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대적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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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바람을 쐬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로군.”
바르멜라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멀린의 시야에 들어올 때 즈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말과의 사역마 계약을 파기인근 숲에서 방생한 그는 스스로에게 폴리모프를 시전 하여 쥐의 모습으로 귀찮은 검문 없이 성문을 통과했다
인간의 도시에 얌전히 방문하게 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지나가다가 보게 되는 인간들의 얼굴에 대체로 그늘이 없는 걸 보면 경재와 치안 수준이 제법 괜찮게 유지되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젊은 여행객의 모습으로 재차 변신하고는 도시 내의 포션 가게에 대해서 가볍게 수소문한 멀린은 그곳의 위치와 전날 새벽에 강도가 침입하고 쫓아내는 과정에서 가게의 일부가 파손되어 버렸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전날 새벽이라면 피넷이 가게를 치겠다고 사전에 보고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아무래도 녀석들은 그때 당해버린 게 틀림없어
주변에는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모양새를 보면 검은 사냥개 대원을 처리한 미상의 적은 그들의 시체만이 아니라 마족이라는 진실 자체를 완전히 숨겨둔 것으로 추정됐다
상대방은 주변의 이목이 끌리는 것을 꺼려하는 걸까? 아무튼간에 여기까지 몸소 왔으니 어떻게 생긴 놈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변의 상공을 날아다니는 새를 마법으로 포획한 멀린은 조금 전에 말에게 했던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여 녀석을 사역마로 만든 뒤포션 가게가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사역마가 된 새하고 공유되어 있는 시야 속에서 구석편이 엉망이 되어 있는 포션 가게그 주변에서 수리 자재를 늘어놓은 채 보수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금발 남자의 뒷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사역마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건물과 가까운 나무 위에 앉게 한 멀린은 남자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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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뚝딱! 뚝딱!
건물에 뻥 뚫린 구멍 위를 덧씌운 두툼한 널빤지들을 못질로 단단히 고정시킨 로덴은 입에 물고 있던 못을 퉤 뱉고오랫동안 쭈그려 앉아있느라 쥐가 나기 일보 직전인 두 다리를 이리저리 풀어냈다
“후우! 이걸로 바람구멍은 어떻게든 메웠네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뭔 고생인지.”
아침에는 록시아와 함께 파손된 가구들을 하나하나 처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오후에는 건물 외관을 수리하느라 바빠서 모처럼의 휴업이 휴업 같지가 않았다
어쨌든응급처치는 얼추 다 했으니 나머지는 목공을 불러서 전문적인 수리를 맡기기로 대략적인 계획을 짠 로덴은 벽면에 기대앉아 휴식을 취하며 전날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놈들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배후가 있을법한 마족들에게 습격을 받았으니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그다음 습격이 뒤따라 올 거야
경험상 이런 종류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이 도시에서 조용히 떠나고 행방을 감춰서 추적을 따돌리거나배후를 알아내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거나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쭉 유지하고 싶은 로덴이 선택하려는 것은 당연히 후자다
다음번에도 똘마니 녀석을 생포할 기회가 생기면 독약을 깨물지 못하게 어금니 먼저 싹 다 뽑고 나서 철저히 심문해야겠어
그 순간을 위해 마약성분이 함유된 자백제를 사전에 만들어 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록시아가 벽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이 집을 수리한 흔적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온 소녀의 손에는 과일 접시가 들려있었다
“벌써 다 끝내셨나 보네요? 주인님이왕이면 안에서 쉬시는 게 더 편할 텐데….”
“조금 전에 막 끝낸참이야바람도 시원해서 잠깐 앉아 있었어.”
“그러면 저도 잠시 실례할게요.”
주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바짝 붙인 소녀는 접시 위에 한가득 담겨있는정성스레 깎아낸 사과 조각을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토끼 모양으로 깎아냈네? 누구한테 배운 거야?”
“얼마 전에 마릴 언니가 따로 가르쳐줬어요제법 예쁘죠?”
“이대로 그냥 먹기 아까울 정도인데.”
“드시라고 깎아온 음식인데 안 드시면 제가 곤란해요자주인님아~ 하세요.”
칭찬의 말에 싱긋 웃으면서 토끼 사과 한 조각을 집은 록시아는 그것을 주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로덴은 낯간지러운 느낌이 적잖이 들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거절 따위할 수 있을 리 없다
ㅡ아삭아삭
록시아의 손을 통해 입안으로 서서히 들어간 사과는 평소에 먹던 사과들 보다도 유난히 달달하게 느껴졌다
“맛있네.”
“후후입맛에 맞으신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여기 더 드세요.”
ㅡ쑤욱! 쑥! 쑤욱!
정신을 차렸을 때네 조각을 연달아서 먹게 된 로덴은 입안에 가득히 들어찬 사과를 조용히 으적거리면서도 이번에는 정반대로 그의 손을 통해 소녀의 입가에 사과 조각을 내밀었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두 눈을 빛낸 록시아는 주인이 건네준 사과 조각을 앙 물어서 행복함이 묻어난 표정으로 맛있게 우물우물거렸다
그렇게 서로에게 번갈아가며 사과 조각을 먹이면서 접시를 말끔히 비워낸 로덴과 록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손을 잡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편두 사람이 문을 완전히 닫는 순간까지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자리를 지키던 새가 푸드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갔다
*
“허억헉… 후우우우……!”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자리 잡은 멀린은 그 답지 않게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목표물을 드디어 찾아냈다는 희열과 결코 잊지 못할 숙적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는 긴장감이 그의 심장을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뛰게 만들었다.
사역마의 눈을 통해 록시아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비록 인간의 모습으로 꾸미고 있긴 했지만마왕의 그릇만이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마기가 엿보였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말이다
먼 과거에서부터 여러 차례 이름과 모습을 바꿔가며 몇몇 마왕들을 보필했던 멀린은 마기를 보고느낄 수 있다
비록 마기가 느껴지지 않더라도그만한 힘과 재능을 가진 마족은 여태껏 없어서 수정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에스카로스가 틀림없이 그릇이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설마 그런 계집이 이번 세대의 그릇이었다니
순간적으로 멀린은 록시아가 품고 있을 미상의 재능이 몹시 탐이 나기도 했지만 강림의 틀은 이미 에스카로스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짜둔 상태
강림의 실현을 위해서는 지금의 그릇을 깨뜨리고 에스카로스가 마기를 계승받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마음을 다잡은 멀린은 마왕의 그릇과 함께 있던 남자로덴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마왕의 그릇보다는 로덴쪽이 훨씬 더 신경 쓰이던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해서 모습과 분위기가 다소 달려졌지만 녀석을 잘못 봤을 리 없다15년 전에 마왕과 함께 동귀어진 했다고 대륙에 널리 알려진 ‘젊었던’ 용사다
세월이 적지 않게 지났다고 하지만 상대가 저 괴물이라면 검은 사냥개의 최정예 요원 넷이 속절없이 당해버린 이유도 저절로 납득이 갔다
알트마 왕국 측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공표되었을 때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이런 변두리 영지에서 숨어 지냈나? 지금은 로덴이라는 이름을 쓰고 자빠졌군
“끄으윽…!”
인마 전쟁 시절녀석의 검에 의해서 잃어버리게 된 왼팔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다시 느껴졌다
당시에 멀린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었다팔을 희생하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머리였을 것이다
로덴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을 잠시 뒤로 한 멀린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용사가 어째서 마왕의 그릇과 함께 지내고 있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단순한 우연 일리는 없어그릇 쪽은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용사 녀석은 그 계집이 마왕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을 게야
그러고 보면 그릇이 주인님이니 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호칭으로 용사를 불렀었지…설마 미래의 마왕을 제어할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주제넘은 짓을 하는군
녀석의 의도가 어떨지에 대해서 정보가 너무 적었기에 더 이상의 추론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멀린은 마왕성으로 귀환하기 위한 좌표를 가늠하며 초장거리 텔레포트 주문을 서서히 읊기 시작했다
원래는 포션 가게에 있는 녀석들을 단독으로 은밀하게 처리하고 나서 귀환할 생각이었지만예정 변경이다혼자만으로는 위험하다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찾아야 할 목표물과 복수의 대상을 동시에 발견했으니 몸소 여기까지 방문하는 수고를 들인 보람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ㅡ우우우웅!
멀린의 주문이 완성되자 발 밑에 푸른 마법진이 펼쳐지며 시야가 뒤틀린다멀린은 마왕성 내부에 있는연구실을 겸하는 그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본디 마왕성 내부에는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한이동 계열 마법의 좌표 지정을 방해하는 결계식이 견고하게 펼쳐져 있지만결계식을 만든 본인인 멀린을 포함한 몇몇 허용자에게는 예외다
귀환과 동시에 익숙한 의자에 몸을 맡긴 멀린이 이다음에 마왕성에서 떠날 때 어떤 마족을 데려가야 할지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ㅡ츠팟!
“이제야 돌아왔군오늘은 네 녀석이 웬일로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데뭔가 흥미로운 일이라도 생겼더냐?”
마왕성 내부에서 멀린 이외에도 이동 계열 마법의 사용이 허가된 몇 안되는 마법사임과 동시에 마계국 내에서 대적자가 없는 검사의 위치에 서있으며 멀린의 주군인에스카로스가 단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멀린의 방에 기습적으로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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