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79화 (79/149)

〈 79화 〉 발각 (6)

* * *

이번 모기 사태 때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영주가 놈들의 둥지랑 원흉에 대한 현상금을 지원하고 있던 만큼, 길드 측에서 영주에게 곧장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 결과, 영주님께서 모기 여왕을 처리했다는 모험가 파티에게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나 뭐라나~"

"영주의 풀네임은 분명히… '로버드 바르멜라'였던가."

"잘 알고 있네."

"여기서 지낸 지 꽤 됐으니까 기본 상식선에서 지방 영주의 이름 정도는 외워둬야지. 더군다나 실제로 만나본적 있던 사람이거든."

이 영지에 완전히 정착한 로덴이 포션 가게를 운영하며 지내고 있는 동안, 영주가 이곳에 몸소 방문한 일이 딱 한번 있긴 했다.

로덴이 기억 속의 바르멜라 영주의 이미지는 좋은 의미로 귀족스러운 인상을 하고 있는 중년인.

딱히 무슨 대단한 볼일이 있어서 직접 왔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과 변덕으로 포션 가게를 가볍게 둘러본 정도다. 당연히 가게에 있던 로덴과 록시아는 상대방이 귀족이며, 변경백인 영주를 정중하게 대접했다.

"아무래도 마냥 거절하기는 많이 어려울 거 같아서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었는데… 로덴 오라버니는 괜찮으신가요?"

불가항력이라고는 하지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진행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미안했는지 마릴은 조심스럽게 로덴을 바라봤다.

"이야기 좀 나누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나는 괜찮아. 영주가 보자고 하는 걸 별다른 이유 없이 거절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 잘 대답했어. 그래서? 언제 어디서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

"일주일 뒤, 정오에 맞춰서 영주관으로 와달라고 전하던데요."

"때마침 쉬는 날 하고 겹치는군."

뭐, 증언을 겸한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적당히 입을 털어주면 되겠지. 그렇게 깐깐해 보이는 양반도 아니었고.

고개를 끄덕인 로덴은 영주의 호출에 관한 이야기는 머릿속의 한편에 기억해두기로 하며 마무리 지었다. 아주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고, 과거에는 왕하고도 대면해본 경험이 있던 그에게 있어 귀족이랑 만나게 된다는 소식은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다.

이후로 스리슬쩍 화제를 바꾸게 된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는 오늘은 어딜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놀았고, 무슨 물건들을 집어왔는지 로덴에게 자랑하듯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세 명의 여자가 쉴 새 없이 번갈아가며 떠들고 있으니 그녀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물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 * *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면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가 펼쳐져 있었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희미하게 남아있는 졸음기가 싹 사라지고,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어지는 생각이 물씬 풍기는… 딱 그런 느낌의 아침 햇살이다.

"하아아~ 출근하는 날에는 날씨가 화창해지더라. 또 놀고 싶게 시리."

"동감이야. 뭐, 어제도 괜찮은 날씨였지만… 이제부터 일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날씨가 유난히 좋아 보여."

장비와 배낭을 빠짐없이 착용하고, 가게문 앞에서 무언가 빠트린 게 없는지 서로서로 확인하면서도 가볍게 떠들던 쌍둥이 자매는 출근 준비를 모두 끝마치며 로덴과 록시아에게 손을 살살 흔들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휴일을 만끽했던 쌍둥이 자매는 온몸에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러면."

"갔다 올게요."

"그래. 두 사람 모두 무리하지 말고."

"무사히 다녀오세요~!"

배웅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한 쌍둥이 자매는 전날보다 더욱 화창해진 주변 풍경을 감상하면서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는 기본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돈을 버는 직업인 만큼 점차 멀어져 가는 쌍둥이 자매의 모습을 바라보던 로덴은 막연한 걱정도 들었지만, 그녀들은 제 몸을 지킬 수 있을만한 충분한 기량을 갖추고 있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크게 무리하는 성향의 모험가도 아니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한 보험, 일전에 항구도시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스크롤도 품속에 지니게 하고 있는 상황이니 너무 지나친 염려는 하지 않기로 하며 옆자리에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날에 마련한 옷이랑 새로 꾸민 머리 모양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후후, 오늘은 한번 이 차림으로 일하고 싶어 지더라고요."

"머리 묶는 건 두 사람이 도와줬니?"

로덴이 일어나자마자 소녀와 마주쳤을 때는 머리가 길게 풀려있는 상태였는데, 그가 잠깐 세수하고 나온 사이에 머리카락이 어제처럼 앙증맞게 묶여있었다.

"어제 언니들한테 배운덕에 저 혼자 묶었어요."

"그래? 장하네."

얘는 볼 때마다 뭐든지 빨리도 배운다니까….

청아한 매력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움직이기 편하게 디자인된 푸른 드레스와 단화, 검은 리본으로 뒷 머리의 일부를 살며시 양쪽으로 묶고 있는 소녀의 차림새는 꽤나 시원해 보이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다.

자랑하듯이 눈앞에서 가볍게 몸을 빙그르 돌린 소녀를 바라본 로덴은 아침부터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 이제 우리도 슬슬 일을 해볼까?"

"네! 주인님."

지난주의 대부분은 모기들 때문에 원정을 도느라 휴업이 길어졌지만 완전히 몸에 배여 버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장사 준비를 끝마친 두 사람은 가게문을 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하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맞이한다.

손님들은 록시아를 보자마자 소녀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챘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낌없는 칭찬과 찬사를 보냈다.

* * *

휴업의 반동으로 제법 분주했던 오늘의 장사를 무난하게 끝내고, 해가 완전히 저물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쌍둥이 자매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모험가 길드에서 받는 의뢰들은 종종 하루 이상 걸리거나 밤늦게 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종류도 상당히 많았으니 딱히 이상하게 여기거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각자 알아서 먹기로 사전에 미리 정해뒀기에 로덴과 록시아는 단 둘만의 저녁식사를 즐겼다.

저녁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쌍둥이 자매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못해도 오늘 하루는 외박이겠군.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겠지…?

로덴은 소녀와 나란히 식기들을 정리하면서도 그녀의 은밀한 취미를 알게 된 이후부터 내내 고민하게 된 중대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각오를 굳혔다.

"내 방에서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을까?"

"지금 바로요?"

"응."

록시아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로덴과 함께 그의 방으로 천천히 입장했다.

곧 있으면 주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폭신한 침대에 소녀를 앉혀둔 로덴은 의자를 끌어서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 봤다.

하아… 말을 꺼내긴 해야 하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막막해지네. 되도록이면 얘가 상처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저기, 록시아…… 오랜만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됐구나. 메림하고 마릴이랑 본격적으로 같이 지내게 된 이후로는 그렇게 있을 기회가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는데, 불편하지는 않니?"

로덴은 다소 긴장해버린 나머지 본디 꺼내려는 주제가 아닌, 그녀의 본래 모습. 인간이 아닌 마족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대화의 주제를 알게 되자 단번에 긴장감이 풀린 소녀는 평소에는 철저히 감춰져 있던 뿔을 살살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아, 그것 때문에 부르셨군요. 요즘에는 반지를 끼고 있는 상태가 더 익숙해질 정도라 이 정도쯤은 괜찮아요."

"그렇구나. 평생 비밀로 할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 두 사람에게도 록시아가 마족이라는 사실을 속 시원히 밝히긴 해야겠는데…."

마왕이라는 진실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

소녀는 주인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밝은 표정을 지어냈다.

"저는 얼마든지 기다려도 좋으니까 판단은 전적으로 주인님에게 맡길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아직은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렴."

"네. 주인님."

지금까지 알아본 쌍둥이 자매의 성격상 록시아가 사실은 마족이라고 해서 관계가 크게 틀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로덴은 개인적으로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가 더욱 친해지고, 같이 지내는 인연이 좀 더 쌓이고 난 이후에 밝히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녀의 머리에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살살 쓰다듬었다.

점차 옆으로 기울게 된 로덴의 손은 매끈한 감촉이 일품인 뿔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흐으응, 흐읏… 거기 조아여어…."

이러고 있으니 속앓이를 하던 로덴의 마음속이 굉장히 안정된다. 지금이라면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사실은 록시아에게 해야 될 말이 하나 더 있어."

"헤으읏… 하실 말슴이여…?"

뿔이 만져지는 기분 좋은 자극에 혀가 살짝 풀려있던 록시아는 멍하니 주인을 올려다볼 뿐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록시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뭐라고 혼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너무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따라오렴."

로덴은 록시아의 뿔과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하더라도 로덴의 대사를 듣자마자 마음속 깊은 속에 찔리는 구석이 있던 록시아는 단번에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설마설마 하면서도 지금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라고 있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로덴은 소녀의 손을 이끌고 벽으로 다가간다.

"그게 있지. 어제 혼자서 청소하는 중에 우연찮게 발견하게 됐는데…."

"……."

로덴이 가늘게 뻗은 검지의 끝은 소녀가 뚫어두었던 엿보기용 구멍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켜고 있다.

머릿속이 하얘졌는지 아무 말도 못 하게 된 록시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로덴은 길게 끌 것 없이 '명령'을 사용하기로 했다.

"록시아, 명령할 테니까 지금부터 내가 던지는 세 개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주렴. 여기에 숨겨져 있는 구멍은 네가 만든 거니?"

명령을 인식한 각인이 반응하며 꾹 다물고 있는 소녀의 오밀조밀한 입술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얼버무리고 싶었지만 각인에 담긴 마법의 힘은 저절로 진실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끝내 소녀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쥐어짜냈다.

"……네에."

"언제 만들어낸 거야?"

"메림 언니가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때부터에요…."

로덴은 상상 이상으로 오래전에 구멍을 뚫어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소녀가 변명할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구멍을 뚫어낸 목적은?"

"…으, 으… 주인님이랑 언니들이 섹스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 기분 좋게 자위하기 위해서요…."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솔직한 대답을 토해낸 록시아는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쥐구멍… 아니, 엿보기 구멍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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