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발각 (5)
* * *
다소 어두운 색으로 치장되어 있으면서도 한쪽 벽이 통째로 거울로 꾸며져 있는 탈의실에 자리 잡은 메림은 록시아의 등 뒤에 서있었다.
"흠, 흠~♪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뭘 입히든 간에 잘 어울리네. 꾸며주는 맛도 있고."
메림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소녀를 신나게 어루만지고 있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짙은 보라색 장발을 빗으로 살살 정돈해 주거나 옷을 갈아 입히고 나서 매무새를 정리하거나 하는 등… 소녀를 더욱 아름답게 치장시키는 것에 열중한다.
여담으로 그녀들이 옷가게에 방문한 주요 목적인 록시아의 새로운 속옷은 진작에 색상별로 구비해둔 상태다.
"언니… 지금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을까요?"
"으응? 많이 부담스럽니? 그러면 좀 더 무게감을 빼둔 느낌으로 한번 입혀볼까나…."
촤라락.
"얘들아. 이번에는 이걸로 가져와봤어."
때마침, 커튼을 젖히고 탈의실 안에 머리를 빼꼼 내민 마릴이 두 눈을 빛내면서 새로 가져온 옷가지를 살살 흔들었다. 그녀의 양 손에는 가벼운 자수로 장식된, 푸르른 색상의 드레스와 검은색 리본이 들려있다.
"어머머! 벌써부터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치? 그치!"
동생과 손바닥을 가볍게 짝짝 부딪힌 메림은 재빠르게 소녀의 옷을 벗겨내고서 동생이 들고 있는 옷과 교환했고, 마릴은 건네받은 옷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자기들끼리 신나게 꺄르륵 거리는 쌍둥이 자매는 정교한 인형 놀이를 하는듯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실제로 꾸며주고 있는 대상이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무릎과 팔꿈치가 보일락 말락 한 길이의 옷이 소녀의 몸에 덧칠된다.
쌍둥이 자매는 합을 맞추어서 록시아에게 드레스를 입힌 다음, 보랏빛 머리와 어울리는 색상인 검은 리본을 능숙하게 다루더니 머리카락의 일부를 양갈래로 묶어 내는 투 사이드 업으로 꾸며냈다.
"오우야. 이건 뭐랄까… 잘 그려진 명화를 보는 느낌이야."
"록시아는 어떠니?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뗘낸 쌍둥이 자매는 마무리로 소녀의 어여쁜 발에 굽이 달려있는 단화를 신겨줬다. 이것으로 조숙한 매력이 물씬 풍겨지리라.
록시아는 거울 앞에서 빙글 돌아서 새로워진 자신의 차림새와 머리 모양을 살펴보더니 화사한 미소를 피어냈다.
"…저도 이게 가장 마음에 드네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록시아는 흔히들 말하는 아가씨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한창 자랄 시기의 여자 아이인 만큼, 이런 식으로 꾸미고 있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예쁘게 꾸민 자신의 모습을 보아줄 남자. 주인도 있으니까. 집에 돌아가면 새로워진 모습을 본 주인의 감상평을 들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무척이나 두근거렸다.
"후후, 별말씀을."
"슬슬 점심시간이네. 록시아. 지금 입고 있는 걸로 살 생각이니?"
"이걸로 고를게요. 언니."
세 여자는 각자 고른 옷가지들을 챙기고 계산대로 향했다. 주인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총액은 은화 두 닢과 대동화 여섯.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 액수다.
지갑을 꺼내든 마릴이 계산하려는 순간, 가방을 뒤적거린 록시아가 자기가 입고 있는 물건들의 가격만큼의 돈을 보탰다.
쌍둥이 자매는 그냥 자기들이 사주겠다고 말하려다가도, 소녀가 내민 돈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본인의 물건은 제 돈으로 사고 싶어 하는 특유의 고집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녀들은 계산을 끝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또각또각.
단화를 신게 된 소녀가 발을 바닥에 붙일 때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여성스러운 굽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메림은 갓 피어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돈을 쓰는 장면은 이번에 처음 보게 됐는데… 로덴 오빠한테 받은 돈이지?"
"네. 삼촌이 매달마다 챙겨주시는 용돈을 쭉 모아 두고 있어요."
사실 록시아를 '구매'했던 로덴의 입장에서 노예인 그녀에게 월급을 챙겨줄 의무는 딱히 없다.
하지만,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서 가게일을 도와주고, 각종 집안일까지 스스로 도맡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노동의 대가를 챙겨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그렇기에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소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쥐어주고 있었다.
"그래? 얼마나 받니?"
"한 달에 은화 다섯 닢씩 받아요."
와우… 새내기 시절의 우리보다 얘가 더 잘 벌고 있네.
숙식 문제를 늘 집에서 해결할 수 있는 록시아의 환경을 생각한다면 그날그날 벌어둔 보수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 적절한 장비와 보급품도 마련해야 하는 신세인 강철 등급 이하의 모험가들보다 훨씬 잘 버는 편이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딱 거기까지로 끝났다. 그녀들은 새로 산 옷에 대해 신나게 떠들면서 걷다가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음식점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았다.
여기는 분명….
실로 오래간만에 주인과 처음으로 같이 점심을 먹었던 음식점에 다시 들어오게 됐음을 깨달은 소녀는 굉장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가게의 풍경은 전반적으로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점원은… 얼굴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바뀐 거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렇게 먹을 생각인데, 록시아는 뭘로 고를 거니?"
"아…. 생각할게 좀 있어서 두 분의 말씀을 못 들었네요. 메뉴판 좀 넘겨줄 수 있을까요?"
"자, 여기."
록시아가 가게를 살펴보는 동안 무엇을 먹을지 금세 정한 쌍둥이 자매가 소녀에게 메뉴판을 건네줬다.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소녀는 글을 읽을 수 없어서 메뉴판을 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때와 달리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있다.
어디 보자… 커피류를 제외한다면… 샌드위치, 애플파이, 팬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오, 세상에…! 이 저주받을 음식이 아직도 존재하는군요.
메뉴판을 쭉 훑어보던 록시아는 '민트푸딩' 이라고 적혀있는 맨 마지막 글자를 보면서 치를 떨었다. 주인하고의 추억 중에서 유일하게 지우고 싶은 것은 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물체를 입안에 담았던 순간의 기억이다.
끔찍한 기억을 떨쳐낸 소녀가 지정한 음식은 당연히….
"저는 팬케이크로 먹을게요."
소녀는 주인과 함께한 생에 처음의 외식으로 접했던 팬케이크를 다시 맛보면서 그때의 포근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기로 했다.
"이 가게는 팬케이크도 괜찮지. 여기~ 주문요!"
"네~"
잠시 후, 점원은 주문받은 음식들을 순서대로 쟁반에 받치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록시아의 자리에는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랑 마찬가지로 작게 조각난 버터가 씌워진, 여전히 먹음직스러운 팬케이크가 다시금 올려졌다.
능숙하게 잘라서 맛을 보면 그때와 다를 것 없이 여전히 달콤하면서,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오오, 왔다 왔어."
"이걸 먹기 위해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이 가게에 방문하게 되더라."
소녀가 추억의 맛에 푹 빠져있는 사이, 테이블 위에 두 개의 접시가 새로이 놓였다. 쌍둥이 자매가 미리 주문해둔 후식… 민트푸딩이다.
헛…?!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소녀는 저 흉물스러운 물체가 하나도 아닌, 두 개씩이나 테이블에 올라와 버렸다는 사실에 그만 기겁해 버렸다. 민트푸딩을 먹다 말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마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네. 혹시 푸딩은 싫어하니?"
"푸딩 자체는 좋아하지만 여기서 내놓는 건 조금 그래요."
그러자 옆에서 푸딩을 맛있게 우물거리고 있던 메림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런이런, 록시아는 민트맛의 참된 매력을 알지 못하는 가엾고 딱한 중생이었군."
"아하하하…."
뭐, 사람마다 취향과 입맛은 각자 다른 편이니 록시아와 쌍둥이 자매는 서로를 존중하며 무탈하게 넘어갔다.
이후로 여자끼리의 수다를 즐기면서 산뜻한 분위기의 점심식사를 끝마친 그녀들은 다양한 가게를 둘러보거나, 마탑에 방문하여 마법도구와 책을 살펴보는 등 도심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로덴이 기다리고 있을 포션 가게로 향했다.
* * *
세 여자는 하늘이 슬슬 노랗게 물드려는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들 잘 놀다 왔어?"
"당연하지! 다음번에는 로덴 오빠도 집에만 틀어 박히지 말고 우리하고 같이 놀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온종일 집에서 늘어지기만 한 줄 알겠네…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창문을 통해 그녀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로덴은 마지막에 봤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상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언니들이 골라준 옷인데, 저도 이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요. …삼촌이 보시기에는 어떤가요?"
"잘 어울려. 잠깐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져서 돌아왔네."
주인의 아낌없는 칭찬을 듣게 된 소녀의 두 뺨이 한 가을의 단풍잎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참 귀엽다고 생각한 로덴은 검은 리본으로 인해 투 사이드 업으로 꾸며진 소녀의 머리를 바라봤다.
"그 머리도 잘 어울리는구나 옷가게 종업원이 꾸며준 거니?"
"우리가 손수."
"꾸며준 거예요."
로덴의 칭찬 섞인 질문에는 소녀 대신 쌍둥이 자매가 합창하면서 대답해줬다. 그는 두 사람의 손재주에 내심 감탄했다.
"나머지는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그녀들이 돌아오자마자 떠드느라 가게 구역에서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사람은 금방 거실의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나가기 전에 오라버니가 부탁한 대로 홀름 상단 하고 이야기는 다 전해놨어요. 물건은 삼일 뒤에 도착할 거라 하던데요."
"아아, 수고했어. 모험가 길드에서 보상은 받았고?"
세 여자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무언가 특이사항이 남았는지 큰 언니인 메림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길드에서 이야기를 전달받은 건데… 소식을 접한 영주님이 우리 네 사람을 한번 직접 보고 싶다고 하더라."
"…바르멜라 영주가?"
"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