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흡혈귀
* * *
쌍둥이 자매와 같은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게 되고 난지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나갈 무렵.
"…마계국의 내전이 벌써 끝났다고요?"
"그 반응을 보니 선생님도 모르고 계셨군요. 저희도 재료를 매입하려고 옆 도시에 머물렀을 때야 마계국의 소식을 전해 들은 참입니다.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저희 영지에도 서서히 퍼지겠죠."
아침부터 모험가 길드로 향한 쌍둥이 자매를 떠나 보넨 로덴과 록시아는 가게를 찾아온 홀름 상단의 직원에게 이런저런 재료들을 전달받던 중, 그들을 통해 마계국의 내전이 종결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저희도 처음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니까요. 설마 내전이 그렇게 빨리 끝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니 이번 세대의 마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조심스럽게 떠돌고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러한 소문이 떠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족히 10년은 넘게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내전이 1년도 지나지 않는 짤막한 시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면 마왕이 힘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마왕…."
상단 직원의 말을 들으며 마왕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린 로덴은 바로 옆에서 싱숭생숭한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녀, 록시아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이 아이가 마왕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의 잊으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로덴의 모습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직원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만약에 마왕이 다시 나타났다고 쳐도 내전을 치른 대가로 상당히 많은 병력을 잃은 만큼 옛날처럼 적극적으로 인간의 땅을 공격할 여유는 없는 상황이죠. 더군다나 알트마 왕국과 크로이브 공국이 양쪽에서 버텨주는 이상, 여기 하론 공국은 안전하니까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지 마세요."
마계국과 한참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론 공국 시민의 입장에서 마왕의 소문은 아주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저 흥미로운 정도일 뿐.
"뭐… 그렇겠죠.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직원들이 가져온 상자의 내용물을 간단히 확인한 로덴은 그들 중 한 명이 내민 확인서에 사인을 해주면서 수고의 말을 건넸다.
평소처럼 다음번에도 홀름 상단을 애용해 달라는 인사말과 함께 떠나가기 직전, 조금 전에 마계국의 소식을 전해줬던 직원이 로덴에게 바짝 다가왔다.
"아참참! 선생님. 아직 가게를 여는 시간은 아니지만… 요즘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그 시원한 약을 미리 팔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벌레한테 물렸을 때 바르면 하도 효과가 좋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괜찮습니다. 록시아, 가려움 억제약 좀 이 사람들 수만큼 가져와 주렴."
"네, 삼촌. 잠시만요."
마침 재료도 많이 들어왔고, 전날에 꽤 많이 만들어뒀으니 몇 개 정도는 미리 팔아도 문제없겠다 생각한 로덴은 직원들에게 투명한 약물이 들어있는 병을 하나씩 건네주고 값을 받았다.
내용물은 현대에 있는 물파스 하고는 많이 다르지만 바르기만 하면 물파스처럼 시원해지는 느낌을 주는 약물이며 최근에 벌레들… 특히 최근 급증한 모기들 덕분에 포션만큼이나 잘 팔리고 있는 효자 상품이다.
아무튼, 직원들이 떠나간 뒤에 로덴은 재료가 들은 상자들을 지하로 옮기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록시아가 무게를 조절하는 마법으로 보조해준 덕분에 작업은 상당히 수월했다.
로덴은 작업을 하는 내내 소녀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당장 할 일을 마무리하고서 간판을 '운영중'으로 뒤집은 그는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록시아와 나란히 앉은 채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 록시아가 생각하고 있는 건 그거 말고는 달리 없겠지…
"마계국의 소식이 많이 신경 쓰이나 보구나."
"네… 비록 도망치긴 했지만 그곳이 제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사실만은 변치 않으니까요."
주인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마계국의 내전이 빨리 끝나게 됐다는 사실 자체는 정말 다행이네요. 친구들이랑 같이 떠난 피난길에서 마족들과 마족들이 싸우는 모습을 멀찍이서 몰래 보게 된 일이 종종 있었는데, 너무 참혹하면서도 무서웠거든요."
록시아는 지금 이 순간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같은 동족들끼리 서로 검을 휘두르고 화살과 마법을 날리던 자그마한 전쟁터를,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족들의 시체들 사이에 몸을 숨기면서 지겹도록 맡았던 역한 피냄새를.
"전대 마왕님에 대한 이야기는 시설의 어른들에게 들어본 게 전부지만… 상당히 호전적이라서 임기와 동시에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인간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부디 이번 세대의 마왕님은 평화를 우선시하는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소녀의 말을 가만히 듣던 로덴은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잠시 망설인 그는 지금까지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록시아는 쌍둥이한테 빌린 책에서 용사랑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장면을 읽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니? 마족의 입장에서 말이야."
"음…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전대 마왕님 시절의 마족들하고 저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굳이 대답하자면 용사님과 동료분들은 사명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분에 두 종족 간의 기나긴 전쟁이 빨리 끝나게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이 아이가 마왕이라는 진실과 내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 날이 필연적으로 찾아올 거라는 직감을 떨쳐낼 수 없었는데, 지금의 대답 덕분에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군.
"주인님?"
그리 생각한 로덴은 별 말없이 록시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고, 소녀는 약간 어리둥절해했지만 그녀가 주인의 손길을 거부할 리 없었다.
딸랑, 딸랑.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에 손님이 왔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방울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끝나게 됐다. 로덴과 록시아는 시선을 문으로 향하면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 * *
"다녀왔습니다아ㅡ"
"다녀왔어요…."
해가 완전히 저물어버리고 사방에 어둠이 깔린 늦은 시간.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빠르게 반응한 로덴이 문을 열자, 피곤해진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쌍둥이 자매가 앞에 서 있었다.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길래 야영하고 오는 건가 했는데, 다행이네. 어서 들어와."
"어우… 십 분만 더 늦었다면 꼼짝없이 성벽 앞에서 밤을 보내야 했을 거야."
"길드에 보고하고 오느라 좀 많이 늦었네요."
쌍둥이 자매는 순서대로 로덴과 포옹을 나누면서 집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둘이 함께 욕실로 향해서 온종일 먼지가 누적돼버린 몸을 깨끗이 씻어낸 뒤에 개운해진 얼굴로 거실에 나란히 앉아 똑같이 늘어진 표정이 됐다. 어지간히도 피로했던 모양이다.
눈치 빠른 소녀는 시원한 물이 가득히 담긴 두 잔의 컵을 챙기며 쌍둥이 자매에게 다가갔다.
"메림 언니, 마릴 언니.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 잘 마실게, 고마워."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ㅡ!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땡큐."
동생과 함께 양 쪽에서 소녀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던 메림은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
"엇… 록시아, 잠깐만 그대로 가만히…."
"네? 네."
메림은 고양이들이 팔을 휘두르기 직전에 취할 법한 기묘한 자세를 잡더니 록시아를 향해 오른손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찰싹ㅡ!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효과음이지만 이 소리는 메림이 록시아의 뺨을 때린 게 아니라 팔목을 때린 소리다. 소녀는 순간적으로 팔목이 얼얼해진 감촉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잡았다 요놈… 아참, 록시아. 뜬금없이 놀라게 해서 미안해. 혹시 아팠니?"
"아, 아뇨. 좀 놀라긴 했는데 아프진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이 망할 놈이 우리 귀여운 록시아의 신성한 피를 빨아먹으려고 하는 장면을 가만히 방치할 수 없었거든. 자, 이거 보라고."
씩 웃은 메림이 손바닥을 쫙 펼쳐서 소녀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모기(였던것)다.
"아하하… 고마워요. 메림 언니."
"하아ㅡ 메림, 그런 건 굳이 자랑하지 말고 후딱 버려."
"그러게 말이지. 무슨 애도 아니고."
록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저릿한 팔목을 매만졌고, 옆에서 그녀를 쭉 바라보던 마릴과 로덴은 한마음이 되어 양쪽에서 각자 한 소리씩 했다.
"네,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메림은 찌부러진 모기를 창밖에 훌훌 털어낸 뒤에 제자리에 돌아왔다.
"어우ㅡ! 야, 마릴. 작년 이맘때에 비해서 모기가 최소한 두배 이상은 많이 날아다니는 거 같지 않냐?"
"뭐, 그렇긴 하지. 그때랑 비교하면 날씨는 크게 달라진 거 같지는 않은데… 이상한 일이긴 해."
기억을 더듬거리며 대답함과 동시에 배낭을 뒤적거린 마릴은 투명한 약품이 들어있는 병을 꺼내 들었다.
로덴이 오늘 아침에 홀름 상단 직원들에게 판매한 것과 같은, 가려움 억제약이다.
"후우, 로덴 오라버니가 건네준 약 덕분에 벌레한테 물려도 그나마 가려움을 덜어낼 수 있는 게 다행이에요."
"그것과는 별개로 놈들한테 피를 쪽쪽 빨리는 거 자체가 기분이 더러워지는 게 문제지만."
병을 살짝 기울여서 약품을 손바닥에 묻힌 마릴은 자신의 팔과 언니의 허벅지에 천천히 발랐다. 사실 쌍둥이 자매는 오늘의 의뢰를 수행하면서 모기들에게 여러 차례 피를 빨려버렸다.
쌍둥이 자매를 가만히 지켜보던 로덴과 록시아 또한 확실히 요즘따라 모기가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네 사람은 한동안 모기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국에는 모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잘 버티자는 뻔한 결론으로 끝났으니 그다지 유익하다고 할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이후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모기들의 기세가 줄어들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마치 무언가가 뒤어서 조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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