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두 사람
* * *
방안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현재 로덴의 심정을 까놓고 밝히자면 이제 와서 딱히 곤란하지는 않았다.
그가 숨겨야만 하는 과거의 핵심은 용사라고 불렸다는 것.
용사로서의 자신은 마왕과 함께 죽었다며 세상을 속이고 새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자그마치 15년이나 지나가 버렸다. 요즘 시대에서 용사는 동화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존재다.
그동안 크게 켕길만한 일도 저지르지 않고 나름대로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용사 이후의 신분인 전직 은 등급 모험가라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숨길만 한 게 아니다.
하긴… 요즘에 얘네들이랑 대놓고 활동하면서 꼬리가 너무 길어지긴 했어. 조금만 신경 쓰고 조사한다면 못 알아보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지.
짧은 침묵을 지키던 로덴은 두툼하게 썰어낸 고기를 입가로 옮겨서 우물거리고 있는 영주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 그런 와중에도 눈빛은 확신으로 차있는 것이 시험 삼아서 자신을 떠보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와 맞은편에 앉아있던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는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을 한 채, 로덴과 영주. 두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절그럭절그럭.
어설프게 변명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겠다고 판단한 로덴은 천천히 투구를 벗어내서 발치에 내려놓았다.
"영주님, 다시금 인사드리겠습니다. 바르멜라의 외곽구에서 포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연금술사 겸, 전직 모험가인 로덴입니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젊었던 내 모습이 생각날 정도로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늠름한 얼굴이야. 뭐, 그 시절의 나랑 비교한다면 살짝 부족하겠지만."
"하하, 그렇습니까?"
가벼운 농담을 들은 로덴은 설익은 미소를 지어냈고, 습관적인 손길로 멋들어진 콧수염을 어루만지던 영주는 몇 달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자네의 가게에 방문한 게 벌써 넉 달이나 지난 일이던가? 나이를 먹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간단 말이지."
"뒤를 돌아보면 어느 틈에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지 신기할 때가 종종 있긴 하죠."
"지금까지 이뤄놓은 게 많이 있으니 지나간 시간이 아쉽지는 않지만, 그리워질 때가 있기는 해."
이후로 영주는 로덴의 정체가 모험가든 연금술사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행과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식사를 끝마쳤다.
영주가 자그마한 종을 가볍게 흔들거리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비어 있던 접시들이 말끔히 치워지고 식탁에 남겨진 다과와 잘 어울리는 홍차가 각자의 자리에 놓였다.
"식사 후에 즐기는 한잔의 여유는 언제나 최고란 말이야."
홍차의 그윽한 향을 충분히 즐기고 나서 천천히 입가에 머금은 영주의 시선은 다시 로덴을 향했다.
"나는 일단 궁금한 게 생기면 그게 풀리는 순간까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자네의 정체를 살펴본 건 길드에서 보고를 들은 이후에 개인적인 흥미가 동해서 알아본 거지, 특별한 의도는 없어. 어느 인생이든 크고 작은 사연이 있는 법이니 과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으마."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제 과거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셨나 봅니다?"
"아니, 몹시 궁금하긴 해. 다만 나는 우수한 연금술사가 숙련된 기사보다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는 압박을 줘서 자네 같은 귀한 인재가 영지에서 떠나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지."
잠시 말을 멈춘 영주는 혀를 쉬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혹여나 자네가 들려줄 생각이 있다면 나야 좋지만…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라서 사람과 대화를 조금 나눠보면 어떤 성향인지 파악할 수 있어. 적어도 자네는 옛날 일을 떠벌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부류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평온한 일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 하는 낌새인데."
모험가 활동을 통해 모아둔 자산으로 나만의 가게를 꾸려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것. 대다수의 모험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은퇴 계획 중 하나다.
최대한 평온한 일상을 위해 모험가였던 과거를 숨기고 있는 로덴의 행적이 그다지 희한하게 여길만한 모습도 아니라는 소리다.
"예. 지금의 저는 일반인보다 칼을 조금 더 잘 다룰 재주가 있을 뿐인 연금술사… 정도로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굉장히 겸손한 자기소개로군. 일단 지금은 그렇게 여기도록 하지."
흠… 나를 상대하는데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걸 보면 귀족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모양새인데. 이전에는 뭘 하던 친구인지 은근히 신경 쓰이는군.
영주는 로덴을 향한 막연한 호기심을 품으면서도 찻잔을 모두 비워내고, 자리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자연스레 뒷짐을 졌다.
"내가 초대한 손님들이 오는 만큼, 평소보다 신경 좀 써달라고 언질을 해뒀었지. 모두들. 식사와 다과는 만족스러웠나?"
평소에 먹는 것과는 색다른 느낌의 고급진 요리와 간식을 맛보게 된 일행은 누가 무어라 할 것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게 과분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
일행의 대표인 로덴이 먼저 말하고 나서 나머지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멋진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잘 먹었습니다. 영주님. 음식들이 하나같이 너무 맛있었어요."
쌍둥이 자매가 동시에 입을 열었고, 마지막으로 록시아가 영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허허, 주방장도 기뻐하겠구먼. 나 또한 이번에 모험가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듣게 된 원정담은 상당히 흥미로웠어. 로덴, 자네하고 나눈 대화도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고 말이야. 모기 사태를 해결하고, 역사적인 물건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다시금 고맙다는 뜻을 전해 두지. 이만 돌아가 봐도 좋다."
"네, 영주님. 다시금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다시금 순서대로 영주에게 예를 표한 로덴 일행은 사용인들에게 맡겨두었던 장비들을 다시 돌려받고는 영주관에서 천천히 떠나갔다.
"후우…."
손님들이 나가는 사이, 2층에 위치한 집무실에 올라간 영주는 로덴 일행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정확히는 로덴을 바라보며 책상 위에 놓아둔 보고서를 다시 읽어봤다.
보고서의 내용은 그들이 마라이트 남작령에 위치한 항구도시에 향해 휴가 여행을 떠났다는 기간 동안 나날이 규모를 크게 키우고 있던 마약 조직의 본부가 하루 만에 시체 밭으로 변해버린 일에 대한 대략적인 기록과, 슬럼가의 노숙자들의 증언이 적혀있다.
우선 기록 먼저.
「조직원들의 시체는 하나 같이 날카로운 검상에 의해 장비와 뼈째로 깔끔하게 양단되어 있었고, 조직에서 고용한 이국의 용병은 행방불명. 마지막으로 두목인 페트로그는 철저하게 해체당함.」
팔락.
그다음은 증언 쪽.
「가면을 쓴 체격 좋은 남자가 혼자서 페트로그파의 아지트로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는 안에 있던 창녀 여럿을 이끌고 빠져나왔음.」
세간에는 경쟁 조직 중 하나가 수준 높은 용병을 고용해서 페트로그파를 완전히 괴멸시켰다는 쪽으로 굳어져 있지만 영주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돈하고 여자에 죽고 못 사는 돼지새끼로 알려진 이 망할 놈의 소문은 언젠가 한번 들어봤었지. 빌어먹을 약쟁이 자식….
만약에 녀석이 휴가를 즐기고 있던 네 사람을, 정확히는 로덴과 함께 다니던 아가씨의 모습을 봤다면? 십중팔구 손에 넣으려 했을 거야.
그걸 계기로 놈의 조직이 여자들을 납치했고, 그 결과 로덴이 본부에 쳐들어가서 철저하게 보복하며 자기 여자를 포함한 다른 창녀도 덤으로 구출했다. …라는 이야기가 되려나?
설령 추측이 다소 틀리더라도 마약 조직이 괴멸한 시기에 로덴 일행이 항구도시에 머물렀다는 게 단순한 우연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리고 내 영지에 어비스가 나타났을 때… 낡은 투구로 얼굴을 가린 검사가 단독으로 어비스에 뛰어들어 짧은 시간만에 격파한 일.
쌍둥이 자매도 그 당시 실종 및 사망 처리된 모험가 목록에 포함돼있었지. 그 사건의 주인공도 저 친구겠구만.
모든 것은 증거 하나 없는 정황에 의한 순수한 추측일 뿐이지만… 영주는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이고, 자신의 감을 강하게 믿는다.
아무튼, 추측이 맞는다면 로덴은 단순한 은 등급 모험가 수준이 아니다. 단신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종이 썰듯이 베고, 어비스를 단 한 시간 만에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의 막강한 무력을 가진 존재라는 소리가 된다.
영토에 포함되어 있는 국경지대에서 옆나라인 알트마 왕국의 병사들과 나날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변경백의 입장으로 생각하자면 상당히 탐난다.
높다란 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이점 덕분에 국지전이 발발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강한 무력을 소유한 인재는 늘 귀중한 법.
"내 뒤를 이을 아들 녀석 때문에라도 저 친구 하고는 앞으로 두고두고 친해져야겠어."
로덴 일행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린 영주는 창가에서 등을 돌리고 오후의 업무들을 하나 둘 요령 좋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승급 시험을 보게 됐어?"
영주와의 식사자리를 가지게 된 이후, 이틀이 훌쩍 지나가 버린 날의 저녁시간. 유난히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집에 돌아온 쌍둥이 자매가 희소식을 전해왔다.
"응, 응. 이것 보라고. 오빠."
"길드에서 받아온 승급 증명서예요."
쌍둥이 자매가 각자의 손에 쥐어들고 있는 승급 증명서에는 그녀들의 이름과 이 모험가가 승급 시험을 받을 자격과 경험이 충분히 있음을 보증한다는 내용의 글자가 적혀있다.
"승급이라니…! 축하드려요. 메림 언니, 마릴 언니."
"허어, 벌써 은 등급 승급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만큼 공헌도가 쌓였나 보네. 말이 나와서 물어보는데, 너희 동 등급으로 오른 지 얼마나 된 거야?"
"으음~ 일 년이 조금 넘었던가?"
"일 년 하고 한 달 정도 됐었지."
대부분의 (재능 없는) 모험가가 평생 동 등급에서 더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그녀들의 승급은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일전에 대량의 핵과 모기 여왕의 머리를 제출한 것과 오벨리스크가 있는 장소를 보고 한 것. 이 두 가지 덕분에 상당히 많은 가산점을 받았다고 한다.
"솔직히 그때 우리는 거의 보조만 했던 거라 조금 찔리긴 하지만 이왕 얻은 기회를 놓치기도 싫어서. 이번에 한번 치러보려고."
"그런데 증명서를 가져왔다는 건…."
"네, 아무래도 저희 길드는 은 등급 시험을 치를 여건이 안돼서. 다른 도시에 위치한 길드를 통해 시험을 봐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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