면 전투력이 가장 높은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최선책이다

“이제야 돌아왔군오늘은 네 녀석이 웬일로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데뭔가 흥미로운 일이라도 생겼더냐?”

“…오셨습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방으로 친히 방문한 에스카로스를 보게 된 순간멀린의 머릿속에는 용사와 마왕의 그릇을 처리하기 위해 데려갈 조력자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은 현 마계국의 명실상부한 일인자인 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계국 내전의 전장에서 에스카로스가 보여준 검술의 날카로움과 마법의 파괴력은 용사에게도 필히 닿을 정도다

인마 전쟁 시절의 멀린은 부상을 회복하는 와중에도 인간 연합 세력의 병력들을 따로 상대하느라 마왕의 곁을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주군을 도울 수 있다

더군다나 녀석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인간열등종들의 육체는 전성기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 마련이지

다시 보게 된 용사 녀석의 눈빛과 분위기는 15년 전만큼 날카롭지 못했어어쩌면 이건 에스카로스에게 걸맞은 적수를 상대하는 경험과 적절한 시련을 부여할 절호의 기회다.

마음을 다잡은 멀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카로스를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에스카로스 님일전에 인간의 땅을 향해서 밀정들을 파견했던 일… 기억하고 계신지요?”

“흠? 기억하다마다폴리모프를 걸친 몇몇 인원을 보냈던 일을 말하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품속에 있는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친 멀린은 하론 공국의 서부에 위치한 바르멜라 영지가 그려진 부분에 굵직한 동그라미를 덧씌우며 말을 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마왕의 그릇은 이 도시에 숨어 지내고 있더군요.”

“오드디어 찾았군마계국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너의 추측이 맞았어밀정들이 그 녀석을 마계국으로 데려오고 있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커다란 변수가 있었거든요제가 조금 전까지 자리를 비운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커다란 변수라… 그게 뭐지?”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입니다편히 앉으시죠.”

인간의 땅에 파견한 검은 사냥개가 이 도시저 도시를 조사하여 끝내 바르멜라 영지까지 도달하게 된 대략적인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한 멀린은 그들이 비밀리에 동족들을 죽이고 다녔다는멀린과 검은 사냥개 대원들만 알고 있는 진실만은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멀린은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면서덤으로 나약한 마족들을 쳐내기 위해 동족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검은 사냥개 대원들에게 독단적으로 내렸었다

마계국 바깥에서 행하고 있는 일인지라 에스카로스에게 탄로 날 가능성은 적었지만 만일을 위해 처리한 이후에는 시체를 눈에 띄게 훼손하여 인간 절대 주의자들에 의한 이종족 혐오 범죄로 꾸미고 있었다

“…하여해당 포션 가게에서 찾아낸 목표물과 접촉하겠다는 정기 보고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자 제가 직접 그 도시에 방문했었습니다만… 그곳에는 뜻밖의 존재가 있더군요.”

멀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에스카로스에게 변두리 영지의 연금술사로서 살고 있는 남자전직 용사인 로덴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15년 전에 마왕과 함께 죽은 것으로 알려진 용사가 그런 곳에서게다가 이번 세대의 마왕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니놀라움의 연속이로군.”

“외람되는 말 입니다만그것에게 마왕이라고 불릴 자격은 없습니다용사 녀석에게 철저히 세뇌되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사역마를 통해 지켜본 결과그릇은 용사에게 ‘주인님’이라는 노예들이나 쓸법한 호칭으로 부르면서 고분고분히 따르더군요그것의 본질을 꿰뚫어 본 용사가 수작질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ㅡ꾸드득…

어금니에 힘을 꽉 주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뇌’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미간이 좁혀져 있던 에스카로스의 얼굴에 노기가 선명하게 엿보였다멀린이 아는 그의 강직한 성격이라면 이러한 반응을 보여줄 것이라 충분히 예상했다

“용사 녀석을 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힘겹다고 판단하고서 잠시 귀환한 것입니다너무 지체하면 녀석이 모습을 감출 가능성이 있으니조력자로서 최고위 마족을 한 명 선별…”

“그럴 필요는 없다.”

“네?”

“선대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용사의 모습과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졌구나.”

“하지만저하고 에스카로스 님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다간 반란의 가능성이….”

“우리의 뜻에 반하는 내부 세력은 대부분 굴복시켜둔 상태니 하루 이틀 정도는 문제없다.”

멀린은 결코 뜻을 굽히지 않는강한 의지가 보이는 에스카로스의 눈을 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이후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결과장거리 텔레포트를 연달아 사용하느라 적잖이 소모한 멀린의 마나을 보충할 겸두 사람의 부재하는 동안 생길 소란을 사전에 방지하는 등의 만전을 다하고 나서 출발하기로 했다

* * *

하늘에 노을이 서서히 드러나려고 하기 직전의 이른 저녁

ㅡ덜컹덜컹….

광산마을의 홉고블린 토벌 의뢰를 순조롭게 완수한 쌍둥이 자매는 은 등급 모험가의 혜택으로 대여받은 마차의 뒤편에 앉아 한가로이 떠들고 있다

일행 중 유일한 수인인 쥬노아가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아…! 광산 탐색은 이제 두 번 다시 못하겠어.”

“아흐흐우리한테도 찌린내가 훅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쥬노아한테는 어마어마했겠다후각이 너무 좋아도 탈이네.”

“웃을 일이 아니야 메림석탄 냄새하고 고블린 녀석들의 똥오줌 냄새가 뒤죽박죽이라 코가 마비되는 줄 알았다고.”

쥬노아는 자극적인 냄새에 오랜 시간 노출된 탓에 아직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코를 여러 차례 풀어냈다하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몇 시간 동안은 이 상태일 듯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세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낸 마릴이 마부석에서 말들을 몰고 있는 핀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대장님이 길을 안내해준 덕분에 탐색이 순조로웠네요.”

“그러게~ 캡틴이 그 광산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하옛날에는 거기서 일한 돈으로 장비를 마련해서 모험가를 시작했었거든요그나저나은 등급인 두 분에게 상급자 취급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많이 묘하네요.”

“우리도 그냥 이렇게 부르는 게 더 편하니까 신경 쓰지 마캡틴.”

“제가 부끄러워서 은근히 곤란합니다만….”

쌍둥이 자매를 포함한 일행이 각자 한 마디씩 꺼내며 한창 떠들고 있을 때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마부석에 앉아있던 핀이다눈을 가늘게 뜬 그가 목소리를 냈다.

“저 앞에 가도를 걷는 사람들이 보이는군요단 두 명인걸 보니 노상강도 같은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핀의 말을 들은 일행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저절로 쏠렸다

한 명은 뿔 장식 투구가 포함된 온통 새까만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굴강한 체구의 사내(아마도)였고다른 한 명은 로브를 뒤집은채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었다

고용주와 호위병의 관계인 걸까? 같은 종류의 의문을 각자의 머릿속에 떠올린 일행과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진다삐그덕거리는 마차 소리를 들은 두 사람도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봤다

가도를 걷고 있던 노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핀은 일행에게 미리 양해를 받은 뒤두 사람의 바로 옆에 마차를 멈춰 세웠다

“어르신저희는 바르멜라 영지로 가는 길인 모험가 일행입니다만괜찮으시다면 겹치는 길까지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몇 초간 핀을 물끄러미 쳐다본 노인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허허! 이거 드물게도 친절한 모험가로군정말로 괜찮겠나?”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태울 여유가 있으니 사양할 것 없습니다.”

“그런가? 모처럼 받게 되는 호의니까 감사히 받도록 하지우리도 마침 바르멜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네.”

“…….”

허허거리는 웃음을 연달아 낸 노인과 달리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다

ㅡ펄럭

노인이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지팡이를 먼저 올리고 로브를 걷혀내고 나서야 일행은 뒤늦게 알게 됐다그가 오른팔 밖에 남아있지 않은 외팔이라는 사실을

자리에서 일어난 마릴이 노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손 잡으세요할아버지.”

“고맙네아가씨얼굴만이 아니라 마음씨도 참 곱구먼.”

“아하하하….”

뒤이어서 검은 갑옷의 사내도 마차에 사뿐히 올라타며 노인의 옆에 말없이 앉았다

그렇게 해서 쌍둥이 자매 일행과 두 여행객의… 정확히는 멀린과 에스카로스의 짧은 동행이 시작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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