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108화 (108/149)

〈 108화 〉 검은 사냥개 (9)

* * *

조금전

검은 사냥개 4인방이 포션 가게의 보안장치를 무력화시키고집안에 들어섰을 무렵… 침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흘리고 있는 희미한 살의에 날카롭게 반응한 로덴이 번뜩 눈을 떴었다

“…….”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맨 처음으로 시야에 담긴 건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온몸으로 주인의 다리와 허리를 끌어안고 새근새근고운 숨을 고르고 있는… 숙면 중인 록시아의 모습

모험 경력을 통해 적의나 살의 등에 한하여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감각이 개발되어버린 자신과 달리 이 어린 소녀의 인지 능력이 한참 부족한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그것도 이런 꼭두새벽시간에 억지로 깨우는 악취미는 없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록시아록시아록시아.”

그는 소녀의 이름을 연달아서 부르는 것과 동시에 가녀린 어깨를 흔들어서 그녀를 강제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으음 …주인님?”

“일어났어?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일단은 반지부터 얼른 끼렴.”

“…네…네.”

록시아는 비몽사몽 한 상태라 정신이 없었지만 주인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르며 침대 옆의 탁상에 올려두었던 아티팩트 반지를 다시 착용했다

휘어진 뿔이 사라지고 길쭉한 귀가 줄어들어 마족으로서의 상징성이 말끔히 사라지며 서서히 인간 소녀의 모습으로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인벤토리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든 로덴은 뚜둑 뚜둑몸을 가볍게 풀고 있었다

한밤중에 뜬금없이 무기를 들고 있는 주인을 보게 되자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록시아가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로덴을 올려다봤다

“단순한 좀도둑이야금방 쫓아낼 테니까 너는 여기 있으렴…혹시 모르니까 일단 정신은 바짝 차려두고.”

어지간히 숙련된 전사가 아니라면 코앞까지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할 만한 잔잔한 살의를 희미하게 품고 있는 침입자들의 정체가 고작 좀도둑 따위일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지만로덴은 소녀를 최대한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적당한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록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로덴은 소녀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온화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만큼 차디찬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

시꺼먼 옷과 복면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괴한 4명이 집주인을 보자마자 달려오다 말고 몸을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한창 잘 시간에 이것들은 또 뭐야….”

ㅡ스팟!

녀석들 중 두 놈이 눈을 마주치더니 문답무용으로 달려들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를 휘둘렀다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살의가 담겨있는 날카로운 공격

각도속도위력연계력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연격이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객들이 오랜 시간 서로 합을 맞추면서 완성시킨 결과물이겠지

로덴의 급소만을 노리고 있는 두 자루의 날 선 곡도와 맹독이 듬뿍 담긴 단검은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해결법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ㅡ촤아악!

벤다피할 필요도막을 필요도 없이 놈들의 공격보다 더욱 날카로우면서도 빠르게 정면으로 베어내면 그만이다

진한 오러에 감싸인 칼날은 괴한이 휘두르고 있는얄팍한 오러를 두른 쇳덩어리와 살을 갈라내었고 무기와 함께 절단된 팔은 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허공을 여러 바퀴 회전했다

“끄흐으으읍?!”

“커헉… 아흐윽…!”

투둑툭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신음성을 흘리며 외팔이가 돼버린 두 녀석은 재빠르게 뒤로 후퇴했다

로덴은 놈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곧장 검을 휘둘러 마무리를 지으려 했지만

ㅡ쩌저정!

후방에 있던 마법사 피넷이 날려 보낸 얼음 화살 여러 다발이 훼방을 놓았다.

“생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구려떨어진 팔을 곧바로 붙일 여유는 없으니 당장은 이걸로 참으시오…패스트 힐”

다시 돌아온 두 대원에게 손을 올린 덩치대장 보르보가 회복 마법을 연달아 사용하여 절단 부위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게 조치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로덴을 응시하며 주먹을 움켜줜채대원들의 귀에만 들리게 말했다

“암습같은 잔재주가 쉽사리 통할 만만한 전사가 아닌듯하니 내가 정면으로 맞붙겠소이제부터 당신들이 나를 보조하시오.”

검은 사냥개 4인방이 생각지 못한 강자인 로덴을 상대하게 위해 작전을 변경하고 있는 한편…

“마법사랑 힐러까지 있었나.”

‘저런 조합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돈을 목적으로 침입한 강도 일리는 없는데…뭐하는 새끼들이지?’

로덴 또한 야심한 새벽에 난데없이 집안에 들이닥친 괴한들이 본래는 이런 변두리 영지에서 마주할 일이 없을 실력자 집단이라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원래는 일격에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는데두 녀석 모두 한쪽 팔만을 희생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후속타로 날아온 마법의 발동 범위랑 정확도는 만만치 않았고덩치 큰 힐러가 순식간에 사용한 회복 마법 또한 절단면의 출혈을 깔끔히 막아낼 정도로 응급처치에 능하다

놈들의 눈빛을 보아하니 멀쩡한 상태에서 말을 걸어봤자 의미 있는 정보는 얻지 못할 것이다로덴은 무의미한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검을 고쳐 잡았다

로덴과 마찬가지로 적을 내내 응시하던 보르보는 자세를 낮추더니…

“흡!”

ㅡ쿠콰콰!

짧고 굵은 기합을 내질러 나무 바닥을 박살 내더니 주변에 충격파가 전해질 정도의 힘으로 박차며 적에게 뛰어나갔다

화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려든 보르보의 양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였고로덴은 그 모습을 통해 눈앞의 상대방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파악했다.

‘회복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무투가… 이 자식몽크구나!’

더군다나 보르보가 고속으로 내지르고 있는 주먹에는 조금 전의 두 녀석이 휘두른 무기에 담긴 얄팍한 오러보다 훨씬 순도 높은 오러가 담겨있다상당한 수행을 쌓은 실력자가 틀림없다

저 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한다면 꽤나 위험하다

오러가 담긴 공격을 안전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오러혹은 상위 마법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공격만이 최선의 방어다다시금 오러를 담아낸 로덴의 검격이 보르보를 베어내기 위해 휘둘러지고녀석은 방향을 틀지 않고 그대로 정면으로 맞붙었다

ㅡ카아앙!

주먹과 검이 충돌했음에도 단단한 무쇠끼리 맞부딪히는 듯한 파공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윽상당한 검술과 오라구려…!”

공격력은 로덴이 더욱 우세했기에 결과적으로 피를 보게 된 것은 보르보였다충격을 완전히 감당하지 못한 녀석의 팔이 주욱 베여졌다

유효타긴 했지만 치명타는 아니었다

이대로 후속타를 꽂아 넣으려 했으나놈의 뒤에 있는 대원들이 연달아 공격을 퍼부어서 로덴의 행동을 잠시 저지했다

대원이 벌어준 짧은 틈새에 회복 마법으로 부상을 치료한 보르보가 다시 주먹을 휘둘러 로덴과 정면승부를 벌였다

‘온몸이 흉기인 주제에 자체적인 회복까지 할 수 있다니… 몽크는 역시 귀찮은 놈들뿐이야.’

로덴이 마음속에서 불만 섞인 말을 꺼낸 이후에 단 2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로덴과 검은 사냥개들이 주고받은 공방에서 무수한 불꽃이 튀었다

ㅡ캉카앙!카카캉!!

용사로 활동하던 전성기와 비교했을 때 검의 날카로움이랑 속도는 현저히 떨어져 버렸으나썩어도 준치인지라 로덴이 검은 사냥개들에게 크고 작은 부상을 누적시켜서 확실한 승기를 잡고 있었지만…

공방의 대가로 로덴의 육체가 아닌그가 들고 있는 무기가 갑작스러운 한계를 맞이해버렸다

ㅡ쩌저적…

연이은 오라의 충돌을 버텨내지 못한 바스타드 소드는 마치 거미줄이 쳐지는 것처럼 칼날 전체에 금이 쩍쩍 새겨지더니그대로 갈라져 버리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상대방의 무기가 사라져 버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보르보는 유달리 묵직한 힘이 담긴 일격을 내질렀다

“파쇄권!!“

무기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방어 혹은 회피다

로덴의 반사신경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겠지만소녀가 숨어있는 방을 등지고 있는 지금저 정도의 오러가 담긴 공격을 피하다간 방안에 있는 록시아가 크게 다칠 위험성이 있다

‘…아마 저 녀석도 내가 이 방을 지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서 굳이 저런 무식한 공격을 사용한 거겠지.’

결국에 그가 선택한 것은 방어양손에 오러를 집중시키고 X자로 교차한 뒤보르보의 일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ㅡ퍼어어억!!

뼈가 울리는 듯한 둔탁한 충격!로덴의 몸은 등지고 있는 방의 벽을 박살내면서까지 뒤로 몇 발자국 떠밀렸다어떻게든 막아내긴 했지만 약간의 내상을 입어버렸다

“쿨럭… 쿨럭!”

자기 전에 먹은 내용물이 올라올 것만 같은 구토감을 참아내지 못한 로덴은 거센 기침을 연달아 토해냈다

“주인님!!!!!”

한편로덴의 말대로 방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록시아는 벽이 부서질 정도의 공격을 받은 주인의 모습을 생생히 보게 되며 가슴이 철렁거리는 느낌을 받게 됐다

당연히 소녀는 주인이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괜찮지 않다면 회복하기 위해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바로 앞에 있는 검은 사냥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으신가요?!다당장 회복 마법을 걸쳐드릴게요!”

대답도 듣지 않은 록시아가 부랴부랴 회복 주문을 외우려 하자로덴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아무튼갑자기 방이 엉망진창이 돼버렸는데… 록시아야 말로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네넷!맨 구석자리에 있어서 괜찮았어요.”

“후우… 다행이구나.”

록시아가 무사한지의 여부를 확인한 로덴은 검은 사냥개들이 조금 전에 잘라낸 팔을 다시 주워서 치료하고 있는 사이에 재빨리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오라끼리의 충돌을 버틸 수 있을만한제대로 된 무기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로덴은 검에 살고검에 죽는 검잡이인 만큼 검은 사냥개 정도 수준의 실력자 집단과 맨 주먹으로 싸운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줘야 할 소중한 존재가 있는 상황

‘여러 가지 의미로 눈에 띄는 무기라 그날 이후로 두 번다시 휘두르지 않았던 녀석인데…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거 같군.’

인벤토리에 넣은 손을 다시 밖으로 꺼낸 로덴의 손에 들린 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칠흑색의 장검

용사로서 전대 마왕을 살해한 그날 이후로덴의 정체와 함께 다시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무기다

마족의 뿔 수백 개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졌다는, 통칭‘칠흑의 검’이라 불린 애검이 거의 15년 만에 로덴의 손에 다시 들리게 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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