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흡혈귀 (7)
* * *
선입견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섭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입견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고, 로덴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로덴 일행의 눈앞에 있는 이종족이 리자드맨(Lizard man)이라는 종족명이 붙은 이유 중 하나는 대충 보면 모조리 수컷으로만 보이기 때문. 근본적으로 파충류니까 당연하다.
물론, 리자드맨의 체격과 신체능력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수컷이 암컷보다 더 좋은 편. 수컷과 비교했을 때 암컷의 비늘이 미묘하게 더 밝은 색을 띄우기도 해서 조금만 신경 쓰면 암수 구분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언제나 예외라는 게 존재하는 법.
검은 비늘 부족의 족장이자, 기골이 장대한 리자드맨인 샤르나르 카트릭이 바로 그 예외의 경우다.
로덴에게 우수한 수컷이라는 말을 들은 샤르나르는 길게 늘어뜨린 꼬리로 바닥을 살살 쓸어내며 목소리를 냈다.
"흐음, 자네가 꺼낸 말은 내가 수컷만큼이나 강인해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나?"
"어… 음…… 네. 온몸이 근육으로 꽉 차있고, 꼬리도 굵직하고 기다란 것이 어느 수컷들 보다도 월등히 강인해 보입니다."
정확히는 3대 500도 거뜬히 칠 수 있는 헬창들까지 한수 접어둘 정도지.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내뱉어버린 망언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던 로덴은 상대방이 마련해준 동아줄을 꽈악 붙잡았다.
쟈하하하!
그러자 샤르나르는 크게 웃으면서 로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행히도 붙잡은 건 썩은 동아줄이 아니다. 특히 꼬리를 칭찬한 게 잘 먹혀들어갔다.
"거 고맙구먼 그래. 종족과 성별에 상관없이 힘은 좋은 게야. 나는 강하게 태어나고, 꾸준한 수행을 거친 끝에 우리 부족을 이끌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지."
샤르나르는 암컷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래의 모든 수컷들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체격이 좋고, 강인하며, 뛰어난 감각과 용맹함, 언제나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까지 두루 갖추었다.
그녀는 3년이 지날 때마다 한번, 검은 비늘 부족 내의 전사들끼리 경쟁한 뒤에 족장에게 도전하는 의식을 통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유례없는 암컷 족장이 된 이후에 그 자리를 지켜낸지 올해 들어 딱 10년이 다 돼간다.
"더군다나 꼬리가 크고 아름다운, 내 취향의 수컷들을 마음껏 거느리는 호사까지 누리게 됐다네. 크흐흐…."
리자드맨에게 있어 전투력 다음으로 이성에게 어필할 포인트가 되는 것은 꼬리다. 그들은 대부분 수컷과 암컷을 가리지 않고 보다 굵직하고 기다란 꼬리를 가진 이성을 선호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남자가 젖가슴이 작은 여자보다는 큰 쪽을 선호하는 거랑, 대부분의 여자가 자지가 작은 남자보다는 큰 쪽을 선호하는 것과 대충 비슷한 느낌이다.
"아차차, 내 자랑이나 늘어놓으려고 자네들을 찾아온 게 아니었는데. 이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먼."
호탕하게 자기소개를 이어가던 족장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며 본론으로 넘어갔다.
"맨 처음에 자네들과 마주했을 때, 나를 포함한 우리 부족의 전사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흡혈 벌레들의 둥지를 제거하고 있다고 말했었지?"
"덕분에 많이 바빴다고 했었죠."
"실은 말이지. 어제도 제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부락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시간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동굴을 찾아냈다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동굴을 잠시 조사해본 결과, 제법 깊숙하게 이어져 있으면서도 내부를 배회하고 있는 거대 모기와 마물들이 침입을 막아내려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고 한다.
겨우 그 정도의 단서만으로 어림짐작을 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리를 이끌고 있는 족장으로서의 촉감이 강렬하게 속삭이고 있다. 이 동굴 안에 이번 사태의 원흉이 숨어져 있다고.
"그런 관계로 곧 있으면 정예를 이끌어서 그 동굴을 끝까지 탐험할 생각인데, 나랑 같이 움직여볼 생각은 없는가? 애초에 자네들도 원흉을 없애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말일세."
"족장님의 제안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확인해야 합니다만… 어째서 저희에게 그런 말을 건네주는 겁니까?"
이대로 늪지대를 탐사하기보다는 샤르나르와 같이 동굴을 조사하는 것이 원흉에 다다를 확률이 훨씬 높긴 하겠지만 최근에 리자드맨의 부락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 파티가 로덴 일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덴의 성격상 다른 모험가들도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이유로 자기들을 콕 집은 것인지 최소한의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타당한 질문이라 여긴 족장은 비늘로 덮여있는 손으로 메림과 록시아를 순서대로 지목했다.
"두 암컷의 차림새를 보아하니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인데…. 이 근방에 있는 모험가 중에서 주술사가 둘씩이나 포함돼있는 무리는 자네들이 유일하거든.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횃불에 의존해서 자잘한 흡혈 벌레들을 잡았지만, 이번에 확실한 사냥을 하기 위해서는 주술사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네."
…그럭저럭 납득이 가는 이유다. 아직 두 번째 이유가 남았다며 설명을 끝내지 않은 샤르나르는 두 여자를 지목하고 있던 손을 옆으로 돌렸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건 서로의 몸에 진흙을 치덕치덕 바르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검푸르고 거친 비늘과 강인한 전사의 눈을 하고 있는 성체와 달리, 어린 리저드맨은 청개구리의 그것처럼 밝은 녹빛을 띈 매끈한 피부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귀엽다.
긁적긁적.
아이들은 놀고 있는 와중에도 모기에게 물린 부분을 수시로 긁적거리고 있다. 양 손을 동원하는 걸 보니 겨우 한 두 군데 물린 게 아닌 모양새다.
성체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가려워도 꾸욱 참고 있지만 애들이 저런 자극을 참아낼 수 있는 경우는 많이 없다.
가려움에 괴로워하고 있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족장은 허리춤에 걸어둔 주머니를 뒤적거려 빈 병을 여러 개 꺼내 들었다.
"자네가 아이들에게 이걸 건네줬다는 이야기를 접했다네. 내용물은 진작에 텅 비어버렸지만 가려운 느낌을 완화해주는 신통한 약이 들어있었다고 하더군. 아이들이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검은 비늘 부족의 족장이자 부모로서 감사를 표하지."
"뭐… 별거 아닙니다. 애들이 몸을 수시로 벅벅 긁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웠거든요."
여기 지내는 동안 리자드맨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받고 있으니 숙박비 대신인 개념으로 몇 개 나눠줬을 뿐인데.
"쟈하하!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수컷이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을 할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아. 그래서 자네 일행이 믿을만하다고 판단하고, 이런 제안을 건넨 것이지. 이걸로 설명은 충분히 했으니 대답을 듣고 싶구먼. 나를 따라와 주겠나?"
샤르나르는 조금 전에 로덴 일행에게 막 말을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손을 내밀었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족장님."
로덴 역시 샤르나르의 손을 다시 한번 마주 잡았다.
* * *
"……이쪽."
로덴 일행이 족장과 함께 부락에서 출발한 지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들은 쓸려간 흙더미와 기울어진 나무의 잔해의 아래, 땅 속으로 향하는 입구를 바라봤다.
한 번에 두 명 씩만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넓이였으며 안을 들여다보니 내부는 어두웠고, 속은 깊었다. 굴 너머에서 벌레들의 날개소리가 웅웅거린다.
"이런 은밀한 장소를 용캐도 찾았군요."
"내 아들놈의 수색 능력이 빛을 발한 게지."
"……."
이런 동굴 안을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생각한 족장이 다른 전사들은 차라리 고치 제거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라고 명령해둔 상황.
현재 로덴 일행과 동행하고 있는 리자드맨은 단 둘 뿐이었는데, 한 명은 당연히 샤르나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큰아들인 궤루브다. 활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는 굉장히 과묵한 편이다.
리자드맨과 인간, 마족이 뒤섞인 파티는 좁은 입구의 급사면을 타고, 아래쪽으로 천천히 발을 디디며 나아갔다.
박쥐와 도마뱀의 배설물이나 자그마한 벌레들의 사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있는 바닥과 벽면은 생각 이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눅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의 주위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깔리게 됐다.
화르륵!
선두와 후방에 있는 사람이 각각 기름을 듬뿍 먹인 횃불을 피워서 주위를 밝히자, 사방으로 깔려있던 어둠이 멀찍이 달아난다.
횃불을 들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손이 하나 비게 되는 만큼 일반적인 경우에는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는 게 더 좋겠지만….
치지지직!
지금처럼 빛에 이끌린 모기를 포함한 자잘한 벌레들을 제거하기에는 차라리 횃불이 훨씬 유용하다.
입구는 비좁았던 동굴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안으로 진입할수록 점차 넓어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모두들 침묵을 지키느라 뚝뚝 떨어지는 물방을 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동굴 안에 고요히 울려 퍼진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전방을 예의주시 하던 궤루브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 소형 마물들과 흡혈 벌레들이 대량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다들 잘 들었겠지? 준비들 하게."
거칠게 목을 이리저리 풀어낸 샤르나르가 전투 도끼를 움켜쥐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일행도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애앵! 애ㅡ애애앵!
궤루브가 알려준 데로 그간 지긋지긋하게 마주쳤던 모기떼뿐만이 아니라 사람 팔뚝만 한 굵기의 데스웜 수십 마리가 벽면과 바닥을 파고드는 흔적을 그려내며 재빠르게 다가왔다.
"쟈ㅡ하하하하!!"
후ㅡ웅! 훙! 후우ㅡ웅!!
모기들은 일행에게 맡기겠다는 태도로 과감히 돌진한 샤르나르는 도끼로 자그마한 돌풍을 일으키며 땅과 벽에서 튀어나온 데스웜들을 잘게 찢어발겼다.
족장과 나란히 뛰어든 로덴 또한 재빠르고 효율적인 검격을 휘둘러서 데스웜의 모가지만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리자드맨 중에서는 가장 강하군. 레벨이랑 재능도 상당하고.
로덴은 도끼만이 아니라 꼬리까지 자유자재로 휘둘러서 온몸을 무기로 활용하는 샤르나르의 전투력을 보며 나직이 감탄하면서도 이 동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을 강하게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