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11화 (111/149)

〈 111화 〉 대적자 (2)

* * *

ㅡ다그닥… 다그닥…

ㅡ히이이잉~!

“키햐하하!”

“이랴아!!!”

말발굽 소리와 투레질 소리그 위에 탄 사내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평야를 가로지른다

빈말로라도 좋은 인상이라고는 하지 못할 부리부리한 눈매의 사내들은 작은 규모의 마을과 소수로 돌아다니는 사람의 금품과 식량을 뜯어내고아무렇지 않게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는… 마적(馬?)이다

최초에 그들은 야만부족 출신의 10인으로 구성된 집단이었지만… 성급하지 않게 확실하고 안전한 먹잇감만을 노리며 천천히 기반을 쌓아 올린 결과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소규모 마을 따위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30명 남짓 규모의 마적단으로 변모했다

마적단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전원 말을 타고 있는 만큼일반적인 도적들과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기동력이 좋고활동 범위 또한 매우 넓어서 인근 지방 영주가 꾸린 토벌대든 현상금을 노리는 모험가들이든 여유롭게 따돌릴 수 있다

“두목오늘은 들인 수고에 비해서 벌이가 짭짤한데?”

“그러게 말이다안 그래도 술 하고 여자가 고픈 참인데고급 포도주를 운반하는 상단하고 마주치다니나처럼 되는 놈은 역시 뭘 해도 되나 봐.”

같은 부족원이자 원년멤버인 부하와 한가로이 떠들던 마적단 두목은 스리슬쩍… 일행의 후미에 있는조금 전의 약탈로 건져낸 전리품들을 바라봤다

두둑해진 돈주머니상단을 호위하던 사병과 애송이 모험가들의 시체에서 뜯어낸 쓸만한 장비녀석들이 운반하고 있던 값진 술마지막으로 얼굴이 제법 봐줄 만한 두 여자를 사로잡아서 꽁꽁 묶어두었다

“크흐흐… 빨통도 크고 얼굴도 제법 반반한 년들이야우리끼리 몇 달 정도 두고두고 돌려먹은 다음에 구멍이 헐렁해지면 암시장에 내다 팔아야겠어.”

두목이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말에 근처의 부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무력한 여자를 단체로 강간하는 것은 놈들에게 일종의 축제나 다름없다

거점으로 돌아가면 원 없이 술을 즐기며수장의 특권으로 두 여자의 몸을 맨 먼저 즐길 생각에 빠진 두목은 벌써부터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으으음?”

오늘은 유난히 일진이 좋다며 서로 끌끌대던 마적단 중 한 명이 멀찍이서 보이는 인영을 발견했다

“저기저기혼자서 싸돌아 다니는 녀석이 보이는뎁쇼?”

두목은 부하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과거에 유목민 생활을 했던 그는 매우 먼 거리에서도 사물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다

보이는 것은 행색이 추레한 늙은이 혼자서 가도 한복판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

오늘은 충분히 벌었는데 무시하고 지나칠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저렇게나 만만하기 짝이 없는 먹잇감을 발견하면 탐욕이 저절로 들끓는다

애초에 만족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들이라면 이 짓거리도 안 했겠지

비릿한 웃음을 지은 두목이 손짓하자마적단은 일제히 고삐를 쥐어 잡으며 속도를 높였다

ㅡ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있는 힘껏 땅을 내리찍는 말발굽이 만들어낸 흙먼지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마적단의 선두는 순식간에 노인을 앞질러서 길을 가로막았고뒤따라온 나머지 녀석들이 노인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진을 만들어서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하며 백발이 성한 노인은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외팔이였다노인은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지도를 펼쳐 들고 있다

부하들 사이를 지나치며 노인에게 바짝 다가간 두목이 말에 타고 있는 그대로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봐팔병신 영감탱이! 남아있는 한쪽 팔도 날아가기 싫다면 가진걸 모두 내려놔특별히 속옷만은 챙기고 갈 수 있게 해 주지.”

본래 이런 무방비한 사냥감은 굳이 협박할 수고를 들일 것 없이 문답 무용으로 죽인 다음에 물건을 털어가는 편이지만 두목은 조금 전의 약탈로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기에 노인이 가진 물건을 내놓기만 하면 이대로 순순히 놔줄 생각이다

한편두목이 타고 있는 말을 태평하게 올려다보던 노인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품평했다

“흐으음… 제법 관리가 잘 된 말이로군날아가는 것도걸어가는 것도 영 애매한 거리였는데 마침 잘 됐구먼.”

가진 것을 모두 넘길 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싹싹 빌어야 할 노인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마적단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쥐고 있던 지도를 품속으로 집어넣은 노인은 손가락을 천천히 뻗어 두목이 타고 있는 말을 가리켰다

“그 말을 여기 놔두고 이대로 물러나거라그렇게 하면 너희들의 무례한 언행은 모두 넘어가주겠다."

“하하하…이건 대체 무슨 신박한 개소리람?”

두목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것을 시작으로 부하들 사이에서도 소탈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여행객들에게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말하기만 했지역으로 들어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기에 화가 난다 거나 어이가 없는 문제를 아득히 뛰어넘어 유쾌할 지경이다

심지어 건장한 체격의 사내도 아닌이렇게나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진 노인에게 말이다

아무튼간에 물건을 순순히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니 죽여서 탈탈 털어야겠지

두목은 날이 시퍼런 망나니 칼을 빼들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팔을 뻗은 노인이 검을 막아내려는 모습이 눈에 빤히 들어왔지만 두목은 멈추지 않았다이대로 팔과 함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 줄 심산이다

ㅡ싸아아아…

하지만 노인이 펼쳐낸 손에서 소리없이 뿜어져 나온 푸르른 한기가 순식간에 두목의 상체를 휘감더니녀석은 검을 휘두르려는 자세와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말의 위에서 점차 몸이 기울어진 몸뚱이는…

ㅡ파차창!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처럼 허망하게 박살나버리며 수십 조각으로 잘게 쪼게 졌다얼어붙지 않은 두목의 하체가 벌레처럼 꿈틀꿈틀거리다가 동작을 멈췄다

“두두목?”

순식간에 벌어진비현실적인 광경에 상황판단이 되지 않는다나머지 수하들이 어버버 거리는 사이노인의 손가락이 맨 끝쪽에 있는 마적을 지목하고 있다

“…아쿠아 레이저.”

ㅡ지이익­! 퓽!

손가락 끝에서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강렬한 물줄기가 마적의 머리통을 꿰뚫었다노인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뻗고 있는 그대로 점차 옆으로 틀었다.

ㅡ서걱서걱서걱!

그의 움직임에 따라 나란히 따라 움직인 수압의 검이 주변을 에워싼 마적들의 상체와 말들의 머리를 평등하게 베어냈다

“흐아아악!”

“히히이익!! 도망쳐!!!”

녀석들은 뒤늦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런 평야에서 일직선으로 뿜어지는 마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몇 초가 지나고서른 명이 넘는 규모의 악명을 떨치던 마적단은 외팔이 노인의 가벼운 손짓만으로 순식간에 몰살당했다하나같이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어서 명검에 베였다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으으읏…?”

마적들과 말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진 현장에서 유일하게 숨이 붙어있는 인간두 여자가 뒤늦게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들의 경우는 말의 엉덩이에서 짐짝처럼 매달려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몸이 베이는 대신손목을 묶은 밧줄만 절묘하게 베인 상태였다

눈을 뜨자마자 피바다를 마주하게 된 바람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그 피의 주인이 마적들이라는 사실에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두 여자는 정황상 자기들을 구출해준 것으로 보이는 노인을 향해 눈치껏 고개를 푹 숙였다

“저저기 어르신 구해주셔서…”

ㅡ딱!

시큰둥한 표정을 보인 노인은 두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겼다

ㅡ화르르르!!!

동시에 그녀들의 몸은 시뻘건 화마에 뒤덮였다

“꺄아아아아!!!!!!!!”

“아아아악!!!!!”

“구해줘? 열등종이 자기들 멋대로 무슨 속 편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마나로 만들어진 불길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고기가 구워지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녀들이 타 죽어 가는 모습에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눈을 돌린 노인은 자신을 제외하고 이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인맨 처음에 가리켰던 말을 바라봤다.

주인이 죽은 데다가 피바다가 되어버린 주변의 상황이 겹치며 잔뜩 흥분한 말은 이리저리 몸을 움찔거리고눈까지 까뒤집혀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잔뜩 흥분한 말을 탑승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노인에게는 손쉬운 해결법이 있었다그는 말의 목 언저리에 손을 올려 마나를 슬며시 불어넣었다

“먼 과거에는 대제국 마르넬타리아의 현자였으며현세에는 대마법사로 불리고 있는 나 멀린이 원하노니위대한 마나의 의지에 따라 나의 종이 되거라.”

스스로를 멀린이라고 칭한 노인의 명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사역마 계약을 맺게 된 말이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흐읏차…!”

순한 양이 된 말의 등에 어렵지 않게 올라탄 멀린은 조금 전에 집어넣었던 지도를 다시 펼쳐 들었다

흠도시 한복판에 텔레포트를 사용하다간 귀찮은 소란이 일어날 거 같아서 주변의 평야로 좌표를 잡았건만거리 조절을 살짝 잘못해버렸군

뭐… 됐다모처럼이니 바깥바람이나 좀 쐬야지

멀린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은 딱히 없었지만사역마로 만든 말을 자기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외팔이라는 불편함과 부족한 승마기술은 문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떠나기 직전그는 말과 인간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현장을 향해 팔을 뻗어서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행했다

ㅡ쯔저억…쯔그윽…

멀린의 의지에 따라 일시적으로 질척한 진흙으로 변한 대지가 인근의 시체들과 피를 천천히 집어삼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멀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은 땅속에 완전히 묻혔다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운 멀린은 그대로 말을 몰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르멜라 영지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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