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검은 사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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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드는 순간적으로 두 귀를 의심했다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보이는 녀석이 마족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녀석이 언급한 『멀린』이라는 이름
같은 마족은 물론타 종족들에게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마법사
인간과의 전쟁에서든 같은 마족과 벌이는 내전에서든 그가 난입하여 대마법을 펼치기만 하면 수백수천의 병사를 몰살시켜서 손바닥 뒤집듯이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마왕에 필적하는 괴물
단순한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그냥 넘어갈 이름이 아니다율리드는 언제든지 적에게 무기를 휘두를 수 있게 대비하면서도 놈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동족의 언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시험해 볼 겸마족어를 사용하면서
“멀린?설마 외팔의 현자 멀린을 말하는 거냐?”
“존경의 마음을 담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막 부르다니… 마계국을 등지고 인간 따위랑 같이 살아가고 있는 버러지 주제에 불경하구나.”
반응을 보면 율리드가 생각하고 있는 그 멀린이 맞는 모양이다한 가지의 의문이 해소되는 한편율리드는 아무리 봐도 인간족인 상대방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인간이 아닌 것 마냥 말하고 있구만마족어를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꺼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마치….”
“마족 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그야 당연하지지금은 수월한 잠입을 위해 이런 시답잖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나도 네놈과 같은 마족이거든.”
“헛소리를 하는 눈빛은 아니로군.”
녀석이 율리드와 같은 마족이라면 마족어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을 낮잡아 보는 말투를 쓰는 이질적인 모습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대답이야 뻔하겠지만일단은 확인해야겠군최근 들어 이 도시 저 도시를 넘나들며 마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다닌다는 마족 살해범이 너냐?”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우리들참고로지금 내 동료들은 이 주변에 목격자가 기어 오지 않게끔 힘쓰고 있는 중이지.”
“같이 다니는 놈들도 마족인가?”
“물론.”
지금까지 인간의 도시에 살아가는 마족을 죽이는 동안 정체를 철저히 숨겼던 녀석이 율리드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답해주는 것은 사냥감을 이 자리에서 놓치는 일 없이 확실하게 처리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역시 저놈 말고도 다른 녀석들이 더 있구나.’
율리드의 식견으로 판단하기에 눈앞에서 노골적인 살의를 계속 드러내고 있는 상대방과 자신의 실력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정보 수집은 당장 집어치우고 지원이 오기 전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거나 싸워서 놈과 대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일초라도 벗어나는 게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인간의 영역에서 겨우 적응하며 새 삶은 얻은 마족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다름 아닌 동족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이것만큼은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네놈들이 찢어 죽인 동족들마계국에서 벗어난 신세라고는 하지만 같은 피가 흐르는 마족 아닌가?어떻게 동족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거지?”
“그야말로 우문이군처음에 마주할 때 분명히 말한 거 같은데?멀린님에게 그 머저리들… 인간에게 빌붙고 있는 스쿠피타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아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족은 지금껏 죽인 동족들을 마족들 사이에서 쓰레기를 뜻하는 은어로 부르면서 서서히 칼을 빼들었다슬슬 말뿐인 대화를 끝내고 피의 대화를 나눌 생각이다
“멀린이 그딴 명령을 내렸다고?…네 녀석들은 그 명령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동족들을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는 거냐?!”
“지혜로우신 그분의 뜻은 언제나 옳다충성스러운 사냥개는 주인이 명령하는 순간마다 순순히 따를 뿐함부로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지.”
“또라이 새끼들…!”
녀석의 행동 이념은 사악한 광신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격정에 휩싸인 율리드는 놈에게서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율리드는 딱히 정의롭거나 동족애를 강하게 느끼는 성격은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명령에 따르기 위해 동족을 거리낌 없이 살해하는구역질 나는 놈은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다
“일단은 그 재수 없는 낯짝부터 갈아주마!”
쉬이익!율리드가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두른 붉은 채찍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일으키며 적의 얼굴을 노렸다
순간적으로 음속을 돌파할 수 있는 채찍 끝이 선사하는 편타(??)는 사용자의 재량에 따라서 신체가 뜯겨나갈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다
이대로 채찍이 적중하면 습격자의 얼굴 가죽은 순식간에 뜯겨나갈 것이다
ㅡ휘리릭!
순식간에 두 자루의 곡도를 꺼내 든 녀석은 한 자루를 높이 들어서 채찍을 막아내어 둘둘 감게 한 채그대로 율리드에게 바짝 다가가 나머지 곡도를 휘둘렀다
카앙!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율리드 역시 나머지 손으로 소검을 꺼내 들어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두 마족은 그 상태로 서로의 무기를 맞대면서 힘 승부를 벌였다막상막하로 밀고 당기는 게 여러 번 반복되다가도 율리드가 차츰 밀려난다
“허인간의 도시에서 비굴하게 살고 있는 놈치고는 힘 좀 쓰는구나그래 봐야 이대로면 내가 이기겠지만.”
“싸움에서는 힘이 전부가 아니지.”
율리드는 적을 무기째로 감고 있던 채찍을 기습적으로 잡아당겨서 순간적으로 몸을 기울게 하더니발목을 걷어차서 순식간에 넘어뜨렸다뿐만 아니라 적을 휘감고 있던 채찍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교묘한 솜씨로 녀석이 곡도를 놓치게 만들었다
“읏어디서 잔재주를….”
“이런 건 보통 기술이라고 부르는 거야멍청한 새꺄.”
적이 일어날 틈도 없이 율리드가 날카롭게 채찍을 휘둘렀다
ㅡ촤라락!팡!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인 채찍은 무기가 없어서 무방비해진 적의 손을 강타했고그대로 새끼손가락을 뜯어냈다.
습격자가 고통 섞인 신음을 지를 틈도 없이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있는 율리드의 매서운 채찍질이 폭풍처럼 쏟아진다
ㅡ촤악!팡!찰싸아악!!파아앙!촤아악!!
녀석은 어정쩡하게 일어난 자세로 하나밖에 없는 곡도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치명상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다놈이 방심하다가 무기를 놓친 순간에 승부가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율리드가 일방적으로 채찍을 휘두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살점을 수십 차례 뜯겨버린 습격자의 온몸은 본인의 피로 인해 흠뻑 젖어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놈을 채찍질만으로 천천히 죽여버리고 싶지만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위험해빠르게 처리하고서 당장 길드로 가자.’
걸레짝이 돼버린 습격자의 등짝을 걷어차서 바닥에 엎드리게 한 율리드는 올가미처럼 감아낸 채찍을 녀석의 목에 걸고는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ㅡ꾸드드득….
“…?!!”
당황한 녀석은 목에 감겨있는 채찍을 무작정 뜯어내려 했지만연이은 공격으로 적지 않은 체력이 빠진 데다가 촘촘하게 감겨있는 채찍은 마음대로 잡히지 않는다
율리드를 직접 공격해 보려 해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지금의 자세에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내 버둥거리던 적의 동공이 완전히 위로 올라가 버리기 직전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는 비도가 율리드의 머리에 날아왔다
“쳇!”
혀를 차며 몸을 뒤로 쭉 뺀 율리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비도를 피했다그 사이에 마족 살해범의 일행 놈들이 와버린 것이다
“꺄하하☆ 뭐야뭐야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큰소리 떵떵 치더니 이게 뭐래니?그대로 뒤지게 내버려둘걸 그랬나?”
“꼴사나워.”
“젠장…!둘 다 닥쳐!”
“아직 적이 눈앞에 있는 상태니까 우리끼리 싸우지 마시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추가로 나타난 일행은 여자 하나에 남자 둘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녀석을 합하면 네 명이다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놈들도 마족이겠지.’
새로 나타난 적들이 조금 전까지 상대한 이 녀석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율리드에게 승산은 희박하다그렇다고 도망가자니 사방으로 포위된 진형이라 그것 또한 매우 힘들 것이다
ㅡ두근두근…
죽음의 아수라장을 몇 번이나 해쳐온그런 자에게만 작용하는… 예지에 한없이 가까운 감이 있다
그 감이 율리드에게 강렬하게 속삭이고 있다
너는 지금여기서처참하게 죽는다고
“어머머☆ 이 아저씨 눈빛 봐라?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해볼 생각인가 본데?”
“끈질겨.”
허나겨우 그런 게 전의를 상실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신속히 이동하여 벽을 등짐으로서 최악의 포지션만은 피한 율리드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피가 격렬하게 끓어오른다한때 긍지 높은 전사였던 그는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다가 죽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족도애인도 없는 몸이니 크게 슬퍼할 사람은 없을 거다
‘아참그러고 보니그 쌍둥이 자매… 다음에 이 도시에 올 기회가 생기면 로덴이라는 이름의 애인과 록시아라는 동생을 데려와보겠다고 했는데결국에는 못 보게 돼버렸군은근히 궁금했는데아쉽구만.’
다가오는 적들을 똑바로 응시하며그간 같이 일했던 몇몇 동료들을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쌍둥이 자매의 얼굴이 스쳐간 율리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ㅡ휘리리릭!
모든 잡념을 떨쳐낸 율리드는 네 명의 적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죽을 각오로 무기를 맹렬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길동무 하나는 만들어 둘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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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1의 싸움은 자잘한 피해는 있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는 없이 다수 쪽의 승리로 끝났고싸늘한 주검이 돼버린 마족 모험가의 시체 앞에 무릎을 꿇은 거한의 남자가 합장하고 있었다
“…잘 가시길그대의 죽음도 의미가 있을 것이오.”
“대장님도 차~암 특이해☆ 매번 죽이는 놈들마다 그렇게 눈물콧물을 다 흘려가며 기도하다니가만 보면 우리 중에서 대장님이 가장 또라이 같다니까.”
“이번에 너네는 건드리지 마!이 새끼는 내 손으로 조각낼 거야.”
“그러면 빨리 처리해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채찍으로 인해 잘려나갔던 손가락을 치료하고서 쥐락펴락한 남자가 씩씩거리며 마족 모험가의 주검에 칼날을 세우더니 ‘작업’을 시작했다
시체를 최대한 처참한 상태로 만들어서 마족이 죽은 이유가 마족을 깊이 혐오하는 인간 절대주의 사상에 의한 종족 차별 범죄로 위장하기 위한 작업이다
지금까지 이 작업을 꾸준히 한 덕분에 세간에는 마족을 죽이면서 돌아다니는 인간 절대주의 단체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은 완전히 끝났고나자리의 으슥한 골목 구석은 피바다가 됐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떠난 네 명의 마족은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그들의 대장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선은 조금 돌아가서 항구도시 라드비에 한동안 머무른 다음바르멜라 영지를 거쳐알트마 왕국으로 올라가 보도록 하겠소.”
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다시 모일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서 뿔뿔이 흩어진 네 사람의 정체는 멀린이 인간 세상에 있는 마족을정확히는 마왕의 가능성이 있는 마족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살하기 위해 엄선한검은 사냥개의 최정예 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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