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거중인 용사는 마왕과 함께 산다-70화 (70/149)

〈 70화 〉 흡혈귀 (6)

* * *

로덴은 투구를 쓰고 있을 때… 모험가의 신분에서 사용하는 특유의 말투와 약간 변조된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소. 우리는 바르멜라의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 팀이오. 최근에 들끓고 있는 모기 떼의 본거지가 이 늪지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지."

그 대답을 듣자 리자드맨들의 경계심이 한층 누그러졌다.

"지금은 시간이 늦어진 관계로 당신들의 부락에서 하룻밤 지낼 겸, 정보도 좀 수집하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소?"

"평상시였다면 외지인들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겠지만… 흡혈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들에 한해서 방문과 숙박을 허가하라는 족장님의 지시가 내려왔지. 단, 너희들이 모험가라는 증표를 보여줘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로덴과 쌍둥이 자매는 모험가 인식표와 길드의 인장이 찍혀있는 의뢰서를 내밀었다.

로덴은 유일하게 모험가 인식표를 갖고 있지 않은 록시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참, 이 아이는 아직 수습생인 신세라서 따로 모험가로 등록하지는 않았소만."

경비병은 시선을 낮추어 소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아, 안녕하세요…."

종종 마물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질적인 외형을 하고 있는 리자드맨과 눈을 마주하면 저 나이 때의 인간 소녀는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록시아의 경우엔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리자드맨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 왔다. 썩 마음에 든다.

"뭐… 일행 중 한 명 정도는 괜찮겠지. 검은 비늘 부족의 안식처에 온 것을 환영한다. 쓸데없는 문제는 일으키지 말도록."

"환영에 감사하오."

로덴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 경비병과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면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건물, 외지인이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을 알아본 뒤, 이곳을 먼저 방문했던 모험가들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다.

오늘은 두 팀이 먼저 방문했다고 한다. 한쪽은 정보만 수집하고서 다시 떠나갔다고 하고, 다른 파티는 부락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일행은 경비병들을 지나쳐 검은 비늘 부족이 살고 있는 부락으로 들어섰다. 늪지대 한복판에 마련된 장소라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철퍽철퍽하는 소리가 저절로 따라붙는다.

지나가는 오두막마다 큼지막한 물고기들이 굴비처럼 엮여서 길게 늘어져 있다. 리자드맨의 보존식인 모양.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주위를 배회하는 리자드맨은 얼마 없었다. 어쩌다가 마주하는 이들도 이방인에게 쉬이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세 여자는 처음으로 접하게 된 리자드맨의 구역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저마다 한마디 씩 꺼냈다.

"리자드맨 분들이 사는 부락의 밤은 조명이 없어서 주위가 많이 어둡지만, 인간들이 사는 마을이랑 크게 다르진 않네요."

"그러게. 늪지대에 지어져 있는 거랑, 주민들의 외모가 개성적인 점을 빼면."

"흐흐, 마릴. 너는 무섭게 생겼다는 말을 고풍스럽게 돌려서 말하네. 그나저나, 나는 개인적으로 좀 더 와일드한 광경을 상상했었는데. 여기는 생각보다 평범하… 에펫! 에페페! 퉷! 퉷! 퉤!!"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메림이 돌연 고개를 획! 돌리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으아으으… 벌레가 입에 들어왔어."

"깜짝 놀라라. 머리 위에 그런 걸 달고 다니니까 그렇지."

"어우 씨, 찝찝해. 빛 때문에 나한테 어그로가 많이 끌렸나 보네."

후욱!

말 그대로 벌레씹은 표정을 지은 메림은 내내 머리 위에 유지하고 있던 은은한 밝기의 구체를 꺼뜨렸다.

이것으로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졌지만 때마침 목적지. 이방인 용 숙소에 도착했으니 라이트는 제 역할을 다 했다.

숙소를 지키는 리자드맨은 딱히 없었다.

그들에게도 크나큰 골칫거리인 모기들을 퇴치해 준다는 이방인을 위해 숙박의 대가를 받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건물 안에 훔칠만한 물건이 딱히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아무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전에 경비병이 이야기해줬던 모험가 파티가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머릿수는 다섯, 전원 시커먼 남자, 빛의 구체가 그들의 중심에 둥둥 떠있는 것을 보면 마법사도 섞여있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네. 다른 도시에서 모기 둥지의 현상금을 노리고 온 모험가 파티인가….

같은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신세인 이상, 그들에게 정보를 얻으려는 행위는 무의미. 이야기를 길게 나눌 필요성은 전혀 없다.

로덴 일행은 그들과 짤막하게 인사만을 나눈 뒤에 적당히 거리를 벌려서 누울 자리를 잡았다.

사실 말이 좋아서 숙소라고 칭하고 있지, 바닥에 지푸라기와 비슷한 것이 수북하게 깔려있는 모양새는 그야말로 마구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애초에 늪지대에서 살아갈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난 리자드맨에게 취침용 도구 따위는 아예 필요 없으니 푹신푹신한 이불이나 깔게가 부락 안에 있을 리 만무했다. 침구라고 칭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거칠게 깎아 만든 목침뿐이다.

"지붕이랑 벽이 있는 건물에서 자는 것 자체가 노숙하고 비교하면 감지덕지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고. 록시아는 어때? 여기서 잘 수 있겠니?"

록시아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볼을 잔뜩 부풀리며 로덴에게 바짝 붙은 쌍둥이 자매가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놔… 이 인간은 애인들보다 조카를 먼저 챙기네."

"쪼ㅡ끔 섭섭하긴 해요."

"현역 모험가인 너희 둘은 야영하는 것쯤이야 많이 익숙하잖아. 애한테 질투하지 말라고. 아무튼, 록시아는 괜찮아?"

주인과 언니들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네. 원래는 노숙도 각오했는 걸요. 저는 괜찮아요."

"그거 다행이구나. 이제 슬슬 자자."

네 사람은 주변 바닥의 지푸라기들을 긁어모아 최대한 그럴듯한 잠자리를 만들고는 다닥다닥 붙어모였다.

"저기… 로덴 오라버니. 불침번 순서는 어떻게 정할까요?"

그렇게 나란히 잠들기 직전, 마릴은 자기 일행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건물 안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라 해도, 타종족의 군락에서 자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다른 모험가 파티까지 있다면 여러모로 불안 요소가 매우 크다.

동업자라고는 하지만 모험가들은 새까만 욕망 앞에서는 언제든지 살인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존재다.

더군다나 남자들로만 이뤄진 파티라서 그런지 인사를 나눈 이후부터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선도 느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주장은 타당했다.

"너희는 편하게 자도 괜찮아. 조금만 신경 써서 잠들면 뭐가 다가오든 즉각 반응할 수 있거든."

"흐ㅡ음…… 알았어. 오빠만 믿을게."

주인을 믿고 있는 록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외지에서 잠들 때 불침번을 세우는 게 습관화된 쌍둥이 자매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비췄지만 그녀들은 로덴을 믿고 편하게 잠들기로 했다.

그가 이런 걸로 헛소리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

아늑한 잠자리는 결코 아니지만, 평소보다도 시원한 느낌과 온종일 움직였던 피로감이 더해지니 그녀들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세 여자가 잠드는 모습을 눈에 담은 로덴은 벽면에 등을 기대어 비스듬하게 앉은 상태로 눈을 감았다. 투구를 벗지 않아서 조금 갑갑했지만 충분히 단련이 돼있어서 이 정도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이렇게 투구를 쓰고 있으면 얼굴을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모험가 파티가 보기에 로덴이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이점까지 덤으로 제공해준다.

모험가 파티가 일행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사실은 로덴도 진작에 다 알아채고 있다.

뭐, 그래. 멀찍이서 쳐다보는 것 정도는 로덴도 그러려니 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을 개짓거리를 기어이 실행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처참하게 찢어발기겠지만.

두 일행 모두에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늪지대의 새벽은 아무런 사고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 * *

로덴 일행이 검은 비늘 부족의 부락을 거처 삼아서 늪지대를 탐사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삼 일째가 되는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지금까지 모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무언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소소한 수확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괴물 모기들의 고치. 조금 더 정확히는 고치에서 뽑아낸 핏빛의 핵이다.

모기는 본래 고치에서 태어나는 생물이 결코 아니지만 거대한 변종 모기의 경우에는 예외다.

현지인인 리자드맨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험난한 늪지대를 탐험한 끝에 변종 모기의 알이 꽉 차있는 고치의 핵을 무려 4개나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변종 모기의 알은 모조리 제거했다.

모험가 길드에서 고치의 핵 하나당 평균적으로 은화 5 닢을 지급한다고 했으니 제법 짭짤한 부수입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외지인 전용 숙소에서 기지개를 쭉 켜며 밖으로 나온 로덴 일행이 오늘도 늪지대를 조사하기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을 때.

"최근 들어 흡혈 벌레의 둥지를 꾸준히 없애주고 있는 모험가 무리가 그대들이군?"

로덴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은, 2M는 거뜬히 넘는 체격의 리자드맨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다른 리자드맨들이 아담하게 보일 정도다.

"만나서 반갑군. 나는 검은 비늘 부족을 이끌고 있는 족장, 샤르나르 카트릭… 이라고 한다네. 최근에 전사들을 이끌고 흡혈 벌레들의 둥지를 제거하느라 몹시 바빴는데, 이제야 인사를 나눌 짬이 생겼어."

자신을 족장이라고 소개한 샤르나르의 유달리 새까만 비늘에는 오래 묵어 새하얗게 변한 흉터들이 셀 수 없이 새겨져 있다. 속된 말로 영광의 상처다.

샤르나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 로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족장님."

부족을 이끄는 족장과 대면한 것인 만큼, 로덴은 말을 높이면서 샤르나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저는… 타이터스라고 합니다."

다만, 이름만은 과거에 은 등급의 모험가 신분일 때 사용했던 것을 내밀었다.

족장과의 악수를 충분히 나눈 로덴은 쌍둥이 자매와 록시아를 간단히 소개해줬다. 리자드맨 특유의 습관으로 혀를 날름 거리면서 세 여자를 내려다보던 샤르나르는 쇠를 긁어내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호오, 이 셋은 자네의 암컷들인가? 우수한 기운을 품고 있는 수컷답게 여럿을 거느리는군."

샤르나르가 암컷이니 수컷이니 말한 것은 결코 모욕의 의미가 아니다. 리자드맨이 남녀를 부르는 호칭이 그것 이외에는 달리 존재하지 않을 뿐.

주인님의 암컷….

그러거나 말거나, 노골적인 단어가 귓속에 박혀버린 록시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소녀는 주인님이 고개를 끄덕거렸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절실히 바랬지만, 애석하게도 로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그는 로덴이 아닌 타이터스라는 이름의 은 등급 모험가.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대답은….

"단순한 동료 관계입니다."

"그런가? 내 실례했구먼. 지금 당장 반려가 없는 상태라면 하루라도 빨리 짝들을 찾아서 씨앗을 널리 널리 퍼트리게. 자네 같은 우수한 수컷은 응당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네."

씨앗을 퍼트리라는 족장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세 여자는 로덴의 고간을 흘겨보면서 몹시 외설스러운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아하하… 마음 깊이 세겨듣도록 하죠."

로덴은 일부다처를 권장하고 있는 리자드맨 족장에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렇다 쳐도 족장님 같은 우수한 수컷이라면 틀림없이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있겠군요."

리자드맨 무리는 예외없이 강인한 수컷이 여러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의 사회체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위치에 있을 정도라면 최소한 셋 이상의 암컷을 거느린다.

과거에 오랫동안 홀로 여행하면서 리자드맨 부족과 몇 번 마주한 로덴은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로덴의 경험상 리자드맨 수컷… 특히 족장은 하나같이 이런 방식의 칭찬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고개를 저은 리자드맨 족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시다시피 나는 암컷일세."

"아…."

로덴은 흔히들 말하는 뇌정지가 와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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