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두 사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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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통제하에 마족들이 인간의 땅을 침범했었던 전쟁사가 있는 만큼기본적으로 인간들이 마족에게 갖고 있는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예시를 들자면 마계국에서 등을 돌리고 인간의 땅에 정착하기 위해 피난 중인 마족을 불법으로 포획해서 도시로 끌고 올 때경비병에게 약간의 뇌물만 준다면 쉬이 눈감아 주는 게 일상다반사
허나 마족 또한 지성과 문화를 가진 인족으로 구분되고 있기에 인간의 도시에서도 무고한 마족을 함부로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로 취급받는다
“도시에 있는 마족을 죽이고 있다고요?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나도 몰라어떤 놈들이 어째서 저지른 건지 돈을 내서라도 알고 싶을 지경이야.”
연초를 물고 있는 상태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창가 쪽에 연기를 후ㅡ욱내뱉은 율리드는 이 소문이 『마족 살해범들』이라는 명칭으로 떠돌고 있다는 말과 함께 대략적인 설명을 해줬다
맨 처음엔 크로이브 공국에서부터 차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최근에는 이곳 하론 공국 곳곳에서도 마족 살해 사건이 차례대로 벌어지고 있다
마족 살해범들은 노예가 돼버린 마족이든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마족이든 예외가 없다하나같이 갈기갈기 찢긴 처참한 시체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잔인하면서 신출귀몰한 마족 살해범들을 특정 지을 수 있을만한 흔적은 딱히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목격담이라고는 한밤중에 검은 그림자가 여럿 지나간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토막 난 시체가 돼버린 마족이 발견됐다는 게 전부라고 한다
“푸우우… 내 동족들에게는 전쟁을 벌였던 과거가 있으니 인간들에게 크고 작은 차별을 받고 있는 것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있어마계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피난민은 자칫 노예가 돼버릴 위험조차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절박한 녀석들이니까.”
불씨를 완전히 꺼트린 연초를 마차 밖으로 던져버린 마족이 뿌드득 거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이 그런 식으로 벌레처럼 죽여도 되는 건 아니지망할 놈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림은 머릿속에 스쳐간 단어를 꺼내어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보았다
“마족만 노리고 있다면 범인은 인간 절대 주의자… 일지도 모르겠네그중에서 마족을 특히나 싫어하면서 그런 행동을 저지를 정도로 극단적인 인간들.”
“지금까지의 소문만으로는 상당히 유력한 후보지하지만 단서가 없는 이상그럴 수도 있고아닐 수도 있어.”
“저기그런 소문이 여기까지 퍼질 정도면… 율리드 씨도 많이 위험한 거 아닌가요?”
“걱정해주는 건가빈말이라도 고마운데?하지만난 도리어 마족 살해범들이 날 노려줬으면 좋겠군내 손으로 그 개자식들을 깡그리 죽여버릴 생각이거든.”
얇게 웃으며도 소문의 마족 살해범을 향한 살기를 품어낸 율리드의 눈빛은 절대적인 자신감과 진심이 담겨 있다
자세를 바꿔서 발을 창가에 걸친 채적당히 드러누운 마족은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너무 많이 떠들었군어차피 인간인 너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앞으로 치를 시험이나 생각해나는 도착할 때까지 한숨 붙이겠어.”
율리드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천장에 향한 채 단잠에 빠져들었다쌍둥이 자매도 달리 할 게 없었으니 서로 양 옆의 문짝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며 적당히 눈을 붙였다
내내 덜컹이던 마차가 우뚝 멈추게 되면서 세 사람이 뜨게 됐을 때어둑해지려는 시간대가 되어서야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하게 됐다
“쓰읍.”
“끄으읏…!”
마차에서 내린 쌍둥이 자매는 습관적으로 기지개를 켰고마족은 독한 연초를 입에 물면서 불을 붙였다그리고는 마을을 가볍게 둘러봤다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농촌 마을의 풍경은 실로 평화로워 보였으나주민들의 얼굴에 그늘이 져있으니 분위기는 상당히 음울해 보였다
정보 수집도 해야 하고의뢰를 수행할 모험가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일단은 의뢰주인 촌장에게 가야 한다
멀찍이서 외지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민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율리드는 은색의 인식표를 보여주며 촌장의 거처를 물었다
처음에 주민은 마족인 율리드를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그가 모험가임을 알게 되자 태도를 싹 바꾸면서 위치를 알려줬다
몇 분 뒤촌장의 거처에 도착한 세 사람은 문을 두들겼다백발이 성한 노인이 문을 열면서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목에 걸린 그건… 다들 모험가인가?오오의뢰를 맡긴지 단 하루 만에 달려와줬군!”
“당신이 촌장인 모양이군의뢰서에 적혀있던 것 이외에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좀 들려줬으면 좋겠는데.”
“알겠네안으로 들어오게나.”
쌍둥이 자매와 마족을 집안으로 들인 촌장은 세 사람이 의자에 앉자마자 가슴을 탕탕 치면서 하소연을 하는 듯한 어조로 당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흘 전아무런 전조도예고도 없이 트롤이그것도 한 놈이 아닌 두 놈이 난데없이 나타난 바람에 말 그대로 농촌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논밭의 일부는 처참하게 망가지고트롤들을 막으려고 덤벼들던 개들도 밟혀 죽었다졸지에는 밭에서 도망치고 있던 주민 두 명까지 길쭉한 팔로 낚아채서 도시락 싸가듯 숲으로 유유히 돌아갔다고 한다
‘흠사흘 전의 일이라면 두 녀석 모두 트롤 뱃속으로 들어갔겠군.’
율리드는 마음속으로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트롤들이 언제든지 우리 마을에 다시 쳐들어 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버티질 못하겠소하루빨리 놈들을 잡아주시오제발….”
촌장을 포함한 주민들이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심지어 사람이 괴물에게 잡혀간 장면을 직접 봤으니 공포심은 배가 된다
야생동물이든 마물이든 한 번이라도 사람의 피와 살점의 맛을 보게 되면 십중팔구는 인육 특유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배가 꺼진다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이 마을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걱정 마세요저희가 왔으니까 금방 해결해드릴게요.”
“촌장님트롤이 나타났다는 장소를 좀 확인하고 싶은데안내해줄 수 있을까요?”
쌍둥이 자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촌장은 때마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 아들을 시켜서 사건 현장으로 안내하게 했다
촌장의 아들이 데려다준 장소는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바깥
눈앞에 펼쳐진 논밭의 일부는 짓눌려 있었고말라비튼 핏자국이 남아있는 바닥에 짐승의 털이 묻혀져 있었다그리고 저편에는 드넓은 숲과 산이 보인다
“그 괴물들은 마이크랑 욥을 낚아채고는 저기 보이는 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습니다둘 다 좋은 녀석들이었는데….”
정황상 납치된 사람의 이름인가 보다쌍둥이 자매는 촌장의 아들에게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집으로 돌려보냈고사건 현장에는 두 명의 인간 여성과 한 명의 마족 남성만이 남게 됐다
율리드는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쌍둥이 자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곧 있으면 해가 저물어 버릴 시간이다탐색을 시작하기에 썩 유리한 환경은 아닐 텐데?”
쌍둥이 자매가 지금부터 봐야 하는 승급 시험의 합격 조건은 탐색을 시작한 이후 12시간이 지나기 전에 사냥감인 두 마리의 트롤을 사냥하는 것
그녀들이 원한다면 이 마을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아침 시간 때에 탐색할 수 있다
피로도의 문제와 한밤중의 환경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로 불친절한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보다는 지금 보다는 내일 아침에 시작하는 게 훨씬 좋을 거다
“그 정도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트롤들이 마을 사람을 끌고 간 게 사흘 전이라고 했잖아요인간으로 채운 배가 슬슬 꺼질 시기죠그러니까…”
“녀석들이 다시 농촌 마을에서 개수작 부리려고 하기 전에지금 당장. 빠르게 찾아낼 거야그리고 후딱후딱 승급해서 집으로 돌아갈 거고.”
“…니들 마음대로 해지금부터 12시간제한 시간 내에 트롤 두 마리의 흔적을 쫒아서 찾아내고사냥해라.”
“네!”
“오케이!”
율리드는 본격적으로 흔적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성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두 얼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두 마리가 동시에 난동을 피워서 그런지 흔적은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어추적 자체는 생각보다 쉽겠는데?이쪽이야 메림. 불 좀 켜줘.”
“알았어…라이트”
논밭에 찍힌 트롤의 발자국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쌍둥이 자매는 놈들이 숲 속의 어디를 향했을지 방향을 설정하고는 메림이 만들어 낸 빛에 의지하며 한밤중의 숲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소리 없이 따라오는 마족 모험가를 동원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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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자매의 승급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을 무렵로덴과 록시아는 웅웅 거리는 자동 배합기를 바라보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좋아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 수고했어록시아.”
“주인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찌뿌둥한 허리를 가볍게 풀더니 자신과 마족 소녀의 작업복을 벽걸이에 걸쳐둔 로덴은 시선을 내리면서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
“요즘따라 약초를 다루는 솜씨랑 눈썰미가 많이 늘어났더구나이제 재료만 충분히 있다면 록시아 혼자서도 간단한 수준의 포션과 약품 정도는 문제없이 만들 수 있겠는걸?”
“아하하이게 뭐라고 해야 할지… 서로 다른 성질을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게 어떻게 보면 마법 하고 비슷하기도 해서 그런지 메림 언니한테 마법을 배우게 된 이후부터 이해가 훨씬 쉬워지더라고요.”
“그거 기특하네.”
로덴은 배시시 미소 짓고 있는 록시아의 머리와 뿔을 한동안 만지작 거리다가 그녀와 함께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
킁킁팔을 코에 올려서 체취를 가볍게 확인해보면 조금 전까지 으깨던 약초 특유의 쓴 냄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작업복을 입어도 약초 냄새가 배는걸 완전히 피할 수 없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그리고 냄새가 나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라 옆의 소녀도 마찬가지일 터
“록시아먼저 천천히 씻고 나오렴방에서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다 씻으면 깨워주고.”
평소처럼 할 말을 다하며 등을 돌린 로덴은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가려 했으나무언가가 잡아당기는 감각이 느껴졌다
“…?”
시선을 돌리면 마족 소녀가 자신의 옷깃을 당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그녀는 한동안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주인님얼마 전부터 쭉 생각해 봤는데굳이 따로 씻을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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