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두 사람 (11)
* * *
고깔모자를 배낭 속에 대충 구겨 넣은 메림은 스태프를 나무에 걸쳐두고 편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후우우~ 어떻게든 찾긴 했네. 마릴여기서 잠깐만 쉬다가 들어가자. 배도 좀 채우고.”
“알았어. 잠깐만.”
쌍둥이 자매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만약을 대비해 불빛을 꺼트리고수풀에 몸을 숨겼다
배낭을 뒤적거려서 육포와 함께 단망경을 꺼내 든 마릴은 고기 한 덩이를 언니에게 던져준 뒤야시 기능이 있는 단망경을 이용해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굴의 높이는 1.5m 정도 되었는데입구는 물론 그 인근까지 거무죽죽한 피가 튀어 있었고곳곳에 부러진 뼛조각과 초록색 살점들이 씹다 뱉어낸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상황이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면 몸뚱이랑 분리된 고블린의 대갈통이 여럿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시체랑 마찬가지로 하나 같이 밟혀 죽었거나 먹다가 뱉은 모양새야. 고블린의 시체가 유난히 많은 걸 보면 원래는 고블린들이 살던 굴 같아.”
“쩝쩝…. 그리고 지금은 트롤의 집으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인가.”
육포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허기를 달랜 메림은 높이 뻗은 나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가지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율리드의 모습을 겨우 찾아냈다
감독 겸 안전요원으로 따라온 마족은 시험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추적과 사냥 과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타고 다니며 쌍둥이 자매를 조용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메림은 그에게 손짓했다
“조금 있으면 저 안으로 쳐들어갈 생각인데슬슬 마족 선배님도 내려오지 그래?계속 나무 위에 올라타고 있느라 힘들어 보이던데.”
“….”
소리 없이 사뿐히 내려온 율리드는 쌍둥이 자매에게 다가갔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숲으로 들어간 뒤로부터 시간이 제법 지났잖아. 얼마나 남았을지 좀 궁금해서.”
“4시간이 조금 안 남았군.”
“허어꽤 많이 지나갔네. 저 안에 트롤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게 아니라면 난감할지도 모르겠어.”
고블린의 피가 찍힌 거대한 발자국이 동굴을 향하고 있긴 하지만 두 마리가 함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저 안에 트롤 한 마리만 있다면 전투 자체는 수월하나다시 수색을 해야 할 것이고
트롤 두 마리가 함께 있다면 수색을 더 안 해도 되는 대신 전투의 난이도가 훌쩍 올라갈 것이다
쌍둥이 자매에게 최상의 환경은 동굴 안에 트롤 두 마리가 있되서로 다른 방을 쓰고 있어서 각개격파가 가능한 환경이다
…잠시 후충분한 휴식을 취한 쌍둥이 자매는 몸 상태를 간단히 점검했다.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점을 빼면 이렇다 할 애로사항은 없다
배낭을 다시 매기전에 안에서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꺼낸 메림은 율리드가 보는 앞에서 내용물을 공개했다
사각형으로 접혀 있는 종이. 그 안에는 초록색 가루가 들어있다. 동료들이 종종 저걸 사용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던 율리드는 가루의 명칭을 입에 담았다
“나이트 비전 파우더….”
“이거까지는 인정?”
“그 정도는 문제 될 거 없어. 사용해도 괜찮다.”
허가의 말이 떨어지자 종이 안의 가루를 탈탈 털어서 동시에 복용한 쌍둥이 자매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진 시야에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가루를 먹기 전에는 바로 앞에 있는 사물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었는데이제는 밝은 대낮처럼 주변이 환하게 보인다
“와… 나이트 비전의 효과로 보는 게 이런 거였구나.”
“성능 확실하네. 마탑에서 비싼 값을 치른 보람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생명체가 수면을 취하는 새벽시간. 불빛에 의지하지 않고이대로 최대한 은밀하게 둥지를 조사한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단잠에 빠져 있을 트롤을 기습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와 사냥에서 무방비한 적에 대한 선공의 이점은 설명해봐야 입이 아플 정도로 어마어마 하기에 쌍둥이 자매는 이런 소모품까지 사전에 준비했다
여담으로 나이트 비전 파우더의 지속시간은 체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평균적으로 1시간
달라진 시야에 어느 정도 적응한 쌍둥이 자매는 감독관인 율리드를 바라봤다
“보면 알겠지만우리는 이대로 불빛 없이 들어갈 생각이거든. 마족 선배는 어차피 잘 보이잖아. 따로 조치할 필요는 없지?”
“뭐그렇지. 인간하고 달리 나를 포함한 동족의 눈은 어둠 속을 환하게 볼 수 있으니까.”
“그러면 저희는 먼저 출발할게요.”
“알았다. 뒤에서 따라가도록 하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기준에서 너희 둘 모두 중상을 입었다고 판단되거나나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즉시 탈락이다.”
“네.”
“알았어.”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쌍둥이 자매는 본래 고블린의 굴이었던 동굴… 트롤의 둥지 안으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진입했고율리드 또한 충분한 거리를 벌려서 뒤를 따랐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마릴은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칼과 방패를 뽑아 들었고동생과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메림도 언제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머릿속에서 주문을 외우면서 스태프를 치켜들고 있다
둥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짙은 피 냄새와 썩은 향이 섞인 지독한 냄새가 풍겨온다
“요것 봐라?여기에 있는 블린이들도 개 씹창이 나버렸네.”
“…이상한 말 좀 쓰지 마. 아무튼안쪽에도 흔적이 있는 걸 보면 트롤이 자리 잡은 게 확실해.”
머지않아 쌍둥이 자매가 발견한 것은 입구와 마찬가지로 사방에 튄 핏자국과 처참히 뭉개진 초록색의 살점. 고블린들의 삶의 터전이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당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이러한 흔적을 생생히 눈에 담으니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내심 긴장감을 느끼게 됐다
트롤
쌍둥이 자매의 입장에서 녀석을 직접 사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워낙에 유명한 마물이라 녀석의 기본적인 특징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개체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평균 2M 이상의 거대한 체격을 소유하고 있는 암녹색의 거인
어지간한 환경에서는 최상위 포식자의 역할 중 하나를 맡게 되며둥지에서 가까운 마을을 습격한다거나 여행자들을 잡아먹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지능은 어린아이 수준. 하지만 덩치값을 충분히 할 정도로 힘이 세고경상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재생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통상적으로 사냥하기 까다롭다
한 마리를 수월하게 사냥하기 위해서는 동 등급 모험가 셋을 동원하거나 경험 많은 은 등급 모험가를 투입하는 게 권장될 정도의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메림분명 트롤은 사람의 냄새에 대해 민감하다는 정보도 있었지?”
“응. 특히 여자나 어린아이의 냄새에 민감하다고 했어. 피부가 성인 남자보다 훨씬 부드러워서 그런다나 뭐라나….”
트롤의 특징을 떠올리며 여기저기 흩뿌려진 고블린들의 잔해를 바라보던 마릴은 결심을 굳히고는 보자기를 펼친 뒤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손으로 살점과 내장을 그것에 모으기 시작했다
동생의 돌발 행동에 메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야야!더럽게 시리…!갑자기 그건 왜 모으고 그래?”
“로덴 오라버니가 검을 가르쳐줬을 때 덤으로 알려준 게 있었거든. 그걸 해보려고.”
담백하게 대답한 마릴이 고블린의 살덩이를 모은 보자기를 둘둘 말아서 걸레를 짜듯이 진한 핏물을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시도하려는 게 뭔지 짐작이 간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 메림의 얼굴은 점차 창백해졌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건네본다
“저기이… 마릴?그걸로 대체 뭘 하려는….”
“이걸 발라서 우리의 냄새를 지울 거야.”
“……네. 그러시겠죠.”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어김없이 적중하는 법이다
* * *
일을 할 때마다 즐겨 입는 로브가 검붉은 고블린 액기스로 더럽혀진 꼴이 된 메림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 아무리 클린 마법으로 지우면 된다고는 하지만… 맨 정신으로 어떻게 이런 엽기적인 짓거리를 할 수 있냐고….’
고블린 액기스를 옷에 바르는 엽기적인 행위만큼은 천하의 메림이라도 거절하고 싶었다
허나지금은 난이도가 제법 높은 적을 사냥해야 하는 중요한 시험을 보는 중이며이것을 제안한 동생이 제 몸에 고블린 액기스를 먼저 발라내 버린 탓에 자기만 내빼기도 영 힘들었다
이런 몰골까지 됐으니 효과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로덴 오빠도 참… 얘한테 해괴한 지식을 알려주기나 하고… 집에 돌아가면 두고 보자.’
지금쯤 태평하게 자고 있을 로덴을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는 메림과 장비에 묻은 피 냄새를 참아내며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마릴
쌍둥이 자매는 앞으로 나아가던 중멀찍이 떨어진 공동에서 느껴지는 코 고는 소리와 미세한 진동에 숨을 죽이고 자세를 낮췄다
ㅡ푸우… 푸우우…!
"…!메림."
“…응. 나도 들었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두 여자는 그 자리에 배낭을 내려둔 뒤벽에 밀착한 상태에서 앞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 모퉁이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모퉁이 너머로 보이는 건 잠에 빠져있는 두 마리의 트롤. 두꺼비처럼 우둘투둘한 피부를 가진 거인들은 각각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의 벽에 머리를 처박은 채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
이 주변에는 트롤보다 강한 짐승이나 마물이 없었으니 수면을 취할 때 크게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놈들의 발치에는 나무로 대충 만든 커다란 몽둥이가 놓여 있었으며 방의 가운데에 보이는 뼈 무덤에는 알멩이 빠진 옥수수처럼 인정사정없이 뜯어 먹혀 버린 고블린들과 인간의 유해가 뒤섞여 있다
쌍둥이 자매는 서로에게 소곤 거리듯이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둘… 마을을 덮친 건 이놈들이 확실해.”
“오른쪽에 있는 놈은 피부가 좀 새까맣네?”
두 마리가 다른 공간에서 쉬고 있었다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잠에 빠진 사냥감을 발견하긴 했으니 이것만으로 충분히 커다란 행운이다
이제 그녀들에게 남은 문제는 이놈들을 어떻게 공격해서 전투를 시작하느냐다
가장 이상적인 건 메림과 마릴이 각각 한 마리씩 급소를 향한 강력한 공격을 사용해서 전투고 뭐고 필요 없이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두 사람의 공격력이 트롤을 일격에 죽이기에 충분할지의 여부가 너무 불확실하다. 자칫하면 어중간한 데미지만 입힌 상태로 2 : 2의 상황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론은…
“일단 한놈을 확실하게 조지자. 마릴 네 생각은?”
“나도 그게 좋을 거 같아.”
어떻게 동시에 공격할지 신호를 미리 정한 쌍둥이 자매는 숨소리와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가며 왼쪽에 있는 녀석에게 신중하게 다가갔다
고블린 액기스를 온몸에 발라가며 여자의 냄새를 피 냄새로 덮어 씌운 보람이 있었는지쌍둥이 자매가 트롤에게 완전히 접근한 상황에서도 녀석은 코를 골고 있다
벽을 향해 웅크려서 자고 있는 상태였기에 노리는 부위는 심장으로 통일녹색의 거인을 중심으로 양측에 선 두 여자는 소리 없이 무기를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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