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두 사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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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드가 마계국에서 지냈을 당시민간인까지 피를 보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나자기만의 세력을 가진 고위층끼리의 이권 다툼… 병력과 병력이 부딪히는 자잘한 소모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동족끼리의 땅따먹기에 염증을 느낀 율리드는 적당한 때를 노려 군에서 빠져나온 뒤마계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인 인간의 땅으로 넘어가 삶의 터전을 뒤바꿨다
아무래도 과거에 인간과 전쟁을 벌였던 마족 출신이라 그리 호의적인 대접은 받을 수 없었지만전선에서 선봉장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전투에 능숙했기에 대부분의 트러블은 힘으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인간의 사회에 적응한 율리드가 자연스럽게 선택한 직업은 그의 전투능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종족과 신분과거사를 크게 따지지 않는 모험가
나자리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고 나서부터는 상위에 속한 은 등급까지 금방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굵직굵직한 실적을 쌓았다
‘솔직히운이 좋아서 공헌도를 쉽게 채워낸 촌뜨기 계집들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마족 모험가로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어본 율리드는 면접실에서 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았을 때그다지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경험상 혈연끼리 구성된 파티는 자기들끼리 호흡은 잘 맞지만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강한 편이라 단독으로 활동하면 등급에 비해 실력과 대처능력이 형편없는 게 대다수그녀들도 그런 부류라 생각했다
‘승급시험은 보나 마나 형편없이 실패하겠지’ 정도의 생각으로 대면부터 시비도 걸고평소의 그러면 하지도 않을 시험을 하기 위해 내내 살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웬걸? 막상 까고 보니 살기도 금방 눈치채고숲을 탐색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마물과 야생 늑대 등을 조우했을 때 보여준 결단력과 전투력도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특히 트롤의 둥지 안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마릴의 주도하에 쌍둥이 자매가 고블린의 핏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마물의 사체 일부나 피를 옷과 장비에 묻혀서 냄새를 지우는 저 사냥법은 후각이 발달한 마물을 기습할 때 확실히 효율적이긴 하다
허나실천할 수 있는 모험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너무 역겨우니까
마당에 쥐 한 마리만 나타나도 꺅꺅 비명을 지를 거 같은 곱상한 외모인 쌍둥이 자매가 저걸 실천할 수 있다니…율리드는 적지 않게 놀라버렸다이 자매는 확실히 물건이다
그리고 현재잠에 빠져있는 두 마리의 트롤 중 한 놈에게 성공적으로 접근한 쌍둥이 자매가 동시에 공격하기 일보직전
전사인 마릴은 칼끝으로 트롤의 심장을 겨냥한 자세에서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검을 쥐고 있는 팔에 마나를 끌어모았고
마법사인 메림은 빙결 마법과 전격 마법을 조합한 복합 속성 마법을 시전 하기 위해 신중하고 조용하게 주문을 읊어냈다
이 정도의 지근거리에서 시간을 너무 끌다간 놈들이 깨어날 수 있다최대한 신속하게 주문을 완성한 메림이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먼저 공격을 가했다
“프로즌 라이트닝!”
스태프 끝에서 순식간에 생성된번개를 가둔 큼직한 얼음덩어리가 트롤의 등가죽을 꿰뚫어내어 날카롭게 박혀 들어갔다
ㅡ!? 쿠어어어?!!
즉시 눈을 떠버린 트롤이 황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준비된 공격이 하나 더 남아있다
“하아아앗!”
맑고 고운 목소리그렇지만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기합을 내뱉은 마릴은 언니가 공격한 부분을 다시 한번 정확하게 찔렀다!
쑤우욱!
그러자조금 전에 트롤의 살을 파고들다 말았던 얼음 덩어리가 더욱 깊숙하게 박히게 되어 놈의 심장을 살며시 닿게 됐다
‘…! 닿았어!’
검을 통해 간접적으로 묵직한 감각을 느낀 마릴은 그대로 손잡이를 비틀어 놈의 상처를 후벼 판 다음신속하게 칼을 회수하며 몸을 쭉 빼고는 크게 소리쳤다
“언니지금이야! 터트려!!”
“알았어!”
동생이 충분한 거리를 벌렸음을 확인한 메림은 마나를 조작하여 번개를 가둔 얼음을 문자 그대로 터트렸다
파차차창! 파지지직!!
마치 수류탄처럼 수십 조각으로 잘게 갈라진 얼음 파편이 트롤의 심장과 그 주변을 날카롭게 찔렀고폭발의 기폭제가 된 번개가 놈을 안에서부터 철저하게 지졌다
ㅡ그아어어…
단백질이 구워진 비릿한 냄새가 쌍둥이 자매의 후각을 자극했다겨우 몸을 일으키게 된 트롤은 겉보기에는 멀쩡하나속은 엉망징창으로 헤집어졌다
녀석은 당장 가까이에 있는 적인 마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다가… 털썩바닥에 정면으로 엎어져 버렸다그대로 몸을 여러 번 꿈틀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의심할 여지없는 명백한 죽음
한 놈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쌍둥이 자매는 일제히 반대 방향을 응시했다
당연스럽게도 반대 측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던 트롤이 완전히 눈을 뜨고 있는 상황발치에 내려두었던 몽둥이도 손에 들려있다
“뭔가 좀 다른데…?”
쌍둥이 자매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트롤을 응시하면서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상당히 험악하게 생겼다
아니 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의 외모가 험악하게 생긴 건 지극히 당연하겠지만이 놈은 조금 전에 쓰러뜨린 트롤보다 훨씬 험악하다
달동네 양아치랑 마피아 조직원의 차이라고나 할까?
누워서 웅크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옆의 트롤보다 덩치도 커다랗고근육도 다부져 있으며전반적인 피부의 색감도 더욱 어둡다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정수리에 툭 튀어나와 있는당근을 뒤집은 거 같은 모양의 뿔
ㅡ후우우웅!
어째서 트롤에게 뿔이 달려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여유도 없이 녀석은 거침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ㅡ꽈앙!
위력은 무시무시 하지만보고도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기에 쌍둥이 자매는 신속하게 양 옆으로 갈라져서 회피했다두 여자는 다시금 무기를 붙들어 자세를 다잡았다
“뿔 달린 트롤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 혹시 메림은 짚이는 거 없어?”
“트롤과 관련된 자료는 따로 조사하지 않아서 나도 영 모르겠는데… 돌연변이나 아종이 아닐까 싶어아무튼이놈만 잡으면 승급할 수 있으니까 집중해야지팍팍 지원할 테니 앞에서 시간 좀 벌어줘.”
“그래평소처럼 맡겨둬.”
다시 트롤과 거리를 좁힌 마릴은 지금까지 로덴에게 배운 기초 동작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묵직한 공격은 회피비교적 부담이 덜한 공격들은 버클러로 적절히 막아내며 공방을 펼쳐간다
동생 덕분에 후방에서 안정적으로 마법을 퍼부운 메림은 얼음송곳을 트롤에게 적중시키거나마릴이 만들어낸 검상이 재생하기 힘들게 화염으로 지지면서 공격적인 지원을 했다
그렇게 쌍둥이 자매는 뿔 달린 트롤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한편멀찍이 떨어져서 그녀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드는 분노를 느끼면서 이를 갈고 있다
지금 마족이 분노를 쏟아붓고 있는 대상은 눈앞의 트롤도쌍둥이 자매도 아닌 이번 의뢰를 맡긴 마을 사람들
‘일반적인 트롤보다 어두운 피부색과 정수리에 튀어나온 뿔… 틀림없는 상위종의 특징이다이 개자식들…! 중요한 사실을 숨겨두고 자빠졌다니!!’
가끔씩 있다길드에 의뢰를 맡길 때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재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작성하여 난이도 측정을 잘못하게 만드는 골치 아픈 의뢰인들이
진짜로 모르고 그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대부분의 경우는 의뢰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덥잖은 꾀를 부리는 것이다
쌍둥이 자매의 성공적인 기습으로 트롤 한 마리를 수월하게 처리한 건 둘째 치더라도예기치 못하게 승급 시험의 난이도가 훌쩍 오르게 됐다
저 녀석은 일반적인 트롤보다 치유력이 몇 배는 더 높은 편이라 단번에 신체를 절단할 정도로 강한 공격이 아니라면 유효타를 먹이지 못할 거다
‘쟤들을 도와야 하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율리드는 시험을 중단시키고 그녀들을 당장 지원해야 할지 깊이 고민했다
‘……아니야가능성은 있어.’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젓고는 쌍둥이 자매가 싸우는 모습을 응시했다
‘마법사 쪽은 주문의 발동 속도랑 위력 둘 다 상당히 좋아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주문만 사용해서 마나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기까지 하고 있어…적지 않은 경험과 타고난 센스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이론만 주야장천 배운 샌님 마법사들이 무턱대고 고위력의 마법을 남발하는 바람에 장기전에서 큰 도움이 안 되는 점을 생각하면 메림은 확실히 우수한 전투 마법사다
‘그리고 전사 쪽은 분명 동생이라고 했던가? 무기를 휘두르는 동작과 몸에 두른 마나의 형태가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아름답게 보일 정도야.’
다루는 주 무기는 전혀 다르지만 마계국에서 수많은 백병전을 경험한 율리드는 상대가 무기를 휘두르는 동작만 봐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전사인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검과 방패를 다루는 모든 동작이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다그가 동 등급의 모험가에게심지어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후한 평가를 내린 건 이번이 처음
선천적인 재능보다는 올바른 검술 지도를 받은 덕분에 갈고 닦여진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까지 파악했다
‘저 여자한테 검술을 가르쳐준 녀석이 도대체 누군지 궁금할 정도군그래… 일단은 지켜보자.’
쌍둥이 자매의 수준을 높이 나름대로 평가하게 됐기에 끝내 마음을 굳히게 된 율리드는 언제든지 난입할 수 있게 무기를 준비해둔 상태로 그녀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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