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대적자
* * *
로덴은 최대한 빨리 나가기 위해 문을 통해서가 아닌그의 방에 시원하게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금 전에 헤어졌던 위치에서 록시아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기에 구태어 주변을 두리번거릴 필요조차 없었다
“…아!”
기다리는 동안 주인님이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소녀는 주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탁탁탁! 록시아는 로덴이 다가오고 있는 걸음걸이 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뛰어들어서 그에게 꼬옥 안겼다그녀는 양팔로 주인의 허리를 감고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쑥 들어 올렸다
“주인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기다렸지? 이제 다 끝났어.”
새벽부터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마족들에게 습격을 당하고집안의 일부가 개박살나 버렸지만대수롭게 여기진 않기로 했다부서진 물건이나 집쯤이야 충분한 시간하고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고칠 수 있으니까
한동안 로덴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록시아는 아직까지도 평소처럼 잠잠한 새벽의 도시를 시선에 담으며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여기가 변두리 구역인걸 감안해도 이 정도로 시끄러운 소란이 벌여졌다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나 도시를 순찰하는 경비병분들이 슬슬 오셔야 하지 않나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녀석들이 주변 지대에 방음 마법을 미리 깔아 둔 거 같더구나놈들 중에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마법사가 섞여있었거든평균적으로 230분 정도 지속되는 마법이니까 지금쯤이면 효과도 다 끝났겠지.”
“그동안 메림 언니한테 나름대로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은 별의 별게 다 있군요."
실력 있는 마법사까지 동원했다면 주인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좀도둑은 아닐 텐데 말이죠
록시아는 마음속에 피어난 의문을 로덴에게 제차 던지고 싶었지만지금은 본래 잠들어 있어야 할 새벽이런 시간에 너무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은 주인님에게 커다란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제하기로 했다
“자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중얼거린 로덴은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린 집을 바라보면서도 머리를 박박 긁었다외부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산성 안개가 퍼져 나갔던 자신의 방과 거실 구역은 더욱 처참하리라
저걸 복구할 생각을 하니 놈들과 싸웠을 때 보다 훨씬 더 배가 아파진다이것저것 정리해야 할게 많았지만 최우선적으로 치워야 하는 건 네 구의 시체
집안에 널브러진 시체를 방치한 채 태연히 잠을 청하는 매니악한 취미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록시아와 함께 문을 통해서 집으로가게 구역으로 들어간 로덴은 소녀 하고 마주 앉고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조금 전에 방 안에서 내가 두 녀석의 목을 베었을 때…너도 봤었니?”
로덴이 확인하고자 했던 점은 시체의 폴리모프가 풀려서 마족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록시아가 봤을지의 여부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녀가 모처럼 다시 만나게 된 동족이 그녀의 목숨을 노렸다는 잔혹한 진실을 몰랐으면하며 짧게 기도했다
“아… 주인님이 검을 휘두르시자마자 순식간에 두 사람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었죠.”
“그러면 혹시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는?”
“네? 아아뇨아무래도 떨어진 머리까지 계속 신경 쓸 겨를은 없는 상황이라 못 봤었는데뭔가 있었나요?”
“…보지 못했다면 그걸로 충분해.”
“???”
기도가 딱 절반만 통했다의아해하는 소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한 로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록시아다시 너 혼자 기다리게 하는 모양새가 돼버려서 미안하지만 거실을 정리하는 동안 여기서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주인님 혼자서만 치우지 말고저도 같이…”
새벽의 습격이 벌어진 이후로부터 주인의 옆에서 지켜지기만 하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던 록시아는 뒷정리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로덴은 그녀의 고운 손을 잡으면서 만류했다
“이 손으로 직접 시체를 건드리게 하고 싶지 않아여기서 기다리거라.”
심지어 그 시체들이 이 아이의 동족인 마족이라면 섣불리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 대신에 맨 마지막에 네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것만 살짝 도와주렴.”
“……알겠습니다.”
록시아로서는 굉장히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를 하고 있는 주인의 말을 얌전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인벤토리를 뒤적거려 두툼한 망토를 꺼낸 로덴은 소녀가 기다리는 동안 춥지 않게끔 망토를 덮어씌워주고 나서야 혼자서 거실로 들어갔다
시체를 치우는 작업은 상당히 강한 비위가 요구되지만 과거에 목 없는 시체를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었던 로덴에게 있어 네 구를 정리하는 것 정도야 간단하다
그는 지하실에 남아있는 커다란 포대들을 챙겨 온 뒤마족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수습하기 시작했다
* * *
새벽의 고요한 숲 속
“……디그”
눈을 감은채 정신을 집중하던 록시아가 들고 있는 완드의 수정구에 마력으로 인한 빛이 뿜어지며 주문이 완성되었다
ㅡ쿠구구구…
적지 않은 마나를 투자해서 완성시킨 디그는 제법 깊은 구덩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덴이 네 자루의 포대를 각 구덩이 안으로 능숙하게 집어넣는다
이윽고 모든 포대를 밀어 넣은 로덴이 고개를 끄덕거리자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미리 주문을 읊고 있던 록시아의 의지에 따라 구덩이들에 흙덩이가 덮였다
“주인님이걸로 충분한가요?”
“그래도와줘서 고맙구나록시아 덕분에 수고를 상당히 많이 덜었어.”
허어감쪽같네
구덩이는 말끔하게 메워진 정도가 아니라 주변의 땅과 비교해서 이렇다 할 위화감이 없도록 적절한 위장처리까지 되어 있는 상태.
일전에 록시아가 엿보기용 구멍을 감춘 흔적을 보았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역시 이 아이는 무언가를 숨기는 작업을 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ㅡ뚝뚜둑
로덴은 마족의 시체가 들어있는 네 자루의 포대를 둘 씩 나눠경비병들과 시민들의 눈을 피해서 바깥까지 옮기느라 고생한 몸을 느긋하게 풀어주었다
이 녀석들이 마족이 아니었으면 이런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이 경비병한테 시체를 넘겨줬으면 됐는데 말이지
습격자의 정체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소녀에게 감추고 싶은 로덴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새벽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뻐근한 몸을 얼추 풀어낸 로덴이 록시아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게 됐을 때그녀는 마족들이 묻힌묘비 없는 무덤을 향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아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저희를 덮친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땅에 묻게 되니까 무게감이랄까의무감 같은 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이러고 있었네요주인님제가 이상한 건가요?”
“아니이상하지 않아같이 하자꾸나.”
바로 돌아가는 대신 한동안 소녀와 나란히 무덤들을 향해 묵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오랫동안 망각해버렸던사람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록시아 덕분에 다시 깨우치게 된 느낌이 들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업히렴.”
“네.”
로덴은 빠르게 돌아가기 위해 록시아를 등에 업은 채 숲을 빠져나왔다
지금 같은 새벽 때에 도시의 성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은 당연한 법로덴은 성벽의 사각지대를 어렵지 않게 타고 넘어가 별 다른 제지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고로덴과 록시아는 무사히 집으로 되돌아왔다.
집안은 이래저래 정리해야 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일단은 푹 자고 일어나서 치우기로 했다
로덴의 방은 완전히 엉망이 돼버린 상태였으니 두 사람이 잠을 청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록시아의 방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자세로 나란히 누웠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에는 처음 누워보네.”
“지금까지는 제 쪽에서 주인님의 방으로 향했으니까요호혹시 이상한 냄새 같은 건 안나죠?”
“이상한 냄새는 무슨오히려 좋은 향기만 풍겨지는구만 뭘.”
“으읏기쁘면서도 뭔가 좀 많이 부끄럽네요….”
빈말이 아니다록시아가 약 일 년간 사용했던 침대에는 그녀의 체취가은은한 라벤더 향이 배어있어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평소의 두 사람이었다면 중간부터 서로 끈적하게 물고 빨면서 몸의 대화를 나누었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수면욕이 성욕보다 훨씬 강했다
로덴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눈이 감겨버린 록시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아서야 가게에 뻥 뚫린 파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경비병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물어봤다
사전에 록시아하고 이야기를 맞춘 로덴은 밤중에 강도들이 침입했고놈들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이렇게 되었다며 얼버무렸다
당연하지만 오늘은 집을 수리해야 하는 관계로 휴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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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그 시각주군인 에스카로스를 돕기 위해 개인 연구소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멀린은 인간들의 영역에 파견한 사냥개 요원들정확히는 그중 유일한 마법사인 피넷에게 정기 보고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
충직한 심복이자제자인 그 녀석이 보고를 까먹었거나늦게 할리 없다고 확신한 멀린은 서류들을 구석에 치우고서 웅얼거리듯이 장거리 텔레파시를 시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마법사 피넷만이 아니라 몽크 보르보검사 라니에트도적 에르나…녀석들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다네 사람이 단체로 다른 차원인 던전으로 들어간 바람에 신호를 찾을 수 없거나다 함께 죽어버렸거나
던전으로 진입하겠다는 보고는 딱히 없었으니썩 믿기지는 않아도 후자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훈련시킨 사냥개중에 전투력과 연계력 모두 발군인 넷의 조합은 어지간한 수준의 강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터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의문이 다시 피어올랐다
ㅡ부스럭부스럭
서류더미 사이를 뒤적거려 북부 대륙의 지도를 꺼내 든 멀린은 사냥개들이 마지막으로 방문했다는 영지인 바르멜라를 찾아냈다
마지막 보고에서는 동족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포션 가게를 습격하겠다고 전했었지설마 그곳에서 역으로 당했다는 건가?
진실이 어떻든 간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바르멜라가 표기되어 있는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본 멀린은 이 주변 지대에 텔레포트를 하기 위해 필요한 좌표를 머릿속으로 가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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