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86화 (86/149)

〈 86화 〉 유희 (6)

* * *

바르멜라 도심지 중앙 언저리에 자리한 영주관으로 향하고 있던 로덴 일행.

전사인 로덴과 마릴은 경갑옷을, 마법사인 록시아와 마릴은 짧은 로브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로덴은 투구도 뒤집어썼다.

"삼촌, 영주님을 직접 뵙게 되는 건데 이런 차림으로 들어가도 정말 괜찮을까요? 귀족분을 상대할 때 필요한 예절에 대해 그다지 아는 편은 아니지만 자칫 큰 실례가 아닐지 걱정되는데…."

약속 장소에 차츰 가까워질수록 내심 불안해하던 록시아가 그런 의문을 품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주와 이야기를 나눌 목적으로 영주관으로 향해는 길인 만큼, 장비를 착용할 필요성은 조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장소에 무구를 착용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언짢게 보일 수 있겠지.

슥슥.

록시아의 정수리에 손을 얹은 로덴의 투구 틈 사이로 평소보다 조금 더 굵직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괜찮아. 애초에 영주는 모험가의 신분인 우리 네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니까, 어설픈 옷으로 차려입느니 차라리 이렇게 장비를 챙기는 게 더 낫거든."

그의 경험상, 격식이니 뭐지 깐깐하게 따지는 부류의 귀족이었다면 모험가 나부랭이를 영주관에 초대하지도, 하물며 직접 만나지도 않았을 터.

"로덴 오빠의 말에는 우리도 동감이야. 귀족들은 대체로 모험가들에게 예법이나 복장에 관한 건 별로 기대 안 해."

"물론 장비가 지나치게 지저분하다면 결례가 되겠지만… 지금 정도면 별 문제없어. 그리고 영주님을 대면할 때의 인사법은… 어제 우리가 간단히 가르쳐 준대로만 따라 하면 되니까 록시아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먹으렴."

전날에 미리 닦아두거나 빨아놓은 로덴 일행의 갑옷과 로브는 눈에 거슬리는 먼지나 얼룩 하나 없이 새것처럼 말끔하다.

"네, 언니."

이후로 대화보다는 걷는 것에 집중한 네 사람은 상가로 나아가는 길목을 천천히 지나갔다.

만에 하나 늦지 않기 위해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서 출발했으니 걸음을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뛰놀고 있는 모습, 목청을 높이는 상인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물건을 파는 모습, 각자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는 모험가 일행이 지나가는 모습, 규중부녀들이 집 앞에 빨래를 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니 거리는 오늘도 활기가 넘치고 있다.

근방에 포션 가게를 세워두고 있는 로덴의 입장에서 이런 활기찬 풍경을 감상할 때마다 하론 공국의 서부에 위치한, 이곳 바르멜라 변경백령에 자리를 참 잘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바르멜라의 영주는 평판이 상당히 좋은 편이지."

거리를 구경하고 있던 로덴이 나직이 중얼거리듯이 꺼낸 말에 쌍둥이 자매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주변 영지와 비교하면 세금도 딱 필요한 만큼만 거두시는 편이고, 상비군으로 치안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계시잖아요."

"영주들 중에서 드물게도, 필요에 따라 모험가 길드에 재정 지원을 팍팍해줘서 마물에 의한 피해를 사전에 막아주고 있으니 영지민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지."

인간의 영토에 거주한 건 이 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록시아는 적절한 비교 대상을 찾지 못해서 세 사람이 영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가만히 주워듣기만 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칭찬밖에 없었다.

…잠시 후, 로덴 일행은 중간 규모의 정원이 꾸려져 있는 영주관에 도착하게 됐다.

그곳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창을 비스듬하게 벽면에 걸쳐서 나름대로 편히 쉬고 있던 2인 1조 경비병이 로덴 일행을 잠시 멈춰 세웠다.

"바르멜라 영주님의 부름에 따라 찾아온 모험가 일행이오."

"도착한 시간도 그렇고, 전사 둘에 마법사 둘이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댁들이 그 모험가 일행이군. 금방 끝낼 테니 인식표만 꺼내보쇼."

"알겠소."

문지기들도 오늘 이맘때쯤에 손님이 온다는 소식과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전해 들었기에 통과 과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록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인식표를 꺼내서 이름을 확인할 뿐이다.

입구와 영주관을 이어주는 정원은 일직선으로 곧게 펼쳐져 있었으니 따로 길을 물어볼 필요성은 전혀 없었다.

풀벌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감상하며 정원의 절반 이상을 천천히 지나쳤을 때. 멋들어진 집사복이 어울리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신사가 반대편에서부터 로덴 일행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들 와줬구먼. 자네들이 입구를 통과하는 모습을 가주님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네. 내 뒤를 따라오게나."

로덴이 한 달에 한번 세금을 내기 위해 영주관 앞에 있는 시청을 드나들 때, 이따금씩 스쳐 지나간 듯이 본 기억이 있던 인상의 노신사는 백작가의 집사장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끝마친 집사장은 그대로 등을 돌려서 앞장서서 영주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영주관을 겸하고 있는 저택 내부는 역대 가주들로 추정되는 남자들의 초상화가 복도에 주르륵 장식되어 있다.

이외에도 조각상이나 제법 비싸 보이는 꽃이 장식된 화분들이 중간중간 시선을 사로잡았다.

"와아…."

귀족의 거처에 생애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된 록시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려버렸다.

과거가 화려한 편인 로덴은 그냥 백작가 저택 치고는 사치를 별로 부리지 않았네ㅡ, 하는 생각이 스쳐갈 뿐.

마지막으로 쌍둥이 자매는 의외로 반응이 무덤덤하다.

아무튼, 집사장은 커다란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가주님은 이 문 너머에 계신다네. 여기에 들어가기 앞서, 자네들의 무기를 잠시 맡아두겠네."

당연한 조치였다. 로덴 일행은 다가오는 사용인들에게 검과 지팡이를 순순히 건네주었다.

끼이익, 천천히 문을 열은 집사장이 목소리를 냈다.

"가주님. 모험가 일행을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네."

차분하고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주에게 고개를 숙인 집사장이 그대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으며 떠났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길쭉한 식탁의 저편, 어떤 중년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금발을 뒤로 넘긴 올백머리와 각이 날카롭게 잡혀있는 정장 차림새는 그의 정갈한 성격을 드러냈다.

멋들어지게 길들여진, W 모양의 콧수염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늙은 사자가 떠오르는 인상의 중년인이다.

여담으로 사병이나 사용인들은 미리 물려둔 상태인지 방안에는 영주와 로덴 일행을 포함한 다섯 명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멋대로인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다. 영지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준 모험가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거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각하의 자비 덕분에 바르멜라 변경백령의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개 모험가 중 한 명인 타이터스라고 합니다."

모험가일 때의 이름을 꺼낸, 대표로 인사말을 꺼낸 로덴은 영주를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고, 직각으로 세워둔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치며 고개를 살며시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평민이나 모험가처럼 귀족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예를 표할 때 행하는 보편적인 예법이다.

고개를 숙이던 와중에 투구 속에서 눈을 데구루루 굴린 로덴은 일행들의 모습을 슬며시 바라봤다.

살짝 긴장해버린 록시아는 쭈뼛거리면서도 동작을 제대로 따라 했고, 소녀와 비교한다면 쌍둥이 자매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고 있었다.

전날에 그녀들이 록시아에게 가르쳐 줬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로 숙여야 하는지,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등, 상당히 세세하게 알려줬었다.

…마치 어디서 많이 봤던 것처럼.

"모험가인 자네들이 너무 딱딱하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으니 편히들 앉도록 해라. 그리고 지금은 영주로서 자네들을 부른 것이니 그냥 영주라고 칭하도록."

"알겠습니다. 영주님."

"아참, 조금 전에 주방장에게 이야기를 전해둔 상태니 곧 있으면 식사가 준비될 게야. 자네들은 천천히 점심이라도 들면서 그 충인(?人)을 사냥하게 된 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들려줬으면 좋겠군."

길드에 보고했던 내용은 영주도 빠짐없이 전해 들은 상황이지만 그는 로덴 일행의 입으로 당시의 상황을 직접 듣고 싶은 모양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길쭉한 식탁에는 산해진미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리는 요리와 다과들이 푸짐하게 깔리게 됐다.

"과분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영주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 로덴 일행은 그의 요구대로 리자드맨의 부락에 찾아갔던 일부터 시작하여 늪지대에서 겪었던 일들을 박진감 넘치게 설명해줬다.

참고로 투구를 쓰고 있던 로덴의 경우, 입 가리게 부분만 분리해서 문제없이 식사를 즐겼다.

"……그렇게 해서 현지인인 검은 비늘 부족의 도움 덕분에 모기 여왕을 찾아내고, 제거할 수 있던 겁니다."

"흠, 흠. 확실히 자네들의 보고가 올라온 뒤부터 모기들의 수가 확 줄어들게 됐고, 해당 위치에 파견한 인원들도 둥지의 흔적과 오벨리스크를 찾아냈다고 했지. 여러모로 애써주었다.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로덴의 대답에 흡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영주는 그의 목에 걸려있는 은색의 인식표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타이터스. 사실은 이쪽이 본론이다. 모험가 생활 대신, 우리 가문을 위해서 검을 휘둘러 볼 생각은 없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은 등급 이상의 모험가는 신체의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기사와 버금가는 실력자로 평가받으며, 금 등급의 영역에서부터는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단장과 맞먹는 실력자로 평가받는다.

다만, 금 등급의 모험가의 경우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거치며 사경을 넘나든 끝에 오러를 다룰 수 있을 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 이들이 극히 적을뿐더러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된 순간, 대부분은 모험가를 그만두게 된다.

그만한 실력을 손에 넣었다면 어째서 모험가 따위나 계속하고 자빠져 있겠는가?

충분한 힘만 있다면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받는 것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지천에 널려있는데.

예시를 몇 가지 들자면….

터가 좋은 도심지에 검사 길드를 차린다거나, 독자적인 용병단을 결성해서 용병 대장 노릇을 하거나… 바로 지금처럼 은 등급 시절부터 귀족의 제안을 받아서 가신 기사가 돼버리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로덴은 정중한 거절의 뜻을 밝히기로 했다.

"…제안은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응하지 못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영주님."

"그런가? 거 아쉽게 됐군."

영주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달랐다. 그의 표정은 상대가 거절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상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그것이다. 영주는 두툼한 고기를 썰어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기야, 로덴 자네는 포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느라 항시 바쁠 테니, 가문의 기사 노릇을 할 여유는 없겠지. 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괘념치 말거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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