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88화 (88/149)

〈 88화 〉 두 사람(2)

* * *

어느 도시를 가도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모험가 전선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모험가가 승급하기 위해서는 길드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거나 수배 중인 마물, 범죄자를 잡아내서 소속된 길드에서 공헌도를 쌓을 필요가 있고, 반대로 의뢰를 실패하거나 파티 등록을 한 동료의 사망 및 실종, 크고 작은 범죄 행위를 저지를 시. 공헌도가 깎이고 역으로 강등당할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모험가들의 역량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지표가 되는 증거품이 목에 걸려 있는 인식표다.

대충 깎아 만든 자그마한 돌판을 새하얗게 칠한 인식표는 모험가로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출내기인 백자 등급.

장비를 만드는데 쓰다가 남은 쇳덩어리 따위를 얕게 펴고, 길드의 인장을 찍어내서 만들어내는 회색빛의 인식표는 모험가 생활에 차츰 익숙해지기 시작한 강철 등급.

순도 높은 구리가 함유된 광석을 사용하여 업자의 손길로 모양을 내고, 세밀하게 깎아 만드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위조의 가능성을 상당 부분 배제한 구릿빛의 인식표가 동 등급.

모험가 길드의 신용과 실적이 상당히 많이 쌓인 동 등급부터는 진정한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권익을 보장한다.

길드의 창고에 귀중품, 장비,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게 해 준다던가, 동 등급에 적절한 난이도와 보수의 의뢰를 길드 측에서 알선해준다.

동 등급까지는 공헌도를 성공적으로 쌓기만 한다면 어느 모험가든지 오를 수 있지만, 은 등급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아무래도 은 등급부터는 모험가 길드의 주력과 동시에 자존심 같은 개념이라고 해야 하려나? 단순히 모험가 짬밥만 많이 먹었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뭐, 모험가가 험한 일로 벌어먹고 살아가는 직종이라 오랜 시간 요령 좋게 버티고 있다는 것도 나름 대단한 거긴 하지만….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식탁 위에 턱을 괴면서 말하고 있던 로덴은 록시아와 나란히 앉은 채 모험가의 등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호기심을 채워내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는 주인이 한참 옛날에 다른 도시의 길드에서 발급받은, 은으로 만들어진 모험가 인식표를 바라봤다.

"아하… 그래서 다른 도시에 가면서까지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거군요. 그런데, 삼촌은 그 인식표를 받았을 당시에 어떤 시험을 보셨나요?"

"그러게. 우리도 오빠가 어떻게 시험 봤었을지 내심 궁금했는데."

로덴이 말을 꺼내기 직전, 식기들을 모두 정리하고 물기를 훌훌 털어낸 쌍둥이 자매가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네 사람이 집에서 함께 식사 시간을 가질 때마다 로덴과 록시아가 요리를 담당한다면, 식사가 끝난 이후에 뒷정리를 하는 게 쌍둥이 자매가 도맡은 역할이다.

아무튼, 잠시 몇 년 전의 기억을 더듬은 로덴은 식탁 위에 내려둔 자신의 인식표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다른 은 등급 이상의 모험가를 입회인으로 둔 상태에서 길드의 접수원이나 간부와의 면담을 통해 인격을 심사받아."

다른 모험가를 세워두는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만에 하나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심사과정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받으면 앞뒤 생각 안 하고 냅다 덤벼드는 머저리들도 세상에는 종종 있는 법이니 말이다.

"면담에서 통과하면 바로 승급 시험을 치를 수 있어. 참고로 이때 시험비도 뜯어내는데, 요즘에는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로덴 오라버니는 시험비로 얼마나 지불하셨어요?"

"그때 분명… 은화 세 닢이었어."

손가락 세 개를 쫙 피고 있는 로덴을 바라보던 메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우씨, 시험비 한번 더럽게 비싸네. 저번에 캡틴은 시험비로 은화 두 닢을 냈다고 했는데."

"요즘에 시험비가 내려갔나? 아니면 길드마다 조금 다를 수도 있겠네. 그러고 보니 핀. 그 양반은 그때 아쉽게 떨어져 버렸다고 했었지?"

"응. 캡틴이 치렀던 시험의 내용은… 다른 시험자랑 함께 반나절만에 야생 드레이크 다섯 마리를 잡는 거였는데, 한 마리가 모자라서 그만…."

"다시 들어도 아깝네."

"네, 대장님도 많이 아까워하시더라고요."

참고로 승급 시험에서 떨어지면, 승급에 필요한 공헌도를 줄곧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반년이 지나야 만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그러면 삼촌도 드레이크를 잡는 시험이었나요?"

"아니. 나의 경우에는 시험을 치른 도시 주변에 밀림지대가 있던 탓에… 나를 포함한 세 명이서 드라이어드 열두 마리를 잡아내는 내용이었단다."

당연히 승급 시험은 한 번에 깔끔하게 통과했고, 그 당시 로덴 혼자서 여덟 마리의 드라이어드를 사냥했다.

그야말로 멱살 캐리다.

로덴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승급 시험을 통과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들은 쌍둥이 자매는 등받이에 몸을 맡긴 채 늘어지는 자세로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은 직접 부딪혀 봐야 알 수 있을 거 같네요."

"우리가 보게 될 시험에서 사냥할 마물은… 캡틴이랑 오빠가 잡은 녀석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겠지."

"아마 난이도는 대강 비슷할 테니까 준비는 확실히 해둬."

"응."

쌍둥이 자매가 시험을 치러야 할 장소는 하론 공국의 수도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한, 중간 규모 도시 나자리.

공국의 서부 지대에서 수도로 가는 길에 있어서 상권이 활발한 것은 물론, 주변 일대에 다양한 마물들이 살아가는 모종의 생태계가 펼쳐져 있는 구역들도 존재하는 덕분에 모험가의 일거리가 넘쳐나는 도시다.

말 같은 것을 타고 이동한다는 가정하에 순수한 왕복에 닷새 정도가 소모되는 거리다.

어느 틈엔가 인벤토리에서 꺼내들은 지도를 바라보던 로덴은 그것을 쌍둥이 자매에게 넘겨주면서 걱정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희 둘끼리만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조금 전에 쌍둥이 자매가 승급 시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줬을 때, 그녀들은 자기들끼리만 나자리에 갔다 오겠다고 로덴과 록시아에게 못을 박아뒀었다.

"너무 걱정 마. 로덴 오빠. 넷이서 함께 지내기 전에는 우리끼리도 이 도시, 저 도시 잘만 다녔었어. 이런 시험은 자기 힘으로 해내야지."

"더군다나 연속으로 휴업을 하기는 모양이 좀 그렇잖아요? 로덴 오라버니."

"그건 그렇긴 하지만."

얼마 전에 늪지대 원정을 가기 위해 며칠간 포션 가게문을 닫았던 로덴의 입장에서 쌍둥이 자매에게 달리 반박할 말이 없다.

그녀들은 내일 하루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여유롭게 준비한 뒤, 모래의 아침이 밝는대로 나자리를 향해 출발한다고 한다.

바르멜라에서 나자리로 왕복하는 시간과 시험을 치르는 시간, 중간 휴식에 소모되는 시간 등을 생각하면 집으로 다시 돌아오려면 못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듯.

"…쯧! 하는 수 없지."

고민하다가 짧게 혀를 찬 로덴은 쌍둥이 자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여행 중에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법이니까. 메림, 다른 건 몰라도 너한테 맡겨둔 그 스크롤은 잊지 말고 챙겨둬. 만에 하나를 위해서야."

그런 와중에도 로덴을 불러낼 수 있는 소환 스크롤을 챙기게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네, 네~ 잘 알고 있습니다요. 요즘엔 거의 부적처럼 짐가방에 항상 보관하고 있는 걸."

"후후, 가만 보면 오라버니는 저희를 너무 과보호하려는 거 같네요."

로덴과 록시아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로 눈을 마주친 쌍둥이 자매는 동시에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기들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싫은 기분일 리 없다.

이후로도 네 사람은 승급 시험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누다가 밤이 맞이했다.

* * *

다음날.

점심의 쉬는 시간에 맞춰서 록시아에게 가게를 맡기고, 쌍둥이 자매와 함께 잠시 외출한 로덴은 도시의 성벽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마구간을 찾아갔다.

목적은 당연히 말을 얻기 위해서. 구입이 아닌, 대여다.

쌍둥이 자매 둘이서 짧은 여행을 하는 것이라면 마차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말을 빌리는 게 훨씬 편하고, 빠르다.

"너희 둘… 말을 탈 수 있기는 한 거냐?"

이동수단으로 말을 빌리는 것을 택한 쌍둥이 자매를 향해 로덴이 그런 질문을 건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승마라는 게 보기보다 쉬운 게 절대 아니다. 누구든지 말을 한 번만 타보면 승마의 난이도를 몸으로 절실히 깨달을 수 있을 거다.

자신의 발로 서는 게 아닌 생물 위에 올라탄다는 감각을 견뎌내야 하며, 말의 움직임에 따라 기수도 하반신에 적지 않은 힘을 줘서 상당히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아, 말은 예전에 몇 번 타봤으니까. 딱히 문제없어."

"그러는 로덴 오라버니는 어떤가요?"

"나야 뭐, 어지간히는 타는 편이지."

지구에서는 제주도에 여행을 갔던 순간에만 말을 구경했던 로덴이었지만 이쪽으로 넘어오고 나서는 일상적으로 보게 됐으며 심지어 말을 타보게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무섭기도 하고, 낙마도 많이 해버렸지만 뭐든지 많이 해보면 익숙해지는 법. 보통 사람보다는 말을 훨씬 잘 타게 됐다.

말의 등위에 마지막으로 올라탄 이후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무리 없는 승마가 가능할 것이다.

어느덧 세 사람은 목재 건물로 건축되어 있는 마구간에 도착했다. 안에서 스멀스멀 풍겨지는 마구간 특유의 구리구리한 냄새가 로덴과 쌍둥이 자매의 후각을 자극했다.

"…으음?"

널찍한 쇠줄로 말의 편자를 갈아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작업을 멈추고는 밝은 얼굴로 일행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손님! 말을 빌리러 오신 겁니까?"

말을 구매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구매보다는 대여를 한다. 그렇기에 직원도 찾아오는 손님에게 일단 말을 빌리러 왔는지 물어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대표로 고개를 끄덕거린 메림이 나무판자 너머로 보이는 말들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내일부터 시작해서 대략 일주일 정도 빌려갈 말 두 마리가 좀 필요해서 찾아왔는데요."

"하하, 실한 녀석으로 소개해 드리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영업용 미소를 띤 직원이 곧장 축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메림이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아저씨. 저희가 직접 고를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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