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99화 (99/149)

〈 99화 〉 두 사람 (13)

* * *

어느덧 나이트 비전의 효과가 다 떨어져 버린 쌍둥이 자매는 메림이 만들어낸 빛의 구체에 시각을 의존하여 연장전을 펼쳤다

쌍둥이 자매와 트롤의 상위종하이 트롤과의 전투는 전체적으로 쌍둥이 자매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그녀들이 상상한 것 이상인 재생력이 걸림돌이 되어 전투가 길게 늘어져 버렸다

1시간? 2시간?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쌍둥이 자매의 입장으로서는 시간이 벌써 얼마나 지나버렸는지 영 파악이 되지 않는다모르긴 몰라도 시험 시간이 그리 넉넉하게 남아있지는 않을 터다

ㅡ후­우웅!

“…! 언니! 조심해!”

상념에 빠진 사이멀찍이 있는 메림을 노려보던 하이 트롤이 그녀를 향해 사람 머리만 한 돌덩이를 기습적으로 집어던졌다

마릴이 막아주기에는 각도가 너무 높았기에 메림이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이미 가속이 붙은 돌덩이를 맨 몸으로 피하는 건 불가능얼음 방패로 막아내기도 많이 버거워 보이는 공격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블링크!”

ㅡ스팟!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대체로 긴급 탈출의 순간에 사용하는 단거리 텔레포트 마법블링크

비상용으로 메모라이즈 해둔 블링크를 시전한 메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그 위치를 노리던 돌덩이는 허공을 지나가 벽면에 충돌사라졌던 메림은 차갑게 식은 트롤의 시체 옆에 나타나 진땀을 흘리는 시늉을 한다

“새끼깜짝 놀라게 하기는…!”

“흡!”

“쿠어어어!!”

한편돌덩이를 던졌던 하이 트롤은 눈앞의 전사에게 커다란 빈틈을 보여버린 대가로 가슴에 깊은 상처가 그어지면서 뒤로 크게 물러났다

ㅡ꾸물꾸물…

검상은 다시 아물기 시작했지만 처음에 비하면 말끔히 복원되지도 않고 재생속도가 현저히 느리다장기전의 성과로 재생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시험의 제한 시간도 점차 좁혀지고 있으니이쯤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동생에게 신호를 보낸 메림은 하이 트롤에게 지팡이를 겨누며 신속정확하게 영창 했다

“파이어볼!!”

가장 단순하지만 위협적인 화염계 마법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하이 트롤의 명치에 처박혔다퍼엉! 거대한 폭발이 일면서 순간적으로 놈의 주변에 뿌연 연기가 자욱해졌다

시야가 불분명해지자하이 트롤은 후속타를 막아내기 위해 양 팔을 십자로 교차해 머리를 보호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연기 속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마릴은 녀석이 방어하고 있는 부분과 정반대인 다리를 노렸다

ㅡ촤아! 촥!!

그녀가 연속으로 휘두른 검이 하이 트롤의 양쪽 발목을정확히는 아킬레스건을 그어냈다녀석은 결국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평소의 하이 트롤이라면 이 정도로 가벼운 부상쯤은 순식간에 재생할 수 있지만지금은 재생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당장 일어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

마릴은 땅바닥에 쓰러진 하이 트롤의 목을 겨냥한 채로덴에게 배운 요령대로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나를 움직여 검을 쥔 손끝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전수받은 기술을 시전 했다

이름에는 힘이 담기는 법이름이 없는 기술은 존재할 수 없다마릴은 힘 있게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일도양단!”

…지나치게 단순한 이름이지만 본래 기술을 정의하는 명칭은 심플하고 직관적인 게 좋다

마나와 힘을 담아 가로지른 마릴의 검격이 선명한 궤적을 그린다하이 트롤의 두툼한 목을 근육과 뼈째로 절단하여 녀석의 몸뚱이와 머리를 분리시켰다깔끔한 일격이다

“후우… 드디어 끝났다.”

“으아아~ 생각보다 훨씬 빡센 마물이었네한 마리 먼저 없애고 시작한 덕에 겨우겨우 이겼어….”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하이 트롤의 머리통을 내려다본 쌍둥이 자매는 그제야 긴장을 풀어내고나란히 바닥에 주저앉더니 서로 손뼉을 짝짝거리면서 수고의 말을 나누었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이 하이 트롤과 싸우고 있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지켜본 율리드는 조금 전에 쌍둥이 자매가 내려놓은 배낭을 챙겨 오더니말없이 그녀들의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어머고마워요율리드 씨.”

“일어나서 갖고 오기 귀찮았는데 고마워마족 선배~”

곧장 배낭 안에 보관된 수통을 꺼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 쌍둥이 자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들은 하이 트롤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율리드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저기저 놈하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나버렸는지 영 구분이 안 가더라… 혹시 늦은 건 아니지…?”

“정해진 시간 안에 트롤들을 잡아낸 게 맞으니 안심해라이대로 길드에 돌아가면 너희 둘 모두 무사히 승급할 수 있어합격이다.”

“다행이다…기쁘긴 한데뭐라고 해야 할지당장 실감은 안 나네요.”

모든 상황이 종료되니 하루를 꼬박 새버린 반동이 뒤늦게 찾아온 쌍둥이 자매를 엄습한 것은 적지 않은 피로감그녀들은 트롤의 시체에서 전리품을 퍼뜩 챙기고 돌아가기로 했다

트롤 하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는 재생력그리고 재생력의 원천은 녀석들의 피와 심장이다

포션이나 약품의 재료로 취급하는 트롤의 피와 심장은 마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중 제법 비싼 편에 속한다

두 여자는 나자리를 떠나기 전에 미리 챙겨둔배낭 안을 절반 정도 차지한 가죽 물통들을 꺼내 들고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우선 맨 처음에 처리한 트롤 먼저

“이왕이면 거기서 조금 더 위를 찌르는 게 더 많은 피를 뽑아낼 수 있을 거다.”

“여기쯤이면 되나요?”

“그래.”

율리드의 조언을 들으며 자세를 잡은 마릴이 트롤의 목을 깊숙이 찌르자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쪼르르 나왔다바로 옆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메림이 가죽 물통을 더욱 가까이 대어 피를 받아냈다

잠시 후트롤의 시체에서 상하지 않은 피를 엄선한 쌍둥이 자매는 녀석의 심장도 뽑아서 따로 보관했다습격으로 심장을 노렸던 탓에 약간 손상돼 있었지만 이대로도 나름 비싸게 팔린다

뒤이어 하이 트롤의 시체로 다가간 쌍둥이 자매가 조금 전과 동일한 작업을 하려고 했을 때율리드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놈의 피는 조금 전에 뽑아낸 녀석의 피랑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끔 분류하는 걸 추천하지…상위종의 피 값을 제대로 받고 싶다면 말이야.”

조금 전에 상대한 트롤을 단순한 돌연변이의 일종으로 여기고 있던 쌍둥이 자매는 뜻밖의 정보에 눈을 크게 떴다

율리드는 그녀들에게 시험의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버리게 된 경위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쓰러뜨린 트롤이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라 상위종이었다니….”

“마을에서 설명을 빼먹었다라… 길드에서 비슷한 사고가 생겼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보긴 했지만이런 대형 마물을 토벌하는 의뢰에서 이런 일이 터지는 건 좀 에반데….”

“동감이야의뢰를 작성한 촌장한테는 내가 직접 적절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다그걸 위해서라도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쌍둥이 자매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하이 트롤의 피와 심장을 뽑아내는 작업을 해나갔고지금은 마무리까지 끝마친 상황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드는 이제 시험도 끝났기에 쌍둥이 자매와 나란히 동행한 상태로 둥지를숲을 헤쳐나가 농촌 마을로 향했다

* * *

“모험가분들이 돌아왔다!!”

“괴물은? 그 끔찍한 괴물은 잡은 것이오?”

농촌 마을에 무사히 돌아온 쌍둥이 자매와 마족은 차츰 모여들고 있는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이번 사냥의 증거물인 트롤들의 머리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몇 시간 전에 삼도천을 건너버린 녀석들은 아가리가 쩍 벌려진 채혀가 길게 늘어져 버렸다

의뢰인인 촌장은 거리에 보이지 않는다집에 있나 보다

식인 괴물의 대가리를 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은 주민들을 관찰하던 율리드는 가벼운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이 마을을 습격했던 트롤들은 이놈들이 틀림없겠지?”

“예예! 이 괴물들이 틀림없습니다!”

“이 새끼들이 욥하고 마이크를…!”

잔뜩 흥분한 주민들의 증언을 새겨들은 세 사람은 머리통들을 도로 회수하고서 한달음에 촌장의 집으로 향했고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트롤 대가리를 꺼내서 촌장에게 보여준 뒤율리드는 품에서 모험가 길드의 의뢰서를 내밀었다맨 끄트머리에는 도장을 찍는 공간이 있다

“의뢰받은 대로 트롤들을 처리해 왔다도장을 부탁하지.”

“오오이렇게나 빨리 잡아오다니… 일처리가 빠르군수고들했소.”

주섬주섬도장을 꺼내 든 촌장은 의뢰 완수란에 붉은 인감을 찍어냈다이걸로 의뢰 자체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완성된 증서를 품속에 집어넣은 율리드는 촌장이 아닌 척하면서도 뿔 달린 트롤의 머리를 연달아 흘끔 거리며 자신들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ㅡ화아악!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율리드는 기습적으로 촌장의 멱살을 붙잡았다

“으허어억!? 가갑자기 무슨?!”

마족은 노인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으르렁 거리듯이 대답했다

“이 망할 노친네가…길드에 의뢰를 신청할 때는 최대한 상세하게 기재하라고 접수원이 빠짐없이 설명했을 텐데?! 아니면 신청하는 도중에 치매라도 걸리셨나? 뿔 달린 트롤에 대해서 일부로 숨겨두고 있었잖아.”

“…!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진정하시오…!”

“목소리 떨리는 거 봐라… 오해는 무슨.”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된 쌍둥이 자매가 율리드를 황급히 말리려고 했다

“유율리드 씨! 아무리 그래도 노인분한테 이러시면….”

“입 다물어지금 이 문제는 상대방이 여자건 노인이건 애새끼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너희들이야 좋게 끝났지만이딴 식으로 의뢰 난이도가 잘못 책정되면 경우에 따라 허무하게 뒤져버리는 놈들도 있다고.”

다소 거친 행동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솔직히 이번 일은 그녀들도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일단은 율리드의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봐댁이 진짜로 몰라서 덜 적었든알면서도 의뢰비를 아끼기 위해 덜 적었든… 난 아무래도 관심 없어아무튼이번 일은 보고해 둘 테니벌금은 확실히 준비해 두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에 벌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이 마을에 다시 마물이 나타나든 말든모험가 길드는 돕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는 것을 끝으로 율리드와 쌍둥이 자매는 촌장의 집을 빠져나와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탔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나자리에 돌아간 쌍둥이 자매는 율리드의 보증으로 승급 판정과 함께보수인 은화 30닢도 함께 받았다추가로 트롤의 피와 심장도 길드에서 처분해서 은화 24닢을 받아냈다

은 등급 인식표는 다음날에 준비해 준다고 했기에 곧바로 여관으로 직행한 쌍둥이 자매는 이른 시간부터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누적된 피로를 풀어냈다

다음날 아침다시 길드를 방문한 두 사람은 완성된 인식표와 기존의 인식표를 교환하는 것으로 어엿한 은 등급의 모험가로 승급하게 됐다

나자리 길드 측은 쌍둥이 자매에게 여기서 활동해 볼 생각이 없나고 제안했지만… 돌아갈 장소가 있는 그녀들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렇게 쌍둥이 자매는 나름대로 인연을 맺게 된 마족 모험가율리드와 다음 기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 도시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훌쩍 떠나갔다

* * *

며칠 뒤

나자리에서 떠나간 쌍둥이 자매가 무사히 바르멜라 영지에 돌아갈 무렵단독 의뢰를 끝마친 율리드는 자기 집으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한밤중의 골목길을 지나가던 중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거리 잡배 같은 시덥잖은게 아닌명백한 살의를 내뿜고 있는 끈적한 감각

‘마족 살해범들이 여기까지 기어 온건가.’

마족 살해범을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던 율리드의 입장에서 놈이 자신을 타깃으로 삼은 이 상황은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놈을 더욱 은밀한 골목으로 유인했다

잠시 후인적이 거의 없는 장소로 유인한 율리드가 우뚝 멈춰서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슬슬 나오지 그래? 아니면 이쪽에서 가줄까?”

그러자 지금까지 율리드를 미행했던 녀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30대로 추정되는 인간 남자

지금까지 동족을 살해한 놈들은 인간 절대주의 사상에 빠진 인간… 이라며 율리드가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녀석이 목소리를 냈다

“흐음멀린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의 땅에 빌붙고 있는 머저리들을 처리하고 있었는데미행을 눈치챈 녀석은 이번이 처음이군그리고 이렇게 호전적인 녀석도 처음이야.”

흥미로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놀랍게도 마족 살해범이 사용한 언어는 인간의 것이 아닌마계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마족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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